[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8] 평양애국열사릉에 잠들어 있는 북미주교포들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28] 평양애국열사릉에 잠들어 있는 북미주교포들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4.05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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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평양축전 서산호텔1층(단체 춤 광경)

지난 1989년 여름 평양축전 때다. 행사 중 북 당국은 “참가 해외교포들이 김일성주석과 기념촬영을 한다”며 모이라고 했다. 세계 각처에서 수백 명 5개 교포그룹들이 참가했다.

내 경우는 단독으로 기자호텔에 묵고 있어, 촬영장소로 나가기 전 숙소에서 사전 철저한 신체검색을 마쳤다. 사진기 등 소지품 소지가 용납 안 돼 개인용품을 모두 방에 두고 빈 몸으로 나섰다. 그런데 차 운전기사나 안내원은 집결장소가 어딘지 몰랐다. 어딘가에 알아보더니 A장소로 가보라 해 그리로 차를 몰았다. 거기선 장소가 바뀌었다고 급히 B장소로 가라고 했다. 그러나 B장소도 아니었다. 다시 C장소로 돌아가라고 했다. 평양시내에서 오락가락하다 마침내 목적지인 어느 큰 체육관에 도착했다. 이미 해외교포 그룹별로 따로따로 모여들 있었다. 나 홀로 캐나다 시민이니 미국 교포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북측은 그룹별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임시계단식 나무층계를 만들어 놓았다. 해외교포들은 그룹별로 10미터 이상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계단 위에 올라서 있었다. 한 그룹에 수십 명 이상 족히 돼 보였다. 모두 나무계단에 올라 준비상태로 김 주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중국, 일본, 유럽, 러시아, 미주 등지로 나뉘었다. 체육관 내 자리정돈 등을 감독하던 로(노)철수 북측참사가 늦게 도착한 나를 보더니 반말로 “뭐하니. 날래날래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소리쳤다. 층계에 서 있던 교포들이 내려다보며 빙긋이 웃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늦은 게 내 잘못인가.’ 끽소리 한마디 못하고 미주그룹에 끼어들었다.

1980년대 노철수 책임참사는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북미주 교포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해외동포원호위원회(당시 이름)를 주관하는 책임자로 까다롭기로 소문나 있었다. 당시 해외이산가족 등 방문자들에겐 북한단체명 보다 ‘노철수’, ‘노철수’하던, 그의 이름이 더 귀에 익은 북측대명사였다. 내 젊었던 시기라 노 참사에겐 어리게 보였던 것 같다.

오히려 늦게 온 탓에 비교적 앞쪽 편에 자리를 잡았다. 누가 앞쪽 공간을 트고 만들어 준 탓이다. 어디서고 고마운 사람은 있다. 노철수는 전체일동에게 “조금 있으면 수령님이 곧 A문으로 입장하십니다”하고 우리 그룹 바로 옆 동쪽 A문을 가리켰다. 또 “기념사진 후 출국 전에 모두에게 한 장씩 뽑아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체육관 입구는 동쪽 A문과 서쪽 B문 두 군데이다. 그리고도 10분 정도는 더 기다린 것 같다.

평양 김일성-김정일 참배

갑자기 ‘와아’하는 함성소리가 다른 쪽 편에서 들렸다. 김일성주석이 손을 들고 활짝 웃는 모습으로 서너 명 수행원과 반대쪽 B문으로 입장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마 보안문제 때문에 철저하게 준비된 시나리오가 아닐까. 그렇다면 내 차가 장소변경으로 3번이나 헤맨 것도 그런 이유였나. 김 주석은 첫 번째 서쪽그룹부터 차례로 이동하며 단체사진촬영을 시작했다. 매번 자리를 옮겨 새 그룹을 마주할 때마다 ‘와아’하는 환호성이 체육관을 크게 울렸다.

드디어 김일성 주석은 미소 띤 얼굴로 마지막 차례인 우리 미주교포그룹과 마주했다. 그러나 아무 환호소리 한마디 없이 침묵이 흘렀다. 아니 단 한명 있었다. 내 앞 우측의 LA선우학원 박사다. 그는 혼자 두 손을 번쩍 들고 “와”하고 홀로 목청을 높이다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좌우에 호응하는 교포가 아무도 없었으니 좀 무안했으리라.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 졌지만 어쩌겠는가.

사실 이런 떠들썩한 환호성은 정서적으로 북미교포들 스타일이 아니다. 훗날 청와대 뜰에서 내가 겪은 경험으로 당시 북미교포들이 지방순찰에 나섰던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은 청와대 저편에서, 헬리콥터에서 내려 교포들을 향하던 길이었다. 그때도 요란스런 함성소리는 없었다.

미주교포들은 축전 뒤 약속받은 김일성과 찍은 사진을 전해 받지 못했다. 다른 지역 교포들 역시 받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북측에선 공개적으로 말한 것을 슬그머니 나중 모른 체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 주석과 단체촬영을 생각하면 내 앞줄 앞에 서 있던 김 주석 뒷머리 혹이 유난히 크게 보였던 기억만이 떠오른다.

북한 평양축전 가판대(라면)

선우학원(1918-2015) 박사 얘기를 잠깐하자. 선우박사부부와는 평양축전 때 잠깐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소탈하고 무난한 성격으로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열렬한 공산주의자 같지 않았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했고, 줄곧 해외에 거주해 6.25전쟁을 몸소 겪지 않았다. 이 때문인지 북의 남침을 믿지 않았다. 1960년대 초 잠시 한국에서 대학과 언론사에 근무하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후에 LA에서 개인자금 25만 달러로 ‘선우평화재단’을 만들어, 주로 친북단체후원을 돕던 미주 원로교포였다.

평양(신미리)애국열사릉에는 약 1천명에 가까운 묘소가 있다. 지금은 아마 1천명 묘가 넘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 4명(캐나다1명, 미국3명)이 북미주 교포들 묘소이다. 그 묘소 중 한명이 선우학원 박사다. 캐나다 최홍희 태권도총재나 미 LA 홍동근 목사 (피아니스트 백건우 친누나인 백정자 남편)은 2000년 지나 평양병원에서 사망 후 그곳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선우학원박사 묘비에는 ‘선우학원선생 재미동포 전국련합회 고문’이라고 적혀 있다. 선우박사 경우 미국에서 사망했으나, 구태여 유골을 평양으로 옮겨 애국열사릉에 묻혀 좀 의아했다. 평소 그는 “내 조국 미국을 사랑한다”며 “미국은 자유와 평등이 살아 숨 쉬는 민주국가”라고 강조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또 “내가 북한이 좋으면 그곳에 가서 살았지, 왜 미국에서 살겠나” 했다고 당시 미 한국일보 인터뷰에도 밝혀져 있다.

하지만 미주 다른 한인주간지와의 내용은 달랐다. 김일성세습제 논란이 외부세계에 대두하자 “그것은 부자권력세습이 아니다. 북한민중들이 아들 김정일 비서를 진심으로 원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북한은 독재정치제가 아니다. 다만 집단주의가 성공적으로 실현된 사회”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는 사회구조”라고 강조했다. 이 구절은 고 백정자(홍동근 목사부인/백건우 피아니스트 친누나) 씨가 발간한 저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제목과 꼭같다. 미술가인 백씨는 ‘북한의 4월 봄 축전 재미예술단장’을 10년 이상 맡아 왔으나, 71세 일기로 LA에서 타계했다.

선우학원 애국열사릉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힌 나머지 2명 미주교포도 간략히 소개한다. 홍동근 목사와 손원태 (의사)박사다. 홍 목사는 1960년대 한국영락교회 부목사로, 나중 LA로 이주해 통일신학연구와 선한 사마리아교회 담임목사로 조국민주화운동을 했다. 한때 김일성대학에서 초청교수로 기독교개요를 강의했고, 북한의 개방을 역설했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언젠가 그를 평양 봉수교회에서 만났다. 그는 예배순서에 축도(기도)를 맡았다. 홍 목사는 2001년 방북 중에 뇌출혈로 인해 75세 일기로 평양에서 사망했다.

현재 토론토 큰빛 장로교회 창립원로목사로서, 한양대학 음대교수였던 박재훈박사 (만99세/한국 최초동요 및 찬송가작곡가)는 홍 목사를 잘 기억했다. “처음에 나는 먼저 LA로 이주했으나, 교회의 정치성향이 싫어 토론토로 재이주 했소”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고향이 북강원도로 역시 한국 영락교회(담임목사 한경직) 멤버로 초대 성가지도자였다.

손원태 평양 애국열사릉

손원태(1914-2004) 박사는 소년시절 중국에서 김일성 주석과 의형제처럼 가까웠다고 한다. 손박사는 김일성보다 두 살 아래였다. 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대를 나와 미 중서부 오마하시에서 병리학의사로 오랜 기간 살았다. 손원태 집안은 김일성 관련해 세인에게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 내용을 줄인다. 주요 핵심은 김일성이 손원태 부친인 손정도 목사 (나중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를 늘 은인처럼 생각했다는 점이다. 손목사가 길림 땅에서 김 주석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특히 손목사 차남인 손원태와 친했다. 이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밝혀진 내용이다. “나는 한 번도 손정도목사와 그의 유가족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한 대목 등이 북한 다른 책자(노동당출판사)에도 적혀져 있다.

다만 손 목사 장남 손원일(1909-1980) 해군제독은 대한민국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손원일 총장은 6.25전쟁 휴전당시 5대국방부장관으로 국립묘지(현재 현충원)를 세웠고, 초대 서독대사를 역임했다. 동생 손원태박사와는 처음부터 각자 인생길이 달랐다.

동생 손원태 박사부부는 1991년 5월 비로소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감격적인 해후를 한다. 94년 김일성주석 사망 후에는 김정일위원장이 손 박사를 장례식에 초청해 재방북 했다. 그 후 10년이 지나 손박사 역시 미국에서 세상을 하직하자, 북한은 애국열사릉에 손 박사 묘소를 세웠다. 묘비에는 ‘손원태 선생 애국지사’라고 표기해 놓았다. 김 주석과 의형제 사이이니 ‘애국지사’ 칭호를 준 것 같았다.

한 가족, 한 핏줄에서 형제 중 장남 손원일 장관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친동생 손원태 박사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것이다. 우리 민족 현대사의 갈라진 특이한 자화상이요, 슬픈 단면이다.

평양 조선영화사 가건물(국일관) 북한안내원과 백정자 등 미주교포

내 개인얘기를 잠깐 전한다. 그동안 나는 80년대 말부터 여러 차례 방북취재로 인해, 한국친척들로부터 오해를 많이 받았다. 한때 집안에서 ‘접근불허인물’ 대상이었다. 같은 또래 사촌들이 토론토방문 후 전해 줘 알게 된 사실이다. 나는 캐나다 이민 전에는 기자가 아닌, 평범한 국영기업체 직원이었다. 토론토 이주 후 북한취재로 평양을 드나들어 생긴 오해였다. 한국에선 내가 기자직업을 가진 줄도 몰랐고, 30이 넘어 갑자기 교포기자라고 하니 인정도 안했다.

그때 집안에서 유일하게 나를 용기를 준 친척이 친 고모부인 최치환 당시 5선 의원(남해)이었다. 이때는 방북시기 이전이었다. 고모부는 토론토 방문 중 일부러 내 집까지 오셔서 “너는 지금 힘들겠지만 네 능력을 내가 안다. 끝까지 잘 해보라”고 격려하셨다. 그런데 2년이 안 돼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고모부는 1975년 내 캐나다 이민 당시 김포공항에서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길까 염려해 사람까지 보내주셨다. 그때 이민자 출국소지금액 한도액이 미화 1백 달러뿐이었는데, 내 소지한 돈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해외 이민 가는 사람에게 허용금액이 1백 달러밖에 안 된다니 어쩌라는 말인가. 처음부터 아파트 세도 못 내고 길바닥에서부터 시작하란 말인가. 당시 대한민국이 외화가 부족하던 시절이긴 했지만 사실 이민자에게 너무한 조치였다. 공항에서 이민 짐을 샅샅이 뒤져, 돈이 1백 달러 이상 발견되면 무조건 압수이니 조마조마했다.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신경 써 비서인지 사람까지 보내준 고모부에 고마움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고모부 장남 최양일은 ‘차병원’ 국제고문변호사로 서울과 LA, 밴쿠버를 오가며 활동한다. 고모부사위 김무성(3째 최양옥남편)은 정치인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만나고 싶지 않은 정치인이다. 송효숙 친고모는 1940년대 후반 첫 미국유학을 다녀온 92세 나이로, 아직 정정하시다. 고모는 현재 한국에 생존해 계신 유일한 집안어른인데도, 수십 년간 아직 인사 한번 못 드렸다. 그렇게 나는 친척어른들에 무심하고, 불효자다.

내 방북 건 관련해선 집안오해가 곧 풀렸으나, 방북이후 오해받는 다른 선량한 해외교포들을 가끔 보았다. 단순 이산가족으로 방북한 해외교포를 한국친척이 기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었다. 반면 해외엔 열렬한 친북인물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늘 범민족 통일사업과 민주화운동 등을 내세운다. 그런 사람들만이 전부 민족적인 애국자이고, 민주인사인가. 세상이 많이 좋아지고 변했다지만, 한쪽에만 쏠린 극단적이고 독선적인 주장은 무엇이고 쉽게 동의하고 싶지 않다.

북한 식목현장 2021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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