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융건릉 탐방기-1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융건릉 탐방기-1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4.12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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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齋室)
재실(齋室)

융릉은 사도세자 내외가 합장된 능이고 건릉은 정조 내외가 합장된 능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건릉이 왼쪽에 융릉이 있다. 정조의 효심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탐방이다. 1970년 5월26일에 사적 제206호로 지정됐다.

입구에 들어서면 재실이 나타난다. 제사를 준비하는 곳이다. 단청을 하지 않아 단아하고 고택답다. 마당에는 개비자나무가 있는데 천연기념물 504호로 보호되고 있다. 재실을 나서면 왼쪽으로는 정조 내외 합장묘인 건릉, 오른쪽으로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내외의 합장묘인 융릉이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생전에 아버지 곁에 묻히고자 했던 정조의 뜻에 따라 현륭원(현재의 융릉) 근처 동쪽에 건릉(健陵)을 마련했다. 그러나 1821년 정조비 효의왕후가 승하하여 건릉에 합장하려고 할 때 건릉의 능자리가 길지가 아니므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 결과 정조가 생전 능자리로 염두에 두었던 여러 곳 가운데 수원 향교 옛터에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하여 모시게 된 것이 현재의 건릉이다.

정조가 처음 묻혔던 곳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1년과 2012년 이곳에서 왕릉 규모의 봉분 구역과 담장 시설, 그리고 왕릉 부장품에 적합한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이 정조가 처음 묻힌 곳으로 알려졌다.

융릉으로 가는 숲속길
융릉으로 가는 숲속길

사도세자 이야기

권력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금을 통해 권력을 나누어 성공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세자 이야기가 이를 증명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사망하는 사건의 발단도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하면서 시작된다.

장조의 황제(재세 : 1735년 음력 1월 21일 ~ 1762년 음력 윤오월 21일)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1735년(영조 11)에 태어나 1736년(영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3세가 됐을 때 이미 ‘효경’을 외울 정도였으며, 수시로 글을 쓰고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다양한 방면에서 왕세자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춰 부왕인 영조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1749년(영조 25)에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그를 경계하는 노론 벽파 대신들이 왕세자를 모함하여 영조와 왕세자 간의 갈등이 비롯됐다. 특히 1762년(영조 38)에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던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고하는 상서를 올리자 크게 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왕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왕세자가 명을 따르지 않자 영조는 왕세자를 폐서인 한 후 뒤주에 가두었다.

’영조실록’ 1762년(영조 38) 5월 13일의 기사에는 아버지인 영조가 왕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나경언이 고변한 후로부터 임금은 왕세자를 폐하기로 결심했다. 임금은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에게 휘령전(정성왕후의 혼전)에 예를 행하도록 했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를 마치자, 궁성문을 굳게 막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 후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왕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세손(정조)이 들어와 관과 포를 벗고 왕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했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전교를 내려 왕세자의 자결을 재촉하니, 왕세자가 자결하고자 했는데 여러 신하가 말렸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융릉 전경
홍살문에서 바라본 융릉 전경

임금은 이어서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군병을 시켜 신하들을 내쫓게 했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한림 임덕제 마저 강제로 자리를 떠나게 됐다. 왕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 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전문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왕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드디어 왕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했는데, 세손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왕세자빈, 세손 및 여러 왕손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했는데, 이때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결국 뒤주에 가둔지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1899년(광무 3)에는 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장종이라 했다가 곧바로 황제로 추존되어 장조의 황제라 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왕권을 물려받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모략과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선 구중궁궐의 암투를 바로 보여준다.

이를 끝까지 지켜본 사도세자의 부인 헌경의 황후 홍씨(재세 : 1735년 음력 6월 18일 ~ 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본관이 풍산인 영풍부원군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735년(영조 11)에 반송방 외가 사저에서 태어났다. 1744년(영조 20)에 왕세자빈에 책봉됐고, 1762년(영조 38)에 장조가 세상을 떠나자 혜빈에 봉해졌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호칭을 높여 혜경궁(惠慶宮)이라 했다.

헌경의 황후의 아버지와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폐세자를 주장하는 노론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숙부 홍인한은 심지어 영조가 세상을 떠나기 넉 달 전인 1775년(영조 51) 11월에 이른바 ‘삼불필지설’을 내세워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의 대리청정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혜경궁 홍씨는 왕세자의 참변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후 1795년(정조 19) 친정 조카 홍수영의 소청에 의해 장조의 참변을 중심으로 한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남겼다. 사료적 가치가 풍부한 ‘한중록’은 ‘인현왕후전’과 함께 궁중문학의 쌍벽을 이룬다.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을 하다가 1815년(순조 15)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융릉에서 건릉으로 넘어가는 숲속길의 실개천
융릉에서 건릉으로 넘어가는 숲속길의 실개천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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