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여주 영릉(英陵) 이조왕릉 탐방기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여주 영릉(英陵) 이조왕릉 탐방기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4.26 09: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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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英陵) 정자각에서 바라본 영릉 전경.
여주 영릉(英陵) 정자각에서 바라본 영릉 전경.

여주 영릉은 조선 제4대 세종(世宗·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의 합장릉으로서 하나의 봉분 아래 석실 2개를 붙여 왕과 왕비를 안치한 조선 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1446년 소헌왕후가 돌아가시면서 헌릉(獻陵·태종의 능)의 서쪽 산줄기에 영릉을 조성했다가 1450년 세종대왕이 돌아가시면서 소헌왕후와 합장했다. 세조 이후 영릉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 등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년)에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10으로 천장했다.

세종과 소헌왕후

세종은 제3대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18년 6월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된 뒤 같은 해 8월11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소헌왕후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로 1408년(태종 8년)에 충녕대군(세종)과 가례를 올렸다. 세종과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어 조선 왕비 가운데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비로 손꼽히며 궁궐 안주인의 소임을 훌륭히 수행하여 아홉 후궁의 질투가 없었다고 전한다. 세종 재위 기간 32년 동안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설치, 6진 개척, 쓰시마섬(대마도·大马岛) 정벌, 물시계·측우기·활자 제작, 음악 정비 등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전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영릉을 탐방하면서 세종대왕의 혁혁한 업적들은 어떻게 성취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은 바로 세종대왕 리더십에서 출발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종대왕 리더십

그렇다면 세종대왕의 리더십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을까? 세종대왕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정신은 내가 정치를 잘못하면 바로 하늘이 나한테 벌을 내린다. 이게 외천(畏天) 정신이다. 즉 하늘을 무서워하는 정신을 말한다. 따라서 조그마한 무슨 일이 생겨도 세종대왕은 돌이켜 앉아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신하들한테 묻고, 백성들한테 묻고, 친척들한테 묻고,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물어서 정치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업적을 만들어 냈다. 대왕이 혼자서 탁월해서가 아니라 주변에 훌륭한 전문가들이 많아 뒷받침을 잘해줘서 이룩한 것이다. 왕이라고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다. 각계 전문가들을 잘 이용해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세종은 신하들과 토론을 즐겼고 신하들을 믿고 힘을 실어 주었다. 단점은 덮고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신분에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골고루 등용했다. 그리고 신하에게 일만 맡겨두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고, 얼마나 더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점검했다고 한다. 세종실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여주 영릉 경내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여주 영릉 경내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어느 시대인들 사람이 없으랴 했거니와, 지금도 역시 반드시 있을 것이로되, 다만 몰라서 그를 못 쓰는 것일 뿐이다." 그만큼 세종대왕은 훌륭한 인재를 뽑아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최상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고 늘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성군이었다.

세종 시대에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유능한 인재들의 면면들을 보면 정치에는 황희와 허조, 국방 분야는 최윤덕과 김종서, 과학기술 분야는 정초와 장영실, 교육·문화·역사 분야는 정인지와 박연 등 상당히 많은 재상, 인재가 있었다는 점이 지금 시대는 참 부러운 그런 리더십이었고 유능한 인재를 곳곳에 등용한 세종대왕의 혜안을 분야별로 살펴봄으로써 대왕의 리더십을 진정 이해할 수 있고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황희정승 경제는 허조 이조판서

세종은 정치는 황희 정승을 통해 경제는 허조 이조판서를 잘 활용했다. 세종 31년 6개월 치세에 황희의 역할은 조정의 화합과 인재를 정확히 뽑아서 임금에게 천거하는 그러면서 세종과 반대하는 신하들 간의 의견조율과 설득하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아울러 훌륭한 인재들을 조정으로 등용하는 역할의 대표적인 게 허조 이조판서, 최윤덕 명장, 장영실 과학자 등을 직접 천거한 사례이다.

황희 정승은 24년 간 정승, 19년간 영의정 명재상으로서 90세까지 살았다. 이 태조 때 쫓겨났다가 이방원 눈에 띄어 태종이 세종에게 천거했다. 직언을 잘하고 판단력이 뛰어나며 관용적인 것이 그의 특징이다. 굉장히 성격이 온화하고 아주 청렴하며 강직한 사람이라고 야사는 전하지만 실제로는 결점이 있는 사람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 사례로 서달폭행사건, 남원부사 뇌물사건, 박용말 뇌물사건 등 황금 대사헌이라는 별명답게 뇌물을 많이 받기로 소문이 나 있던 인물이었다. 여기서 세종대왕의 용병술을 볼 수 있다. 사람의 씀씀이를 그 사람의 장점부터 본다. 흠결에 대해서는 형벌을 주더라도 짧게 주고 그로서 충분히 죄값을 받게하고 대신 빨리 등용시켜서 활용한다. 김종서라든지 최윤덕이나 이천이나 모든 사람에게 흠결이 있었음에도 그 장점만 취해 활용했던 것을 보면 세종대왕의 용병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세종대왕 표준영정, 1976년 김기창 화백이 제작했다.
세종대왕 표준영정, 1976년 김기창 화백이 제작했다.

허조(許稠·1369~1439)는 고려 시대 인물로 고려 멸망과 더불어 숨어 지내고 있다가 등용된 사람이다. 청빈한 사람으로 평생 어머니가 지어준 옷 두 벌 가지고 평상을 살았을 정도였다고 전해지지만 좀 과장된 듯싶다.

응방사건의 일화가 있다. 이방원이 매를 좋아하는데 매를 다루는 사람을 응방인이라 했다. 그런데 응방인들은 태종 이방원의 위세를 믿고 민폐를 저지르니 허조가 대사헌 직책으로 응방인들을 규제하여 태종이 좌천시켜 버린다. 이럴 정도로 강단 있고 청빈한 조선의 선비였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이 선위를 하면서 세종대왕에게 '이 사람은 내 주춧돌'이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이방원도 결국 그런 점을 높이 사서 세종에게도 중용할 것을 추천했다고 볼 수 있다.

세종 시기에는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의 중직을 거쳐 좌의정까지 직위가 올랐다. 요즈음 내무부 장관과 기획재정부 장관 격인 이조판서였을 때는 종묘의 춘향대제에 찬작관을 맡았는데 세종에게 잔을 주고 물러나다 계단에서 넘어지는 일이 생겼다. 국가의 큰 제사를 망쳤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종은 "이조판서가 상하지나 않았느냐. "고 묻고 계단을 넓히도록 했다. 세종이 허조를 아낀 정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허조가 한 일로 부민고소금지법이 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고발할 수 없다는 법이다. 그 당시 사회상이 사회를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무고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법으로 무고사건은 많이 줄어 들었지만 반대로 공무원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부패가 심해져 이 법을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지만 허조는 계속 고수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억울한 일이 있는 경우에는 상사를 고발할 수 있다는 식으로 부민고소금지법을 보완했다. 또한 이 시대에 허조는 수령육기법 즉 관리들은 서울에 3년 지방에 6년 순환근무 토록하는 법도 만들었다.

또 이런 일화도 있다. 허조는 깐깐한 성격이라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하는 파저강 정벌 때도 허조는 끝까지 반대했을 정도였고, 세종이 지나치게 앞서나가는 정책에 황희 이상으로 브레이크를 걸며 반대했던 신했다. 그럼에도 세종은 그런 허조를 불쾌하게 여기거나 멀리하지 않고 되려 더 중용했다.

세종대왕의 국방 분야 치적

세종 시대에 북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 넘어에서 여진족들이 계속 남침을 해오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대마도에 있는 왜구들이 침입해 오고 있었다. 이런 국가 안보 상황에서 세종1년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 대마도 정벌을 직접 진두지휘한다. 1차 정벌에서 227척 17285명의 해군으로 적선 129척을 탈취, 적 114명 살해,131명 포로의 전과를 올렸다. 반면 아군 희생자도 180명 전사자를 냈지만 대마도가 조선에 대해 다시는 왜구 출몰을 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대마도와 조선 정부가 공식적인 통교를 하게 된다.

세종대왕은 아버지 태종이 대마도 정벌을 성공시키니까 북쪽의 여진 침입에 대해 뭔가 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작동했을까 세종은 북벌을 결심한다. 그런데 여진족은 압록강 주변의 올량합, 두만강 쪽의 알타리, 흑룡강 지역의 올적합 3 여진족이 서로 다투다가 단합하여 세력이 커지면서 1410년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쪽에서 끊임없이 침입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황희와 허조는 화친책을 주장했으나 세종15년 1433년에 세종과 최윤덕이 직접 북벌을 감행 1차 파저강전투로 여진족 토벌에 나선다. 1차 파저강전투에서 15000명을 파병하여 적 248명 생포, 183명 사살, 아군 전사 4명, 부상 5명의 전적으로 대승을 거둔다.

세종은 1433년부터 10여 년 동안 압록강 변의 4진, 두만강 변의 6군과 6진을 구축했다. 1433년부터 1440년에 걸쳐 7년 동안 압록강부터 두만강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세종대왕이다. 여진족 올량합의 부하 중에 나중에 청나라 누루하치가 나온다. 세종대왕은 압록강 쪽은 이천을, 함경도 쪽은 김종서를 함경도 도절제사로 여진족 침입에 대비했다. 세종·세조가 없었으면 압록강과 두만강은 우리 국경에서 제외됐을 가능성이 컸다. 현재의 우리나라 영토(북한 포함)는 세종대왕이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혼천의( 渾天儀·천문관측)
혼천의( 渾天儀·천문관측)

세종 시대의 과학 발전

세종은 백성들을 잘 살게하고 백성들을 힘들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읽어야 된다는 확고한 철학을 가졌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여기서 세종 시대에 발명한 모든 과학기기들은 세종이 아이디어를 내고 정초와 이천이 설계를 해서 이 설계를 갖고 어떻게 하여 기계를 만들어 내는가는 장인의 입장에서 만든 사람은 장영실이었다.

1424년 세종 즉위 6년 만에 물시계(누기)는 설계는 세종과 정초가 제작은 장영실이 만들었다. 1429년 정초는 농사 짓는 기술에 관련된 최초의 백과사전인 농사직설을 만들었다. 천문을 관측하는 혼천의는 정초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또한 정초는 달력을 만들고 천문에 대한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한다. 이렇듯 정초는 르네상스 시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비교되는 걸출한 인물이었다.

정초는 과학 분야에 능력을 발휘했다면 이천이라는 인물은 생활차원에서 생활과학을 발전시켰다. 호조참판 이천은 그 당시 저울을 속이는 사람이 많았는데 1500개를 만들어 보급했다. 그리고 청평댐 지역의 강바닥에 바위가 많아 배가 운항을 못했는데 강바닥 바위를 깨서 한강 입구에서 충주까지 배가 통행되도록 했다. 또한 이천은 서울에 있는 성, 압록강 주변의 성, 성로를 구축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천은 특별히 활자인 '갑인자'를 발명 한국 출판 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렇듯 이천의 역할이 지대했음은 고려 권신 출신으로 구시대 가문이라 배척당하는 신분으로 이천에 대한 무고가 끊임없이 올라오는데 세종이 끝까지 이천을 지켜주었기 때문이었다.

세종대왕이 아이디어를 내고 정초와 이천이 설계를 하고 장영실이 만들어 낸 과학의 발전을 눈부시게 한 이면에는 장영실을 전국에 보내서 동광, 철광석을 개발하는 광산개발 뿐만 아니라 광석을 제련하는데도 장영실의 기여가 컸다. 이로써 활자를 만드는데도 장영실이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1442년 세종이 38선 이북에 있는 이천의 궁으로 1년에 한 번씩 하는 군사훈련을 갔는데 그 궁 지붕의 기왓장이 폭우로 인해 떨어져 세종 임금의 가마가 부서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 수레가마 제작의 총책임자가 장영실이었는데 곤장 80대와 공무원 직책을 회수당한 이후 기록이 안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귀향가서 자연스럽게 수를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대왕의 왕자 시절 독서도[사진제공=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대왕의 왕자 시절 독서도[사진제공=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의 교육·문화·역사 분야 발전

태종에게 변계량이라는 재상이 있었다면 세종에겐 정인지가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의 극치이다. 그 극치의 중심에는 엄청난 천재였던 정인지가 있었다. 세종(1397년생)보다 1살 위인 정인지(1396년생)는 태종 때 문과에서 일등급제를 한다. 세종이 즉위하며 집현전 응교직을 명령하여 세종의 오른팔 역할을 한다. 집현전은 요즈음 싱크탱크와 같은 것이다. 당시 최만리를 비롯한 지배계층에서는 왜 자신들이 쓰고 있는 한자(漢字) 갖고 아무런 불편이 없는데 굳이 새로운 글자를 만들려고 하느냐며 한글 창제에 대한 반대가 극심했다. 집현전의 최고 높은 사람은 최만리, 정인지는 부작이었다. 최만리는 60이 넘은 고령, 결국 최만리를 낙향시키고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어 낸다. 훈민정음에 관련된 이야기는 실록에 별로 나와 있지 않는데 왜 나와 있지 않느냐 하면 거의 모든 사대부들이 반대했으니까 그래서 문종 이향, 세조,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 그때 신진사료들 중심으로 비밀리에 작업을 해 훈민정음이 탄생하게 된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는 첫째는 법이 한자(漢字)로 돼 있는데 무엇이 죄가 되는지 몰라서 억울하게 죽는 사람들, 둘째는 의학책이 모두 한자(漢字)로 돼 있는데 그 의학책에 대한 정보를 한문 때문에 얻지 못해서 억울하게 병들어 죽는 사람들, 셋째는 예절책이 전부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어 이게 뭐가 예절이고 뭐가 야만인인 줄 알지 못해서 억울하게 야만인이 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너무 불쌍하게 생각해 훈민정음을 만들려고 결심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일거에 구제하는 방법은 한문으로 되어 있는 어려운 책들을 전부 한글로 만들어 주는 일밖에 없겠다고 생각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을 만든 후 처음으로 한 일이 첫째 법책을 한글로 번역했고 둘째 삼강행실도 책을 한글로 번역했고 셋째 의학책을 한글로 번역했다.

훈민정음에 '나랏 말싸미 듕귁에 달아'가 나오는데 어린 백성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표현을 못 한다는 거였다. 세종대왕의 업적 중에 한글 창제 이상 큰 업적은 없다.

세종대왕은 병법에도 아주 탁월했고 역사에도 조예가 깊고 좋아했다. 정인지를 시켜 '자치통감' 책을 축약해서 책을 만들게 하고 거기에 나오는 통치의 법칙, 통치방법을 요약해 '치평요람' 책을 편찬케 한다. 아시아에서 '정치 강독본'을 만든 것이다. 정인지를 시켜 '고려사'를 편찬케 했다. 정인지의 업적은 크게 '치평요람', '자치통감 강목'. '훈민정음 창제'를 들 수 있다

세종은 박연을 시켜 아악을 완성시켰다. K-Pop의 원조로서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 조선의 박연을 꼽을 수 있다. 박연은 태종 때 진사로 대과에 합격한 문인이었는데 악기를 잘 다루었다. 대금을 잘 불렀고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세종은 박연을 통해서 작곡시키고, 악기를 만들고, 편곡을 해서 궁중악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했다. 또한 박연은 민간에 있는 음악들을 국민들이 편하게 공연할 수 있도록 편곡했기 때문에 적어도 아악이 됐든 향악이 됐든 조선 초기의 음악에 대한 확실한 기본을 세종의 지시하에 만들어 내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영릉(英陵)에서 녕릉(寧陵)으로 넘어가는 왕의 숲길.
영릉(英陵)에서 녕릉(寧陵)으로 넘어가는 왕의 숲길.

세종대왕의 말년

세종대왕이 53세에 요절하는데 황희 정승이 90세까지 산 것과 비교하면 일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당뇨, 피부병 등 너무 많은 병을 달고 지냈다. 세종이 몸이 안 좋으니까 돌아가기 6~7년 전부터 아들 문종에게 왕권을 넘겨준다. 그러면서 김종서, 황보인 등에게 문종을 잘 보살펴 주라고 부탁한다. 또한 문종을 보필하는데 따로 성삼문, 이개, 박팽년, 하위지 등 계유정란 사육신에게도 특별히 당부를 해둔다.

세종대왕은 병법, 역사, 과학기술, 음악에까지 조예가 깊었으니 못하는 게 없는 전대미문의 군주로서 그 밑에서 일하는 신하들은 상당히 피곤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무슨 일이든지 이야기하면 자신들보다 더 위에서 알고 지시를 하니까 상당히 일하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하를 믿고 맡겨서 일 시키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혼자서 다 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아는 군주였다. 본인이 아이디어를 내고 신하들이 그것을 이끌어내고, 잘못 가면 잘못 가는 것을 고쳐주고, 본인이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을 끌고 간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자기 밑에 그 많은 명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리드할 수 있는 그야말로 오케스트라 관현악단의 지휘자처럼 모든 파트를 다 꿰뚫고 계셨던 그런 역량을 보인 군주였던 것이다.

세종대왕이 재위 32년 하고 53세에 돌아가셨지만, 20년만 더 살았으면 지금쯤 만주가 우리 땅이 되고 대마도도 우리 땅이 되지 않았을까 53세에 요절한 것이 안타깝고 아쉽다.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이 3만불 시대까지 와보니 경제만 잘 하고 반도체나 자동차만 잘 만들어 선진국이 되는 게 아니더라고 국민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세종대왕 32년 통치를 잘 살펴보면 지금의 우리 정치를 한·두 단계 심지어 세 단계까지 업그레이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의 정치 지도자들은 세종시대의 태평성대는 바른 인재등용에 있었음을 알고 아울러 세종대왕의 바른 정치는 외천본민(畏天本民) 즉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근본으로 한다는 정신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깨달았으면 한다. 니편내편 편가르기가 아닌 모두를 백성으로 보고, 내로남불이 아닌 공정과 정의가 살아 움직이는 세상으로 바꾸어 줄 지도자가 새롭게 나타나 주기를 희망한다. 이에 따라 국민도 다시 깨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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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남 2021-11-03 22:52:52
알려주셔서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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