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0] 평안북도 정주에 남아 있는 문선명 생가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0] 평안북도 정주에 남아 있는 문선명 생가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4.27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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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평북 정주 문선명 통일교주 성지

북한방문을 하면 가장 먼저 안내받는 곳이 김일성 생가 고향 집이다. 만경대에서 집안 4대가 살았다는 ‘만경대고향집’을 먼저 견학한 후 방북 일정이 시작된다. 개인이든, 단체든 마찬가지다. 북한 인민들의 정신적 고향이며, 혁명의 성지로 불리는 만경대 김일성 초가집은 단장돼 사적지로 된 지 오래다.

김일성 생가는 지난 69년부터 ‘혁명의 요람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안내 강사는 김일성 집안 역사내역을 실타래 풀듯이 상세히 설명해 준다. 생가견학 후 방명록에는 감상 글을 남기는 것은 자유롭다. 평양을 자주 드나드는 해외방문객 경우 재차 김일성 생가(고향 집)를 찾지 않아도 된다.

북녘땅에 자신의 성지 터를 만든 또 한 사람이 있다. 한국적인 고 문 선명(1920-2012) 통일교 교주다. 문선명은 지난 1991년 방북해 김일성을 만나, 그의 고향 평북 정주 마을(첨부 사진)에 통일교성지로 꾸미는 데 합의했다. 그는 90년대 초반 북한에 자동차 조립공장(평화자동차/이름 휘파람)을 세우는 등 대북투자에 힘쓴 기업가이기도 했다. 정작 성역화 작업이 승인이 난 것은 김일성사망 직전인 94년 6월로, 명칭은 ‘정주 평화공원’ 건설이었다. 문선명은 이 성지건설사업에 억1억 달러 정도 예산을 세웠고, 그의 생가 중심으로 호텔과 성전, 기념관 등의 청사진을 만들었다.

통일교 고위실력자 박보희도 서너 번 방북해 구체적인 성지화 계획을 논의했다. 북한당국과 통일교 측은 ‘평북 정주에 평화공원(통일교 성지)이 조성되면, 세계각처 통일교 신자 수백만 명이 북한을 찾게 될 것이니, 실리적인 수익성 추구에 초점을 둔 것 같다. 통일교 측은 김일성과 김정일 사망 시에도 조문단을 보냈다. 그러나 문선명 사후 더 이상 진전돼 밝혀진 소식이 없다. 한때 북 당국은 “일부 무너진 문선명 생가를 보수하고, 고향마을 단장작업이 상당히 진행됐다”고 전했으나, 문 교주 사망 이후 모든 프로젝트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문선명이 사후 그의 자녀 13명(7남 6녀)의 통일교기업 배분 작업 등으로 가족 내 파열음이 심한 것으로 들렸다. 문선명 없는 통일교 위상은 상당히 위축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최홍희 총재. 강능수 부총리, 송광호
최홍희 총재. 강능수 부총리, 송광호

북한 내 성지 관련해서는 최홍희 태권도총재 경우도 비슷한 환경으로 보였다. 최 총재 살아생전 고향근처(함북 나진선봉)에 진작 성지를 설정해 놓고, 청사진대로 성역화를 추진하다 최홍희 타계 후 완전 무산됐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성지-성역화 문제는 국가작업이 최종 마무리될 때까지 당사자가 생존해 있지 않으면 ‘도로 아미타불’이 되기 쉬운 것 같다. 그래서 어쨌든 건강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태권도 관련해선 최홍희 총재 사후 바통을 이어받은 제2대 북한 장웅 (1938년생/농구선수 출신) 국제태권도연맹 총재 겸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말이 생각난다. 그는 내게 ‘맥주는 절대 마시지 말라’고 강조하던 맥주 비애호가였다. 현재 그는 80세 은퇴 이후 IOC명예위원으로 등록돼 빈(오스트리아 수도)에서 평양으로 귀국한 지 오래됐다. 오스트리아 병원에서 심장수술을 2번 했다.

장웅 은퇴 이후 공백인 북한IOC 위원자리는 아직 후임자를 구하지 못했다고 들린다. 10여 년 전 장웅 IOC 위원과 오스트리아 국제태권도연맹(ITF) 본부에서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차기 북한 IOC 위원이 누가 될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좋은 마땅한 사람이 한 명 있어요.”라고 금세 대답했다. “그래요? 리용선 태권도 사무총장(당시) 말인가요.?” “아니요. 아직 말 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요.”

그 후 리용선은 제3대 국제태권도연맹 총재를 이어받았지만, IOC 위원과는 거리가 있다. 리 총재는 장웅 전 총재와 여러모로 차이점이 컸다. 그는 도량이나 품격이 장웅 IOC 위원 같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주는 느낌 역시 확연히 다르다는 평이다. 나는 리용선을 오랜 세월 접해 잘 알고 있다. 태권도 주변 지인들도 그에 대해선 부정적인 견해다. 한 태권도계 관련 전문 체육인은 “리용선은 국제태권도연맹 총재도 힘에 겨운 사람”이라며 “외국 IOC 위원들에게도 비슷한 판단인 것으로 듣고 있다”고 평가했다. 현재 북한은 자체 내에 새 IOC 위원을 뽑는 인물난으로 계속해 고심 중이라고 들린다.

장웅IOC 위원 과 오스트리아 인터뷰
장웅IOC 위원 과 오스트리아 인터뷰

한때 북한 내부에서는 김일국 체육상(장관) 겸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IOC 위원 가능성에 비중을 두었다. 김 체육상은 북한 스포츠계의 얼굴로, 강력한 후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체육상에서 축출됐다는 소문과 함께 어디에서 강제노역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 그 때문인지 리용선 국제태권도연맹 총재가 어부지리로 새삼 후임자로 거론되는 모양이다.

태권도 얘기를 하면 태권도 창시자인 최홍희 총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최 총재와 함께 토론토에 30여 년간 거주했고, 그의 회고록(‘태권도와 나’ 한글/영문판) 3권과 태권도 백과사전전집 정리를 맡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수행원 입장이 됐다. 또 국제태권도의 해외세미나는 1년 내내 어디선가 열려 있어, 최 총재와 여행하는 기회가 종종 있었다. 북한을 비롯해 다른 지역에도 네댓 차례 그를 수행했다. 최 총재가 작고하기 두 달 전에는 킹스턴 (자메이카 수도) 태권도 세미나에 5일간 동행했다. 그는 식사 때마다 거의 음식을 드시지 못했다. 나는 ‘저렇게 소식하시니 늘 건강하시구나.’하고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그때는 곧 돌아가시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최 총재는 오랜 캐나다 망명 생활을 통해 해외에서 한번 암살 시도 경험을 당한 적이 있었다. 오래전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했다. 그 때문인지 90년대 후반 부에노스아이레스 호텔에서는 최 총재와 한방을 사용했다. 특급호텔 특실이라 방이 컸다. 응접실 소파에서 수행했다. 암살 시도사건 이후 최 총재는 호텔에 묵게 되면 신변보안에 극도로 신경을 썼다. 여하튼 예전 암살 시도 건으로 인해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

한번은 평양 고려호텔에서도 같은 방에 있자고 했다. “총재님. 여긴 평양이잖아요. 염려하실 게 없을 텐데요. 저는 혼자 있고 싶습니다.”하고 처음 거부표시를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내 호텔 요금 절약도움을 위해 그랬던 것 같다. 사실 언젠가 내 외조모 친척을 만날 때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왕복택시비용 미화 4백 달러를 지원받은 적이 있다. 또 최 총재 옆에서 움직이니 북한 강능수 부총리 등 고위급 인물들과 교류 자리에 참석하는 기회도 있었다.

최홍희 총재 출판 기념회 (토론토 프린스 호텔)/
최홍희 총재 출판 기념회 (토론토 프린스 호텔)

사실 평양에서는 나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매번 방북 신청 때마다 북한 비자가 거부돼 소위 친북인사의 협조를 얻어야 했다. 나는 어느 한 편에게만 치우쳐 있는 기자가 아니다. 한쪽만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옹호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판단해 옳든 그르든 글을 쓴다.

한 예로 한국은 북한대사관 일개 탈북외교관(공사) 출신을 상당한 고위탈북자신분으로 떠받드는 느낌이라 못마땅하다. 한국사 정을 잘 모르는 그가 하루아침에 한국 정치인으로 변신한 게 내 시각으로는 별로라는 얘기다. 특히 그는 평양에서 특별 신분으로 군대도 100% 면제받고 꽃길과 양지에서만 인생을 살아온 관료출신으로 알고 있다.

또 일부 언론들은 내가 UN 난민기구에 등록시킨 한 평범한 탈북자를 무슨 북한 과학원출신 엘리트라는 등 과장된 보도를 일삼는다. 나는 탈북자든 아니든 북한 외교관들을 많이 접해봤다. 앞 편에서 언급했지만, 북한 모스크바대사관의 어느 영사 경우, 평양봉수교회 앞에서 외국방문객 안내원으로 움직이다 나와 마주친 적이 있다. 20년 전 첫 토론토탈북자 역시 북경대사관 경제담당 외교관이었다. 또 1990년대 최홍희 태권도연맹 총재 아래 박시웅(1943년생) 부총재는 북한 오스트리아대사를 역임한 외교관 출신이었다.

최 총재의 태권도국제행사는 언제나 박시웅(1943년생) 국제연맹 부총재가 수행했다. 최 총재는 지난 1999년 9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무도대회 창립대회 때 직접 박시웅을 소개해줬다. 유난히 ‘9’자를 좋아하는 최 총재는 특별히 ‘9’ 숫자가 많은 그날을 택해 국제대회 행사날짜로 잡았다.

만경대 김일성 고향집

당시 얘기를 좀 더 부연하자. 아르헨티나는 내 다른 주요 병원 약속 때문에 최 총재와 같은 날 출발하지 못했다. 그는 “나중 P 사무총장에게 현지 호텔이름과 행사장소를 알고 속히 내려오라”고 전했다. 해당 날짜 이전에 닿자니 목적지까지는 서너 군데 공항을 거쳐야 항공료가 저렴했다. 토론토에서 미국 뉴저지와 마이애미를 거치고, 다시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다.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었다, 또 공항마다 출발시간이 지연돼 최종 도착지에 닿으니 무려 8시간이 늦었다. 오후 2시 도착이 밤 10시가 된 것이다.

문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마중 나온다는 사람이 안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토론토 출발 전 미리 P 사무총장에게 호텔과 행사장소를 알기위해 두 번을 물었다. 그는 “송 기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공항에 꼭 나가서 픽업해 드릴 테니 안심하고 오세요.”하고 이상하게 호텔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미리 장소 알려주는 게 그게 무슨 큰 비밀인가. 그러더니 먼저 아르헨티나로 떠나버렸다. 남미도시에서는 영어도 거의 안 통하니, 한밤중에 도착한 나는 무척 난감했다.

다른 한 경우다. 1990년대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에서였다. 한여름 특파원취재차 수도 두샨베 공항에 내렸는데, 역시 마중 나온다는 고려인이 안 보였다. 이슬람교 국인 그 산악 국가는 두 이슬람교 민족끼리 수년간 내전 중이었다. 공항까지 콩 볶는 듯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UN감시단도 주둔해 있었다. 총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겁이 덜컥 났다. 한 30-40분 기다리다 일단 시내 아무 호텔이나 가려고 택시를 잡았다. 택시에 올라타고 떠나려 할 때다. 반대편에서 한 개인차가 들어와 누가 내리더니 공항 내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약속한 고려인 같았다. 택시에서 잠깐 기다리라 하고 확인했더니 역시 추측이 맞았다. 택시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팁을 주려 했더니 받지 않았다. 고려인은 “시간을 잘못 착각해 늦었다”며 사과했다.

여행을 많이 하다 보니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중국 광주에서, 일본에서, 동남아공항 등지에서 계속 발생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조화인가. 일본 요코하마에선 공항에서 기다리다 전화카드를 사서 연락했더니 “어, 내일인 줄 알았는데, 오늘이었나?”하고 급히 달려와 만난 적이 있다. 중국 연길과 마닐라에선 공항에서 남의 휴대폰을 빌려 가까스로 연락이 됐다. LA에서는 가까운 친구로부터 비슷한 경우를 당했다. 나중 알고 보니 치매 중증 환자였다.

고 최홍희 총재서거 1주년 사회 송광호(토론토)

현지 언어에 익숙지 못한 국제공항일수록 만남에 차질을 빚으면 더욱 당황케 된다. 물론 제대로 만난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어긋나도 마지막 순간 기가 막히게 꼬인 매듭이 풀리곤 했다. 아무튼 늘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니 다행이었다. 밤늦게 도착한 아르헨티나 공항 얘기로 돌아간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맥이 빠진 채 공항 내부를 어슬렁거리는데, 한 동양인 아줌마가 눈에 띄었다. 달려가 물었다. “혹시 이곳에 사는 한국 분이세요?” “네. 그런데요.” “저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왔는데, 마중 나온 사람을 못 만났어요. 비행기가 8시간이나 연착돼 그냥 가버린 것 같아요. 근데 연락처도 모르고, 막막한데 한국 사람을 만나니 반가워서요.” “나는 온다는 사람이 안 와서 못 만났는데….” 나는 막연히 생각나는 옛 고교 동창 이름을 물어봤다. “혹시 이곳 교민 중에 ‘신창국’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신창국은 1963년 서울사대부고 고교시절 가족전체가 남미 첫 파라과이 이민을 간 동기동창 이름이다.

1960년대 남미는 대한민국 최초 이민국가 지역이었다. 당시 남미로 이민 간 사람들 고향이 북한인 경우가 많았다. 1980년대 말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남미 이산가족들 수십 명이 지속적으로 북한방문을 했기 때문이다. 그중 내가 아는 한 남미의 노인교포는 직업이 의사였다. 그는 아예 짐을 싸 들고 옛 가족들을 만난 후, 다시는 북한고향 땅에서 나오지 않았다. 최초의 북한영주귀국 해외교포였다.

1960년대 초반 한국의 남미 농업이민자들은 막상 남미 현장에 가보니 불모지 땅이라, 이민자들 대부분이 다시 아르헨티나 등지로 옮겼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약40년 전 오랜 옛 시절이라 동창 이름조차 기억에 가물거렸다.

김정은 위원장 평양극장에서 흡연 광경(중앙통신보도)

“아. 신창국 집사 말인가요? 우리 중앙교회 교인이에요. 지금 당장 전화할 수 있는데. 통화하실래요?” 하도 기적 같은 순간적 일이라 곧 대답도 못 하고 있는데, 전화를 바꿔줬다. “야. 광호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당장 그 아줌마 차를 타고 우리 집에 와라. 마침 마누라가 미국 친척집에 가 있어 집에는 나밖에 없다. 술 한잔하며 얘기하자.”

이렇게 해서 생각지도 못한 옛 고교동기생 한 명을 남미에서 기적적으로 만났다. 다음날 아침 현지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동창과 함께 행사 현장을 찾아 호텔을 알게 됐다. P 총장은 내 앞에서 미안해서 말을 못 했다. “괜찮소. 덕분에 옛 친구를 만났으니까.” 지난 1989년 말 평양에서 한 친절한 책임지도 안내원 덕분에, 전혀 예상 못 했던 외조모 조카 노인을 만났던 일과 정말 흡사했다.

글을 계속하다 보니 그 와중에 한마디 다른 말을 해야겠다. 가끔 들리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예상 밖 돌출행위 때문이다. 정말 아연했다. 지난해 북한은 금연법을 제정해 주민들에게는 극장과 영화관, 도서관, 체육관 등 공공장소와 상점, 식당 등 편의시설 등지에선 흡연금지 장소로 규정해 놓았다. 그렇게 절대금연을 주민들에게 당부해 놓고, 자신은 금지된 극장 ‘공개석상’에서 거리낌 없이 흡연(첨부 사진)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평양극장에서 설 축하공연 관람 도중 재떨이까지 준비해 놓고, 홀로 여유 있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북한 중앙통신사에서 사진을 찍었고, 한국 일간지에도 그 사진이 보도됐으니 사실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모범이 되어야 할 국가지도자로서 상식을 벗어난 일탈 행위는 내겐 정녕 이해가 쉽지 않다. ‘자신은 초법적인 특별인물’이라는 고정의식이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 전에 언급했지만 별명이 ‘태양왕’인 프랑스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다”라는 17세기 절대군주의식 태양왕 유래가, 21세기 지금에도 북에서 통하는 현실이 놀랍기만 하다. 지난 4월15일은 김일성의 109번째 태양절이었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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