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효종의 북벌(北伐)은 왜 실패했는가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효종의 북벌(北伐)은 왜 실패했는가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5.0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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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寧陵) 이조왕릉 탐방기
정자각에서 바라본 영릉 전경. 다른 왕릉과는 달리 금천교가 홍살문을 지나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자각에서 바라본 영릉 전경. 다른 왕릉과는 달리 금천교가 홍살문을 지나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효종과 인선왕후

효종은 제16대 인조의 둘째 아들로 7세 때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로 피신했으나 아버지 인조가 끝내 삼전도에 나와 청나라에 굴복하자 1637년(인조15)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가 8년간 볼모로 머물렀다. 귀국 후 1645년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세자에 책봉돼 1649년(인조27)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효종은 대동법을 시행해 민중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 주고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등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헤아렸다. 역법(曆法)을 개정하고 ‘인조실록’ ‘국조보감’ ‘농가집성’ 등을 간행해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효종은 무엇보다 북벌정책을 수립하고 군비개편은 물론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병자호란 때 당했던 한을 씻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재위 10년 만에 왕의 나이 41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니, 청나라에 당한 한을 가슴에 묻고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였다. 불운했던 시대의 불행했던 왕이다.

인선왕후는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이다. 병자호란 후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있을 때 현종을 낳았으며 귀국한 뒤 1649년(인조27)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됐다.

효종은 인선왕후 사이에 1남6녀를 두었고 후궁 안빈 이씨와의 사이에 1녀를 두었다.

효종대왕의 북벌정책

효종대왕은 청나라에 당했던 정묘·병자호란의 아픔을 씻고 복수하기 위해 북벌론을 내세웠던 조선의 17대 임금이다.

청나라에 볼모로 있을 때 형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장점을 배우자며 천주교와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데 비해 동생인 봉림대군(효종)은 아버지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는 치욕적인 모습을 지켜보았고 볼모 시절 명·청의 격전지를 따라다니며 전쟁의 아픔을 겪으며 청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다.

1645년 2월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의문사로 죽고 난 20일 만에 효종이 8년 만에 귀국했고 인조 뒤를 이어 조선 17대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그중 하나가 북벌정책이다. 당시 효종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북벌 말고는 없었다. 매일 체력 단련을 했고 기마와 궁술 그리고 무도 연마에 시간을 투자해 북벌계획을 확고히 다짐했다. 효종은 이제까지의 학문을 중시하던 사상을 뛰어넘어 무신을 중심으로 생각했다.

영릉(寧陵)조성 연혁: 영릉(寧陵)은 세종대왕릉(英陵) 왼쪽 언덕에서 500m 쯤 떨어진, 조선 제17대 효종(孝宗·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张氏·1618~1674)가 모셔진 쌍릉이다. 효종대왕이 1659년에 돌아가시자 처음에는 구리시 동구릉 건원릉(태조의 능) 서쪽 산줄기 자리에 능을 조성했으나 영릉을 이곳으로 이장한 것은 현종 14년(1673)이다. 능의 석물에 틈이 생겨 능 안으로 물이 스며들 염려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듬해(1674) 현종 15년에 왕비 인선왕후가 돌아가시자 왕후의 무덤을 같은 언덕의 아래에 조성해 조선 왕릉 중 최초로 동원상하릉 형식이 됐다. 영릉은 왕의 무덤에만 곡장을 둘러 왕후의 무덤과 구별했다. 대부분의 조선왕릉의 금천교가 홍살문 앞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효종대왕 영릉의 금천교는 홍살문을 지나 향어로 중간에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영릉(寧陵)조성 연혁: 영릉(寧陵)은 세종대왕릉(英陵) 왼쪽 언덕에서 500m 쯤 떨어진, 조선 제17대 효종(孝宗·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张氏·1618~1674)가 모셔진 쌍릉이다. 효종대왕이 1659년에 돌아가시자 처음에는 구리시 동구릉 건원릉(태조의 능) 서쪽 산줄기 자리에 능을 조성했으나 영릉을 이곳으로 이장한 것은 현종 14년(1673)이다. 능의 석물에 틈이 생겨 능 안으로 물이 스며들 염려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듬해(1674) 현종 15년에 왕비 인선왕후가 돌아가시자 왕후의 무덤을 같은 언덕의 아래에 조성해 조선 왕릉 중 최초로 동원상하릉 형식이 됐다. 영릉은 왕의 무덤에만 곡장을 둘러 왕후의 무덤과 구별했다. 대부분의 조선왕릉의 금천교가 홍살문 앞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효종대왕 영릉의 금천교는 홍살문을 지나 향어로 중간에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효종의 북벌정책의 중심에는 무신 중 병자호란에 출전해 정방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완장군을 북벌계획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의 대장으로 발탁해 북벌을 준비했다. 당시 효종은 군사들의 기예를 시험한 후 우수한 자를 임용하는 ‘관무재’를 복원시켰다. 그리고 기병 양성을 위해 창덕궁 담장을 열어 기병훈련소로 삼았고 일본으로 향하던 네덜란드 선박이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에 표류해 정착해 살고 있던 네덜란드인 하멜과 조선에 귀화한 벨테브레(조선명 박연)를 훈련도감에 귀속시켜 조총을 만들게 했다.

효종은 사대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비확장에 힘쓰는데 재위 6년 만에 조선군 1만3천여명이 펼치는 열병식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효종의 북벌계획에는 정예병 10만명이 필요한 것으로 준비를 착착 진행하려 했으나 어영군을 1만명에서 2만명으로 증강하고 훈련도감군 1만명으로 이 중 금군을 기병화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정예병 10만명은 그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또 한편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군사력 증강에 대한 견제로 효종의 북벌 준비로 인한 성채 수리와 병사 훈련에 대한 응징을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 사신을 영의정 이경석이 마중하러 신의주까지 마중 나간다. 사신들의 심문 목표는 효종을 잡으려고 온 것이다. 그러나 이경석이 “내가 한 짓이다. 나를 벌하라”고 하며 몸으로 막았다. 이경석은 문책으로 압록강변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된 후 청의 처분을 기다렸다. 1년 후 효종의 구명운동으로 이경석은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관직을 더 이상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풀어 준 셈이었다. 이경석은 나라와 임금을 구한 충신이었다. 그러나 이경석은 굴욕의 삼전도 비문을 썼던 장본인으로 변절자로 알려졌을 뿐으로 그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의 역사도 같은 평가하는 것이 안타깝다.

효종은 비록 국력의 미천함으로 군비 확장에 한계를 느끼며 힘을 쏟고 있었으나 재위 10년이 되는 41세에 머리에 종기가 발생해 의문의 사망을 하고 만다. 북벌에 부담을 느낀 송시열을 대표하는 산단 세력이 독살했다는 설이 돌았고 실제 효종 시신에는 심한 부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효종이 죽지 않았다면 북벌정책은 청나라를 이길 수 있었을까? 사실 북벌정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주장이 많다.

효종대왕 영릉 재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왕릉의 재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없어져서 원형이 훼손되거나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영릉 재실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재실 건축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다. 이 재실은 2007년 11월29일 보물로 지정됐다. 탐방 시 내부공사 중이라 출입이 금지돼 내부 사진 촬영을 못했지만 재실 내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된 회양목을 촬영치 못해 아쉽다. 회양목은 보통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이지만 영릉 재실의 회양목은 보기드문 큰 노거수로 그 생물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매우 커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효종대왕 영릉 재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왕릉의 재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없어져서 원형이 훼손되거나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영릉 재실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기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고,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재실 건축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높다. 이 재실은 2007년 11월29일 보물로 지정됐다. 탐방 시 내부공사 중이라 출입이 금지돼 내부 사진 촬영을 못했지만 재실 내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된 회양목을 촬영치 못해 아쉽다. 회양목은 보통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이지만 영릉 재실의 회양목은 보기드문 큰 노거수로 그 생물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매우 커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효종의 북벌정책이 실패한 이유

첫 번째 이유는 기득권층인 조선 사대부들의 실질적인 참여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효종의 아버지인 인조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 전기와 후기를 가르는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하는 서인 정권에 의해 왕위에 오른다. 이는 조선 사대부가 사림파를 중심으로 주자학을 숭상하는 도학정치, 의를 위한 정치로 조선의 집권층은 북벌론과 대명의리론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겉으로는 치욕을 갚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내심으로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라 생각했다. 조선 후기 이조판서, 좌의정을 역임한 우암 송시열(1607~1689)은 효종의 북벌 의지를 지지한 북벌계획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면서 어영군 증강에 송시열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그러나 송시열도 사대부들의 대세에 밀려 북벌정책에 대해 미온적 태도로 변신한다.

송시열은 전쟁을 일으키는 북벌 대신 시국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살림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효종과 송시열과의 회담 내용이 담겨있는 ‘송서습유’를 살펴보면 “내가 군비를 증강하는 목적은 북벌을 추진하기 위함이다. 10년만 준비하면 청나라를 이길 수 있으니 협조해 달라” “신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만에 하나 차질이 생겨 나라가 망하면 어찌하시렵니까” 이렇듯 사대부들의 반대가 대세를 이루었다고 봐야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전략 분석은 물론 엄청난 시간과 노력, 돈, 민심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을 충족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은 1592년~1636년까지 약 40년 동안 4차례(정묘·병자호란, 임진왜란, 정유재란) 전쟁을 겪으며 인구 감소와 국토 황폐화 등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국토가 황폐해지면서 식량이 부족했던 것은 당연한 사실이며 여러 전란으로 인해 백성들의 민심 또한 좋지 못했다. 이 상태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다면 조선의 패배는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는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이유는 청나라가 전성기로 상대적으로 조선의 국력은 한계가 있었다는 이유다.

청의 나선정벌은 조선의 1·2차에 걸친 조총부대의 파병 도움으로 승리했지만 청나라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들 조선이 청을 우습게 볼 나라는 아니었다. 청나라 3대 황제로 즉위한 순치제는 강경책과 유화책을 골고루 사용해 민심의 안정에 힘을 기울였고, 1659년 영명왕을 윈난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대부분 평정하며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는 천년에 한 번 나오는 황제라 불릴 정도로 청나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었다. 조선이 만약 북벌정책을 성공했더라도 영토 유지가 힘들었을 것이고, 청나라에 빼앗기고 오히려 공격당해 멸망했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효종의 북벌계획은 명이 청나라에 멸망하고, 1659년 효종의 죽음과 함께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인다는 계획 자체가 허황된 꿈으로 볼 수 있지만 조선 왕 중 유일하게 사대주의를 벗어나 북벌계획을 벌인 왕이기도 하다.

조선의 북벌정책의 끝은?

조선의 북벌정책은 4대 세종대왕에서 시작돼 9대 성종과 17대 효종을 거쳐 19대 숙종 때에 끝난다. 세종대왕은 서북 4군과 동북 6진을 개척했는데 1차 파저강 전투에서 청의 전신인 여진족 토벌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압록강부터 두만강까지 조선의 영토로 자리매김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성종 때의 북벌은 명의 원군 파병 요청에 의해 두 차례 있었는데 1차는 1479년에 좌의정 윤필상이 이끄는 4000명의 파병으로 소규모 전과를 올리는 데 그쳤다. 2차는 허종이 이끄는 4만명으로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 본거지로 쳐들어 갔으나, 이미 여진족이 퇴각한 다음이라 별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성종의 2차 여진 정벌 실패 이후 여자신과 성준 등에 명해 연변 일대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장성축조 사업을 시작했지만 사림 세력들이 극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간도 개척을 중단하게 된다. 간도는 야춘(현재 훈춘시의 도심지역)을 위시로한 남만주(지금 연변 조선족 자치구에 해당) 지역 일대를 말한다. 만약 간도 개척이 실제로 성공했다면 4군6진을 개척한 세종대왕에 이어 제2의 북진이자 영토확장으로 크게 칭송 받았을 것이며 구한말 고종 때의 점유보다 무려 400년이나 앞서서 간도를 점유했을 것이다.

효종의 북벌 추진은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집권 세력인 서인들이 북벌을 파기한 이후 북벌론은 윤휴, 허적 등 남인들에 의해 명맥이 이어진다. 효종 시대 남인들 중 가장 강경한 북벌론자였던 윤휴는 서인들에 의해 파기된 북벌론을 계속 고수했고 현종 말·숙종 초에 북벌론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급작스럽게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이 즉위하게 되는데 윤휴는 신왕에게 다시 한 번 강력하게 북벌을 주장한다. 숙종의 즉위와 함께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윤휴의 북벌론에도 힘이 실리게 됐다. 그러나 윤휴의 북벌론은 비현실적이고 극히 위험한 주장으로 여겨지면서 숙종은 물론 남인들 조차도 어려워했다. 특히 윤휴를 지지하던 허적도 북벌 반대론으로 돌아섰고 마침내 숙종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숙종은 남인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더니 급기야 1680년(숙종6) 경신환국을 일으켜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 정국을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윤휴는 죽음을 맞게 되는데 윤휴의 죽음과 함께 북벌론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조선시대 중부지방 사대부 집의 사랑채와 행랑채 모습. 사랑채에서는 바깥주인이 손님을 맞거나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다. 행랑채에는 머슴들이 기거하고 일하는 공간이다.
조선시대 중부지방 사대부 집의 사랑채와 행랑채 모습. 사랑채에서는 바깥주인이 손님을 맞거나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다. 행랑채에는 머슴들이 기거하고 일하는 공간이다.

미·중 패권경쟁에서 선택 강요받는 대한민국의 결단은?

청나라는 1637년 12만8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처들어와 6일 만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인조가 13000명의 군사와 함께 피신한 남한산성을 포위하면서 항복할 것을 압박했다. 남한산성의 인조는 한 달치 식량으로 45일을 버티었으나 끝내 당태종에 항복을 하게 된다. 조선 역사에 나라를 보존키 위해 왕이 항복하는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당시 조선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할 필요가 없고 현실적으로 국가는 존립해야 함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국 청나라와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주화론(강화론)과 명에 대한 제조지은의 의리를 지켜 전쟁도 불사한다는 척화론으로 국론이 양분됐으나 조선의 지배층인 사림파들은 대명의리를 지켜야 한다며 청나라와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한 것이 결국은 병자호란을 초래하고 만다.

성종 시대 간도 개척의 일환으로 시작한 장성축조사업도 사림 세력들이 축조 공사는 민력을 고갈시킨다고 극력 반대하는 바람에 간도 개척을 중단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일 성종이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 지도는 완전히 다른 지도가 나오지 않았을까.

선조 시대 임진왜란 발발 전의 조선의 조정은 일본에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할 때는 그 가·부를 갖고 그리고 통신사가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는 일본 탐방 보고로 국론이 양분돼 일본이 위험하니 전쟁을 대비하자와 일본은 별 문제 없는 나라이니 전쟁이 없을 것이란 식으로 양분됐으나 결국 조선 조정은 일본이 명을 치기 위해 조선의 공로를 열어줄 것을 요청하나 이를 거절함으로써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다.

여주에 있는 조선 고종의 비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살까지 살던 집의 안채 모습이다. 대청마루에 명성황후 영정이 모셔져 있다.
여주에 있는 조선 고종의 비 명성황후가 태어나서 8살까지 살던 집의 안채 모습이다. 대청마루에 명성황후 영정이 모셔져 있다.

구한말 조선은 또 다시 러시아냐, 일본이냐 양자 선택의 길에 있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이어서 1895년(고종32) 명성왕후가 경복궁에서 일본군과 무사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으로 일본이 단발령을 선포한다. 의병이 일어날 정도로 반발이 심해지자 고종은 늘 위험을 느끼며 살았다. 이듬해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은 엄상궁이 마련한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몰래 나와 친러파, 친미파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다. 일본의 군사력에 의해 수립된 김홍집 친일정부에게 고종은 허수아비였으며 명성황후는 일본인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일본과 친일정부에 대항할 힘을 갖지 못한 고종은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고 외세를 빌어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고종은 신흥 세력 일본을 피하고자 러시아를 선택한 것이다.

아관파천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국권을 세우고자 했던 시도였다. 고종은 러시아 공관에서 자그마치 1년 동안 있었고 1897년 2월20일 덕수궁으로 돌아온다.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온 직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 칭하고 황제 자리에 오른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다. 5년 후 1910년(대한제국 융희 4) 대한제국은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국권을 상실한다. 고종의 아관파천이 결국 대한제국을 36년간의 일본의 식민지국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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