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②] 깡말랐던 나 보고 주변 어른들 “참새 뼈”라 불러
[현봉철 회고록②] 깡말랐던 나 보고 주변 어른들 “참새 뼈”라 불러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5.2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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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붐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 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현봉철 회장(왼족)이 고향인 제주도를 방문해 기념사진을 남겼다.

혼란스러운 중에 시간이 하루하루 흘렀다. 어느 날 토벌군이 외할머니 집에 들이닥쳤다. 누나보고 아버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누나는 돌아가셨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누나의 예감이었나 보다. 외할머니는 토벌군에게 말했다. 이 아이들이 나의 외손자들이다. 여러분 마음에 달려 있으니 여러분이 죽이든 살리든 결정하라고 말이다. 말씀은 그렇게 하고도 한편으로는 토벌군을 위해 소도 잡고 식사 대접도 했다. 할머니의 현명함 덕분에 그날은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후로도 우리는 낮에는 밭에 가서 숨어 있다가 밤이면 피난처인 외할머니 집에 와서 잠을 청하곤 했다. 당시 형이 5살 무렵으로 집에 가자고 울곤 했다고 한다.

1949년에 계엄이 해제됐다. 그러자 어머니는 2남 1녀를 데리고 토산에 있는 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곳으로 올라왔다. 살던 터에는 집이 불에 타서 흔적만 남아있었다. 마땅히 살 곳도 없어 옛 생활터전을 찾아온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오두막을 만들어 정착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오두막집을 만드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우리 식구 식량은 어머니가 외가댁에 가서 수도 없이 얻어왔다.

마을 사람들은 성을 쌓았다. 밤은 성안에서 지내고 낮이면 성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했다. 계엄이 해제됐다고는 하나 무법상태가 완전히 소요된 것은 아니어서 산에는 아직도 폭도들이 남아있었고 우리는 여전히 마음 놓고 살 수가 없었다.

54년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우리가 잠을 잘 수 있는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집이라고는 해도 잠시 비가 오면 물이 들어오고 모아놓은 곡식은 물에 떠내려가는 정도였다. 어린 나이에도 우리 먹을 걸 앗아가는 물을 보면서 물의 위력을 실감했다.

1958년도가 되자 아직은 나이가 어렸던 누나를 두고 혼담이 오갔다. 우리는 어려운 시간들을 고사리손으로 밭에서 일하면서 같이 헤쳐나가고 있던 시기여서 붙은 정이 매우 끈끈했다. 집안 좋고 사람 좋은 신랑감을 소개받았지만 어린 누나는 끝까지 확신은 서지 않았던 것 같고 어머니와 결혼을 두고 다툼을 많이 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툼은 늘 눈물로 마무리가 되곤 했다. 제주에는 딸을 시집보내면 사돈 간 왕래를 거의 하지 않는 것이 풍습이다. 머지않아 누나의 혼인이 결정되었다. 혼례가 치러지던 날 나는 가마를 타고 떠나는 누나를 끝까지 뛰어서 좇아갔다. 사돈댁의 배려로 나는 누나가 결혼을 한 후로도 한참은 누나를 찾아가 애틋한 시간을 같이 보내기도 했다.

4.3 사건에 희생된 제주 주민들.[사진=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그 후 1960년도 경 어머니는 고민 끝에 4.3 사건 전에 살던 옛 집터인 풍남동으로 가서 집을 짓기로 결정했던 모양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몇 번이고 그 터에 가보았다. 그때까지도 산에 폭도가 있느니 누구네 집에 나타나서 음식을 훔쳐 갔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그래도 어머니한테는 신념이 있었다. 우리가 전에 살던 곳에 돌아가 살고 있어야 아버지가 언제고 돌아와 만날 수 있다는 마음을 접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식들을 손을 잡고 옛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동떨어져 외딴곳에 살게 되었다. 외가댁에서 지원을 받아 집을 지을 수가 있었다. 그 외 주변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이웃이 없어 외롭긴 했으나 비가 내려도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었고 안정이 찾아오는 듯했다.

그래도 홀어머니와 자식 둘, 이 정황만으로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할 사람은 짐작할 것이다. 나는 나이 다섯이 되도록 어머니 모유를 먹었다. 달리 먹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그래서 내가 주변 어른들에게서 참새 뼈라는 별명을 얻은 것이다. 그렇게 불릴 만큼 나는 제법 커서도 몸이 앙상했다.

어렴풋이 형이 했던 말들이 생각난다. 형은 어린 나이에도 장남으로서의 책임을 체감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커서 돈을 많이 벌 거야. 나는 부자가 될 거야.” 형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돈을 벌어서 아버지가 팔아야 했던 땅을 모두 되찾을 것이라고도 했다.

1950~60년대 물동이를 이고 동생을 보는 제주도 어린 소녀들의 모습.[사진=제주특별자치도청]
1950~60년대 물동이를 이고 동생을 보는 제주도 어린 소녀들의 모습.[사진=제주특별자치도청]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고, 똑같은 말을 해보고 싶어도 도저히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너무도 현실감이 없는 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모습이 이런데, 무엇을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 “많은 돈”이나 “부자”라는 말 자체가 다른 세상 얘기 아닌가? 내가 부자가 된다는 건 기적이라도 일어나야 가능한 게 아닐까? 이게 나의 막연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기적이란 고된 노력으로 얻은 결실을 이르는 다른 표현일 뿐임을 깨닫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을 것이다.

멀리 동이 트면 형과 엄마를 따라 밭일을 하러 갔다. 그리고 해가 지고야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몸이 작아서 밭일에 매여 있기보다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일이 많았다. 같이 놀다가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으레 그렇듯이 시비가 붙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는 흙구덩이에 파묻혀 뒹굴며 싸웠다. 상대를 위에서 눌러 못 움직이게 하는 쪽이 이기는 식의 단순한 싸움이었다.

나는 깡마른 몸에 비해 힘이 약하지 않았기에 몸싸움에서 지지 않았다. 그런데 일부 상대 쪽 형들이 위에 있는 나를 간사한 꾀를 써서 밀쳐 내거나 혹은 큰 몸집을 이용해 나를 뒤집기도 했다. 누나가 결혼을 하기 전엔 싸움에서 밀려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집에 가면 누나가 늘 또 맞았느냐고 다그치곤 했다. 누나가 속상해하는 게 느껴졌고 어디 가서 절대 맞고 다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의 분함이 후에 운동의 길을 택하게 된 계기 중 하나라면 하나다.

쿠웨이트 건설현장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현봉철 회장.
쿠웨이트 건설현장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현봉철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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