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③] 운동이라 하면 눈이 번쩍··· 전국대회에서 우승도
[현봉철 회고록③] 운동이라 하면 눈이 번쩍··· 전국대회에서 우승도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5.3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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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붐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 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사진 맨 오른쪽이 현봉철 회장. 유연철 전 쿠웨이트한국대사, 심현섭 전 쿠웨이트한인회장과 쿠웨이트에 있는 골프 클럽을 찾았다.
사진 맨 오른쪽이 현봉철 회장. 유연철 전 쿠웨이트한국대사, 심현섭 전 쿠웨이트한인회장과 쿠웨이트에 있는 골프 클럽을 찾았다.

하지만 신체적으로 밀려 분했다는 건 아주 작은 이유에 불과하다. 결정적인 이유는 놀림이었다. 내게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던, 바로 애비 없이 막 자란 자식이라는 놀림이었다. 당시 흔히 쓰이던 표현으로는 후레자식이다. 그 친구들은 나를 그렇게 놀렸던 것을 기억할까? 아무 생각 없이 입에서 튀어나왔을 놀림이 내게는 너무도 사무쳤다. 내가 잘못해서 그린 된 일도 아닌데 너무도 큰 수치심을 몰고 오는 말이었다.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됐다. 학교는 7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걸어가는 데 1시간 반이 걸렸다. 아침 일찍 준비해서 출발을 해야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중학교 다닌다는 자체가 영광이었다. 중학교 진학률이 높지 않던 시절이었다. 주변에서도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 밭에 가서 일이나 하지 학교는 왜 가느냐는 말이 많았다.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머니의 전적인 지원이 있었다. 형이나 누나에게 미안하게 생각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중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공부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다. 학교 걸어가면서 영어 단어 공부했던 정도가 기억이 난다. 공부를 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공부를 해서 어떤 보상이 따르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필요성이 피부에 와 닿지 않았고 그래서 동기가 부족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운동이라고 하면 눈이 번쩍 뜨였다. 내 마음에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학교 특별활동으로 유도장에 한 번 갔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유도장에 가서 계속 운동을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봤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무리였다. 시간이 맞지 않았다. 운동을 하게 되면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잠시 마음을 접기로 했다.

1960년대 태권도.[사진=대한태권도협회]
1960년대 태권도.[사진=대한태권도협회]

하지만 열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진학할 수 있게 됐다. 형편은 뒷받침이 됐지만 공부를 하지 않아서 갈 수 있는 곳이 제주농업고등학교였다. 그래서 제주시에 위치한 그 학교로 가게 됐다.

고등학교에 가자 접어뒀던 꿈이 되살아났다. 기회가 온 것 같았다. 1965년 3월에 나는 시내에서 수소문한 끝에 해안가에 있는 한 공수도 도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직 ‘태권도’라는 공식 명칭으로 우리 무술이 통합 정리되기 전이었고 태수도 공수도 가라데 등 다양한 명칭이 혼용되고 있었으나 내용은 서로 많이 겹쳤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기술용어도 일본어로 점철돼 있었다. 여담이지만 1968년도에 이르러서야 우리나라 5대 무도관들이 모여 우리 고유의 기술과 용어를 후세에 전하고 의기투합했고 그 결과 태권도가 정립된 것이다.

어쨌든 내가 찾아간 곳은 공수도 도장이라는 모습으로 해군 창고를 빌려 운영되고 있었고 한 해군 군인이 관장을 맡고 있었다. 그 길로 입관원서를 접수하고 학교를 마치고는 바로 도장으로 가서 훈련을 열심히 받았다.

이 운동은 아직 우승자를 가르는 대결 스포츠의 개념이라기보다 자기수련을 위한 ‘무도’의 개념이었다. 도장은 선후배간 의리와 제자 양성이라는 사명감으로 운영되었고 아주 기본적인 운영비만 내고도 운동을 배울 수 있었다. 큰 대회를 앞두고는 경비도 지원해주고 외식도 시켜주는 등 뒤에서 꾸준히 도움을 주는 선배들이 계셨다. 지금처럼 학원형식이었다면 그 부담이 엄청난 장벽으로 작용했겠지만, 그때는 금전적 부담 없이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렇다고 치러야 할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선배에의 절대 복종이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관장님은 한주에 한번 정도 오셨고 먼저 배운 선배들에게 기술을 전수받아야 때가 많았다. 바닷가에 가서 물을 떠다가 청소하라면 “네”하고 답하고 신발 신을 틈도 없이 맨발로 해안가에 달려가 물을 길어와야 했다. 체육관 바닥에 물을 뿌리라 하면 붓고 닦으라 하면 닦고 다시 물을 떠오라 하면 또 맨발로 달려 나가 길어오는 식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규율이었다.

1910년 설립된 제주공립학교는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 제주공립농업학교라는 이름을 거쳐 2008년 제주고등학교라는 교명으로 변경됐다.[사진=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10년 설립된 제주공립학교는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 제주공립농업학교라는 이름을 거쳐 2008년 제주고등학교라는 교명으로 변경됐다.[사진=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 것은 내게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나는 운동에 매진했다. 과장 없이 혼신을 다해 열심히 했다. 운동을 시작한지 한해쯤 되었을까, 한 번은 선배와 대련을 하다가 복부 급소를 잘못 맞아 정신을 잃은 적이 있다. 태권도에서는 종종 있는 일로 급소를 맞으면 잠시 혼절하지만 호홉법으로 정신을 되찾게 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몽롱하게나마 정신을 되찾기는 했지만, 몸이 받은 충격과 고통은 그대로 남아 있어 집에 걸어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나는 사흘 동안 학교도 가지 못했고 운동은 한 달을 쉬어야 했다. 그래도 그만둘 생각은 하지 않았고 몸이 회복되는 대로 곧장 도장으로 향했다.

오기와 집중력으로 기술을 하나하나 섭렵했다. 운동을 시작할 때까지도 몸이 마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 몸에 힘이 붙어 있었다.

1968년도 전국 중-고-대 선수권 대회 앞두고 나는 체중관리 하기에 따라 밴텀급에도 페더급에도 나갈 수 있는 몸이 되었다. 시합에 시합을 거쳐 급별로 지역 대표를 뽑는다. 내가 참가하기로 결정된 체급에는 더 이상 도전자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실력도 쌓여 있었다. 급이 결정되면 대회 때까지 혹독하게 훈련하며 체중관리를 해야 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체질에 따라 체중이 너무 불거나 줄어든다. 음식을 1kg 먹으면 체중이 그만큼 느는 것이 아니라 그 몇 배 확 불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또 불려둔 몸무게가 줄어들면 대회를 앞두고 물을 억지로 마시거나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체중을 다시 올려야 하는 고충이 생긴다. 그래서 대회가 끝나기까지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이것이 내가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운동을 하면서 거친 내면의 변화도 언급하고 싶다. 앞서 말했듯이 어린 시절 싸움에서 밀린 후에 오는 분함, 촌사람이란 멸시, 무엇보다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놀림에서 오는 모멸감이 나를 이 운동으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말하자면 운동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힘을 키워 그 친구들에게 본때를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실력을 쌓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자 그런 마음은 사라졌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관대함도 생겼다. 다시 말해서 운동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 됐다. 매 순간 내 한계를 허물고 뛰어넘어 새로운 고지에서 오르는 것, 바로 이것을 목표로 하는 신사적인 스포츠 정신이 깃들었다. 그래서 내가 목에건 우승 매달은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의미가 컸다. 이것이 내가 대회를 마치고 하염없이 흘린 눈물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2019년 제19기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으로 위촉된 현봉철 회장.
2019년 제19기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으로 위촉된 현봉철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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