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⑥]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월남으로 떠나
[현봉철 회고록⑥]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월남으로 떠나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6.2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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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 붐 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쿠웨이트 건설현장에서 아침 조회를 하고 있는 현봉철 회장(오른쪽).

월남으로 파병되려면 우선 화천 오음리 훈련장을 거쳐야 한다.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梧陰里)는 `바람버뎅이골'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배후령 너머 첩첩산중에 있는 산간마을이었다. 이 훈련소는 국회에서 월남전 파병안이 통과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동안 월남전 파병 한국군 32만여명의 실전 훈련장이었다.

나는 오음리 훈련소에서 40여일 전투와 전쟁 규칙 등 실전교육을 마치고 부산항에서 군용선에 올랐다.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였다. 수송선은 대한해협과 동지나, 남지나해협을 4박5일 항해해서 베트남 다낭 항에 도착헀다. 승선한 장병들은 배에 익숙하지 않는 탓으로 다들 배멀미하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해병대 파월병력은 다낭에서 내리고 귀국병사는 거기서 승선했다. 해병내 귀국 병력이 배에 오르자 선상 분위기가 살벌했다.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이 있었던 것처럼 눈동자에 살기가 시퍼렇게 서려 있었다. 그야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살벌한 분위기였다.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해병대 귀국병들이었다.

퀴논에서는 맹호부대가 교대했다. 피월 신병은 내리고 귀국병은 올라타면서 임무를 교대했다. 캄난에서는 백마부대가 교체했다. 귀국병과 신병이 내리고 올랐다. 당시 월남에서는 계급은 있지만 새로 부임한 병력은 신병 취급을 당했다. 그만큼 현지 전투 경험이 중요한 때였다. 이때문에 월남 고참이란 용어도 통용됐다. 사단에 도착해서 다시 훈련을 받았다. 현지적응훈련이었다. 그후 CH-47 치누크 헬기로 최전방 28연대 포병대대로 배치돼, 지역 적응훈련을 다시 받고는 근무를 시작했다.

부대 배치는 월남으로 가는 군함에서 인사 참모를 통해 받았다. 나는 순박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베트남에 갔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손에 반지를 낀 채로 왔다가 뇌물로 주고 좋은 곳(후방)으로 배치받았다고 했다. 이런 경우를 더러 보았다. 내가 배치받은 부대는 취약 지구인 백마 28연대 포병 대대였다. 이 부대는 병력 T/O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곳이다. 너무 많은 우리 병사들이 죽어 나가므로 늘 인력부족인 부대였다.

당시 이런 말이 있었다. 병마부대 28연대는 병력 받으나 마나, 29연대는 훈련을 받으나 마나, 30연대는 작전 나가나 마나라는 말이었다. 28연대는 사망하는 병이 너무 많아 인력을 채워도 소용이 없고, 29연대는 사이에 끼어있는 연대로 훈련이 많아서 훈련이 소용없다는 것이고, 30연대는 후방지역이어서 작전 나가도 성과를 올릴 수 없어 작전이 소용없다는 말이다.

부대를 배치받고 열흘쯤 흘러서였을까. 부대 내 경비를 서는데 여기도 뻥 저기도 뻥 박격포가 날아오는 것이다. 나는 정신이 멍해진 채로 벙커에서 나와서 박격포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데 관망대에서 스피커로 빨리 벙커로 들어가라고 호통을 치고 난리였다. 다음날 확인 결과 박격포 150발이 낙하된 것으로 드러났고 이에 의한 피해는 헬기 한대 파손 포차 하나 파손 등으로 보고됐으며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정리해보게 됐다. 포탄 하나가 어제 내가 있는 쪽으로 날아왔으면 나도 희생자가 돼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지 말짱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에게는 운명이 있지 않을까? 운명은 내 편인 게 아닐까? 먼저 스스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운명으로 생각하자.

월남전에 파병된 한국 국인들.[사진=대한민국 월남참전자회]

나는 부대에서 태권도와 총검술을 가르치고 도수체조를 지도했다. 남보다 빠르게 병장 진급을 했으며, 헬기를 이용해 병마사단 군수과 자재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때로는 LMG-60 기관총이 설치된 방탄차 혹은 수륙전차와 헬기 지원을 받으며, 대대 보급 수송 차량을 호위하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 적군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조정 간은 항상 연발로 두었고, 나무가 무성하거나 의심되는 곳마다 LMG-60 으로 발사를 하며 지역들을 통과해야 했다.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긴장과 스릴의 연속이었다. 대대에 도착해 보급품을 하차하는 동안 휴식을 취하며 긴장을 풀고, 다시 긴장 속에 부대로 돌아오곤 했다.

우리나라 병력T/O는 40,000명 정도로 귀국과 입국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나는 일 년을 마치고 월남 복무 연장해서 한국에 휴가를 왔다. 전쟁터에서 귀한 휴가를 받고 한국에 왔으나 막상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돼 있었다. 월남파병도 혼자 결정한 것이었고 가족에 알리는 것도 월남에 간 후 편지로 소식을 전했다. 그뿐인가. 군에 입대할 때도 제주에 가긴 했으나 어머니를 뵙지 않고 31예비사단에 입대해서 훈련을 받고 부대 배치를 받았다. 누나가 찾아와서 그래도 어머니는 뵙고 입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야단과 충고를 주었지만 나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후 어머니 뵙고 인사들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어쨌든 서울에서 이틀 정도 있다가 제주로 내려가서 어머니라도 뵙고 다시 전쟁터로 가자고 마음먹었다. 집에 도착해 마음먹고 “어머니 내가 왔습니다”하고 외쳤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땔감으로 불을 피우면서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도 없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말을 받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침묵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고 마음에 서러움이 맺혔다. 그러나 겉으로는 웃으면서 넘겼다. 나부터도, 내 힘으로 대학 들어가 졸업장 받고 어머니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이루기 전이어서 멋쩍은 면이 있었다.

월남에서 가져온 C-retion(배급품)이며 여러 종류의 담배며 이런저런 선물을 풀어놓고 누님 가족과 여러 이웃이 모여서 환담을 나눴다. 겉으로는 즐기고 웃었지만 이웃과 주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자존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구겨져 있었다. 월남전 얘기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겪었던 어려웠던 일들이 자연스레 대화 소재가 됐다.

2017년 우리나라 해군순항훈련전단이 쿠웨이트를 방문했다.

며칠을 쉬고 있다가 오산으로 가서 B707을 타고 월남으로 복귀했다.

그 후로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복귀 후에 철수준비를 하는 중에 철수하기 위해 자재 수령차 중대에서 연대까지 필요한 자재 수령차 150여대 차량이사단으로 이동해 다음날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02시경 혼바산 중턱에 있는 다리를 베트공(부시)이 폭파했다. 백마 29연대 대대 경비지역이어서 대대장이 04시에 무장하고 복구가능한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베트공 매복에 걸려 총탄으로 사망하게 된다. 종전 시효 2시간 전 사건이다. 그때문에 내가 부대로 돌아오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일주일 후에 귀대하니 철군준비가 돼 있었다. 즉시 C 130 군수송비행기로 73년도 9월에 철수병력으로 귀국해 국내에서 3개월 근무하고 제대했다.

참고로 혼바산 얘기를 덧붙여 보다. 호치민산으로도 불렸던 혼바산은 해발 1200m 에 위로는 거대한 바위가 뒤덮혀 있고, 아래로는 밀림과 동굴이 형성돼 있었다. 혼바산은 아군의 중요한 보급통로였다. 혼바산 너머 캄란항으로부터 보급물품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혼바산은 9사단 백마부대가 경비를 담당했다. 산 중턱까지는 29연대 경비구역이었고, 북쪽으로는 28연대 도깨비부대의 위수지역이었다

호치민 산으로도 불렸듯이 베트콩은 혼바산을 신성시했다. 산 위에 있는 돌바위를 신성한 바위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우리 부대는 고위급이 방문하면 포탄으로 혼바산 바위를 명중시키는 시범을 보이며 박수를 받았다. 그런 날이면 밤에 비상이 걸렸다. 밤에 박격포가 날라오는 것이다. 베트콩이 신성시하는 바위를 모독했다고 보복하는 것이다.

8연대 도깨비 부대 위수지역은 크고 작은 산과 동굴로 형성되어 있어, 베트콩의 반격이 심한 지역이었다. 오래전 해병대가 주둔할 때 대민사업 일환으로 매주 쌀과 C-ratiom 등을 지역 주민들에게 지원했는데 밤마다 그 마을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몇차례 경고 했는데도 여전히 박격포가 날아오자 큰 비극이 빚어지기도 했던 곳이다.

월남에서 돌아와 제대를 하자 이제 비로소 대학 문을 두들길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런데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여러 학교의 특채 전형이 마감된 뒤였다. 하지만 지금은 물러설 수 없었다. 여러 지인께 조언도 구하고 내 나름대로 정보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중앙태권협회의 추천을 받아 인천체전에 금성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다음 전형까지 일년을 기다리느니 이 학교에서 2년 졸업하고 대학 3학년으로 편입하는 것이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권유를 받아 그곳 추천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와중에 신촌체육관에서는 아주 좋은 조건으로 체육관을 운영해 달라고 연락이 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체육관을 인수해서 직접 운영하라는 제안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몇 개월 운영한 후에 체육관을 인수했다.

월남에서 모은 돈은 USD 1,000 안팎이었던 기억이 난다. 학교 입학하고 오가며 경비를 쓰고 나니 체육관을 인수하는 데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난관에 봉착했나 싶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돌파구가 생겼다.

월남에 가기 전 신촌에서 후배 육성을 위한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서 일이 들어와 활동 범위가 커졌던 나는 그 일대에서 평판이 좋았다. 고위층 자녀부터 동네 주민 자녀까지 두루 지도하다 보니 인사를 주고받는 얼굴도 많았고 내가 알아보기도 전에 내게 인사를 건네는 분들도 많았다. 나는 늘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었다. 그러던 중 근방에 사는 한 처자와 알게 돼 교제를 시작했고 파병 다녀온 후에도 다시 만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지금의 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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