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⑧] 미국에서 돌아오니 중동건설 붐이 한창
[현봉철 회고록⑧] 미국에서 돌아오니 중동건설 붐이 한창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7.0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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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 붐 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 미션 스트릿[사진=위키커몬스]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 미션 스트릿[사진=위키커몬스]

미국에서 받은 첫인상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지저분하고 무질서하고 거칠었던 1970년대 서울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낙원(paradise)라는 말은 이런 곳을 가리키는가 싶었다. 가는 곳 마다 잔디가 심어져 잘 손질돼 있고 일반 가정집이라도 앞뜰과 뒤뜰은 오가는 사람들이 기쁘게 지나가야 한다며 꽃으로 정성스레 꾸며두고 있었다. 이웃을 위하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열심히 환경 관리를 하고 있던 것이다. 개발이 한창이었던 우리나라에는 개념조차 들어오지 않았던 공공미관의 중요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건널목을 지날 때도 마주치는 사람들이 꼭 인사를 상냥하게 주고받았다. 이 역시 상대를 위한 배려였다. 주변에 쓰레기를 버려서도 안 된다. 서울에서는 길에 쓰레기 버리고 침 뱉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공중도덕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또 거짓말을 해서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범죄를 저지르면 기록에 철저하게 남아 여생을 살아가는 데 불이익이 돌아온다. 성실하고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제도가 갖춰진 나라였다. 미국사회뿐 아니라 처음으로 접한 한인교회와 목사님을 통해서도 더불어 사는 삶과 베푸는 삶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하루하루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젊음을 만끽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자 일 년 연수 기간이 훌쩍 흘렀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을 해야 하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 끝에 미국에서 새 삶의 도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수료식에 참석해서 수료증을 받고 귀국하는 일행과 합류하지 않고 미국에 남았다.

사전에 나의 보증인이 돼준 삼촌과도 서신을 주고받았다. 내가 제때 귀국하지 않음으로써 혹여나 그분께 불이익이 있을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삼촌은 여기는 걱정 말고 더 머물러도 된다고 답해주었던 것이다.

사진은 지난 2015년 캘리포니아의 한 도장에 열렸던 태권도 대회.
사진은 지난 2015년 캘리포니아의 한 도장에 열렸던 태권도 대회.

어울려 지내던 사람들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제 외로움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샌프란시스코한인회장인 김용백 씨, 장중일 목사님 가족, 이춘삼 목사님 가족, 주변에서 많은 분이 아낌없이 도움을 주어 스폰서를 정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태권도로 새 도전을 해볼 참이었다.

그동안 보고 배운 것을 토대로 스폰서인 Mr. Babi Cant가 제반 작업은 모두 해주고 나는 시범을 보이면서 순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강습생을 모집하려 했던 것이다. 인원은 신문을 통해 모았다. 한국에 주둔했던 미8군에서 태권도 경험자들과 여대생들로 팀을 꾸려 약간의 수련을 거쳐 지역마다 방문해 시범을 보이면서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반응이 좋았다. 호의적인 여론 속에 태권도 도장을 열었다. 그런데 단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고비가 왔다. 오픈 일주일이 지나니 자격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들어온 것이다. 이민국 담당관이 내가 취업 비자를 받은 게 아니므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왔다. 순간 나는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생각이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갔다. 결혼하고 홀로 미국으로 온 자의 남편으로서의 책임감과 스쳐 보낸 여러 문제점이 떠올랐다. 하지만 오랫동안 공상에 빠져있진 않았다. 내겐 젊음이 있는데 무엇인들 못 하랴 싶었다.

먼저 담당 변호사를 통역자와 함께 직접 만났다. 영어가 부족해 주변 소개로 알게 된 미국 공무원인 Miss You에게 부탁해 변호사 미팅을 주선 받았다. 면담결과 정부 정책상 3년을 기다려야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고 그 후에야 워크퍼밋 신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현봉철 회장은 2020년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사진은 그해 12월 열렸던 표창장 전수식. 왼쪽이 현 회장, 오른쪽이 홍영기 주쿠웨이트한국대사.
현봉철 회장은 2020년 대통령 표창장을 받았다. 사진은 그해 12월 열렸던 표창장 전수식. 왼쪽이 현 회장, 오른쪽이 홍영기 주쿠웨이트한국대사.

주변을 보면 비합법적으로 길을 뻗은 사람도 많았지만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는 고려의 여지도 없는 것들이었다. 마음을 접었다. 그날부터 당장 모든 것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변호사 비용은 한 주 안에 송금하기로 했다. 그날로부터 3개월 안에 출국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그동안 시범 순회를 다니다 보니 모아둔 돈이 없었다. 석 달 안에 돈을 모아서 항공권을 마련해야 했다. 목사님을 찾아가 변호사 면담결과와 내 생각을 전하고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 석 달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알선해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주어진 시간이 짧았다. 하루에 세 가지 파트타임을 뛰어야 했다. 하루 4시간만 자면서 열심히 일했다. 아르바이트하던 곳 세 군데 중에는 프랑스 레스토랑도 있었는데 내가 성실히 일하는 모습에 감복했는지 일개 파트타이머에 불과했던 내게 매니저직을 제의하기도 했다. 여건상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프랑스 레스토랑과 힐튼 호텔 등에서 시간을 쪼개 일한 결과 석 달 안에 USD 4,500 정도를 모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항공권을 마련하고 선물을 준비해서 귀국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2년 가까운 미국 생활을 마치고 78년 4월에 귀국하고 보니 우선 체육관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내게 누구도 연락을 취하진 않았지만 내가 없는 동안 참 다사다난했나 보았다. 회원이 자그마한 말다툼을 하다가 살인으로 이어져 감옥에 가 있는가 하면 합기도에서 도전장을 걸어와서 응했는데 도장에 김용진 사범이 상대를 너무 심하게 때리는 바람에 살인 미수로 구속된 사건도 있었다. 여러모로 도장 분위기가 혼란 그 자체였다. 그래서 오자마자 도장 운영부터 정비해야 했다.

집사람과 합쳐서 신혼을 시작하기는 했으나 나는 다시 미국으로 갈 수 있기를 바라며 귀국했던 것이었다. 금방 이루어질 성싶지는 않았다. 한국은 경제가 용트림하고 있었다. 도장에서 얻은 수입은 겨우 도장을 운영할 수 있는 정도였다. 미국 사회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돌아오고 보니 중동건설이 붐이 한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 H건설에 같이 운동하던 후배가 있어서, H건설에 특채 채용이 있으니 건설사업부에 이력서를 제출해보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가 쿠웨이트 적신월사에 마스크 4,500개를 기부했다는 뉴스가 아랍타임즈에 실렸다.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가 쿠웨이트 적신월사에 마스크 4,500개를 기부했다는 뉴스가 아랍타임즈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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