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
[해외기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
  • 황현숙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7.06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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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문학 활동을 하면서 글쓰기의 멘토가 되어준 한 시인이 나에게 명언처럼 들려준 말이 있다. “이민사회에서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은 성공한 이민자다.” 그 말에 머리를 갸웃하며 이민의 삶이 만만치 않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제 삼십여 년이 넘는 긴 시간을 이민자로 살아오면서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분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오래전에 상영된 영화의 제목처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놈, 놈, 놈)들이 이 사회에 골고루 퍼져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영화는 지도 한 장을 들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보물을 찾아서 뺏고 빼앗으며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 명의 추적자에 대한 스토리였다. 치열한 싸움에서 살아남는 한 명이 모든 것을 가진다는 설정은 이기적이고 물욕적인 현대사회를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도 그런 부류들이 널려있음을 뉴스를 통해서도 익히 알 수 있다. 통제된 주 경계를 뚫고 역병을 퍼뜨리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바로 철저한 이기적인 나쁜 놈들이다.

다행히도 나는 인복이 참 많은 사람이다. 주위를 둘러보고 또 둘러보아도 따뜻한 마음씨에 인정 많은 지인이 내 곁에 항상 있음을 알고 있다. 인간관계란 단순히 주고받는 물질적인 이해로 얽히면 쉽게 상처를 받게 된다.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그저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마음을 가지면 편해진다. 나는 요즘 건강과 나이가 비례한다는 사실에 조금은 주눅이 든 상태다. 지난 몇 해 동안 건강문제로 자녀들이나 지인들에게 계속 걱정거리를 안겨 주었다. 평소에 기관지가 약한 내가 역병에 두 손을 들고 항복할까 봐 우려하며 작년 한해를 보내기도 했었다. 거기에 골다공증 주사를 맞고 비타민 D와 칼슘을 섭취하며 온몸을 떠받치는 뼈를 다칠까 긴장하며 살았다. 그러나 간혹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불운도 찾아오는 터라 얼마 전에 무릎뼈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했다.

긴 부츠 같은 스프린트를 신은 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집안에 갇혀있는 나를 위해서 지인들은 먹거리를 양손에 들고 병문안을 오고 있다. 나의 식탁이 갑자기 풍성해졌다. 한국인의 정서와 인심은 먹거리로 몸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모양이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부탁하라는 친정 언니와 같은 따스한 위로의 말을 해주는 분들,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 와서 식욕이 떨어진 나를 위해 함께 먹어주는 지인들, 모두가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다. 직장동료들은 위로의 카드와 꽃다발을 집으로 배달시켜주었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을 털어놓을 말벗은 꼭 필요하다. 특히 아플 때의 공허함은 가슴 안으로 휑하니 찬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섬뜩함을 데워 주는 약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마음을 훌훌 털어놓으며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 대상이 동성이든 이성이든 상관없이 서로의 눈만 쳐다보아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친구를 말한다. 나에게 필요한 친구는 가슴을 열고 손을 벌려주는 친구, 엄마의 손길처럼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친구이며, 작은 버팀목이 되어주는 친구를 말한다. 난 이미 대박 난 이민자가 되어있다.

내 마음에 와닿는 친구가 한 명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내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더 깨달아가는 중이다. 사람은 옛사람이 좋고 장도 오래 묵은 장이 깊은 맛을 더해준다고 한다. 삼십 년이 넘는 이민생활에서 수많은 사람이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된 우정은 나를 안아주는 포근한 담요처럼 느껴진다. 오늘 하루가 중요하고 다가올 내일에 희망을 걸며 내 곁에 있는 지인들의 사랑을 느낀다. 집에서 휴식하는 동안에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고마운 인연들을 잘 이어나간다면 인생은 훨씬 더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푸아뉴기니에서 30여 년 동안 원주민 소녀들을 위해서 고등교육을 시키며 돌보는 플로렌시아 수녀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정말 존경하는 수녀님인데 외방 선교수녀님들의 노고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현재는 수도인 포토모스비에서 두 시간 이상 비행기를 더 타고 가야 하는 외진 섬에 분교를 다시 설립하고 원주민 소녀들에게 고등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오랜만에 도시에 나오게 되어서 전화를 하신다고.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으니 답답한 일도 많을 것이다. 다리를 다쳤다고 하소연하는 나에게 “하느님께서 푹 쉬라고 휴식시간을 주시는 모양인데, 하필이면 다리를 다쳐서 쉬게 하실까? 안 다치고 쉬게 해주면 더 좋을 텐데”라고 말해서 함께 웃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유머로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수녀님에게서 엄마와 같은 따스함을 느꼈다. 아직 그곳을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은퇴 후에는 수녀님의 교육적인 일을 돕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살다가 힘든 일이 생기면 간혹 위로를 받고 싶어서 한국에 계신 은퇴한 신부님께 하소연할 때가 있다. 다리를 다쳤다는 말에 안쓰러워하면서도 이번 기회에 한 번쯤 생각해보라며 화두 같은 말을 툭 던져준다. “그동안 살면서 다리 보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요?”라고.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함부로 사용했던 내 신체 부분들에게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몇 주 후에 다리 보호용 스프린트를 떼어내면, 장미 향기 훨~ 훨 풍기는 로션을 잔뜩 바르고, “고맙다, 내 다리야.” 하며 감사를 전하는 마사지를 해줘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황현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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