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⑪] 아프리카에서 음악은 매일 뜨고 진다 - 하림
[아프로⑪] 아프리카에서 음악은 매일 뜨고 진다 - 하림
  • 하림(가수)
  • 승인 2021.07.0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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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마사이족에세 기타를 전달하는 하림
마사이족에게 기타를 전달하는 하림

가수 하림은 다양한 문화권의 음악을 흡수하며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 활동을 펼친다. 그의 폭넓은 작품 세계에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영감을 받아 쓴 곡도 있다. 하림은 영감을 받으면 그곳에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아프리카 국가와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무대로 옮겨 관객들과 아프리카의 다채로운 매력을 나눈다. 또 공연으로 얻은 수익의 일부를 음악에 재능을 지닌 아프리카 국가의 아이들에게 기타를 선물하는 데 활용한다. 어느 덧 10주년을 목전에 둔 ‘기타 포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통해 하림은 기타 수십 대를 아프리카에 보냈다. 

하지만 때로는 선한 의지를 담아 보낸 기타가 괜한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진정으로 옳은지 의구심이 들었다. 마치 마음으로 벌을 서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수년 전 보낸 기타를 통해 가수로 데뷔한 친구를 만나며 음악이 악한 의도를 가질 수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또 삶 속에서 음악을 순수하게 즐기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며 음악을 하는 이유를 되찾았다. 아프리카는 대중음악시장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던 그를 단단히 붙잡았으며 더불어 무한한 영감을 안겼다.

대자연에서 느낀 본질적 미학

2008년 EBS 세계테마기행 제작진이 나미비아 여행을 제안했다.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여행을 즐기지만, 음악만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아픈 역사를 구슬픈 음률로 승화하며 많은 음악가를 배출한 아일랜드를 동경했다. 또 플라멩코(Flamenco), 렘베티카(Rembetica), 파두(Fado)를 듣고 배우기 위해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을 향했다. 사람이 오래 머물러 음악이 중첩된 유럽의 고도시가 주로 나를 이끌었다. 물론 블루스(Blues), R&B, 소울(Soul) 등 팝 음악이 아프리카 음악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리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거절할 핑계를 찾던 내게 제작진이 사진 한 장을 건넸다. 나미비아 데드블레이(Deadvlei)에 앙상한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는 사진이었다.

카롱가유스센터의 아이들
카롱가유스센터의 아이들

데드블레이는 사막에 있는 호수가 말라붙으며 그곳에 기생하던 나무들이 검게 말라죽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백이 대부분이 사진 속 풍경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방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신비한 순간을 경험한 나는 강한 힘에 이끌려 나미비아를 향했다. 사람의 기운이 생동하는 도시의 소로를 헤매다가 광활한 자연 앞에 서니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왔다. 사람이 풍경의 일부조차 될 수 없는 너른 자연을 보며 인간이 지구상에서 별 것 아닌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이 인간의 감정에 기대어 발전한 인류 문화의 산물이라고 여겼다. 당시 음악이 내 인생의 전부였던 만큼 그 중심에 존재한다고 여겼던 인간이 우주의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자 혼란스러웠다. 2001년 가수로 데뷔하며 대중음악시장의 일원이 된 후 나는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내 삶의 중심이던 음악이 도구로 밀려난 듯했으며, 더 이상 음악을 하는 행위가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날로 늘고 쌓이는 고민을 억제할 길을 찾지 못해 한동안 활동을 접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미비아에서 오래 끌어온 고민과 번뇌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프리카 국가의 아이들에게 음악은 근사한 놀이였다. 나미비아에서 아이들이 합창을 하며 하루 종일 노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삶에서 음악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되며 잊었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국내에서 음악은 개인이 매체를 통해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일종의 상품이며, 음악가에게는 생계 수단이다. 반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음악은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처럼 보였다. 음악은 하는 사람이 즐거워야 가치가 있으며, 그랬을 때 듣는 사람도 진정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프리카는 내가 그동안 품어 왔던 고민보다 훨씬 더 원론적인 차원에서 음악을 바라보게 했다. 여태껏 매몰되어 온 음악의 장르, 스타일, 시장성에서 오히려 벗어나 생각하게끔 한 순간이었다. 진리에 가까워지며 마음이 맑고 밝아진 까닭일까. 아니면 대자연의 품에 안긴 까닭일까. 나미비아에서 곡이 절로 써졌다.

기타를 선물받은 와푼다페이
기타를 선물받은 와푼다페이

기타 포 아프리카(Guitar for Africa), 기타와 사람이 하는 일

영감을 받았으니 갚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또 미안한 마음에 무엇이라도 거들고 싶었다. 길에서 우연히 술 취한 여인과 아이를 발견했다. 미군 부대가 주둔했을 때 맥주를 마셨던 기억을 잊지 못해 사람들이 자꾸 술을 찾는다고 했다. 아프리카 대륙은 인류의 기원이 깃든, 유서 깊은 땅이다. 영겁의 세월 동안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온 아프리카 대륙에 외국인들이 얕은 생각으로 들어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결과를 목도하니 괜스레 숙연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이 깊어질 때쯤 힘바(Himba)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찾았다가 그곳에서 족장의 딸 와푼다 페이를 만났다.

마을 아이들이 이방에서 온 손님을 환영하는 의미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 와푼다 페이가 선창을 했던 것이다. 음악적 재능이 엿보여 우쿨렐레를 건네며 간단한 연주법을 가르치자 소녀는 금세 따라 연주했다. 나는 그 아이가 기특하여 서울에 돌아가면 기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서울로 돌아와 다시 바삐 지내던 중 나미비아에 남기고 온 약속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부터 와푼다 페이에게 기타를 보낼 궁리를 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일상에서 즐기는 음악은 화음이 적고 리듬 위주여서 기타가 잘 어울릴 듯했다. 어쩌면 예전에 우연히 본, 아프리카 어느 지역의 아이가 철사줄로 만든 기타를 연주하는 사진이 뇌리에 박혀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의 레베카

또 기타를 보내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던 중 카메룬 출신의 세계적 베이스 연주자 리처드 보나(Richard Bona)가 비슷한 경로로 악기를 선물 받아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됐다는 사연을 접했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처럼 여겨져 더 많은 기타를 보내기 위해 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힘을 모을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기타 포 아프리카’라는 이름을 짓고 이를 프로젝트로 개발했다.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이니 기타 대신 생필품을 보내라고 충고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먹고 사는 게 힘들다고 다른 꿈을 품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먹을 것보다 악기를 받았을 때 더 행복했을 것이다.

기타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오면 한 대씩 보내고, 한국으로 온 아프리카 출신 유학생이 돌아갈 즈음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선물하라며 기타를 안겨 보냈다. 정확히 세지 않았으나 꽤 많은 기타가 아프리카 대륙 각지로 넘어갔다. 그런데 내가 선의로 한 행동이 꼭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때로는 기타가 괜한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음악에 재능을 가진 어린 친구에게 기타를 주는 것이 기타 포 아프리카의 원칙이었으나, 매번 우리의 의도가 가 닿지는 못했다. 서로 가지겠다고 싸움이 나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비닐로 꽁꽁 싸 캐비닛에 넣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팔아서 더 이상 없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처음에는 나도 인간인지라 화가 났으나 기타도 물건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어딘가에서 또 잘 쓰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또 이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뜻밖에도 성찰이 깊어지기도 했다. 음악가들은 스스로 만들고 연주한 음악을 당연히 자기 소유라고 여긴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그럴 수 없다. 음악은 충분히 오래됐고,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게 아니라 자연 혹은 사람의 마음을 모방하여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악기와 음악, 나라는 존재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새로운 사고의 틀을 갖게 됐다. 그때부터 기타가 아프리카에서 일으키는 변화들은 내가 아닌 기타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타가 술값이나 땔감으로 쓰이더라도 그것은 기타의 운명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기타포 아프리카는 2016평창아트드림캠프와 함께 했다.
기타포 아프리카는 2016평창아트드림캠프와 함께 했다.

기타 포 아프리카를 통해 기타를 받은 아이 중 가수가 된 친구도 있었다. 2016년 평창문화올림픽 아트드림캠프의 일환으로 말라위 카롱가(Karonga) 지역에 위치한 루수빌로 음악학교(Lusubilo Music School)를 찾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협업할 기회가 생겼다. 참고로 평창문화올림픽 아트드림캠프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와 연계하여 동계올림픽이 낯선 국가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문화예술 교육 활동이었다. 그런데 그 음악학교는 10여 년 전 대안학교 아이들과 트럭을 타고 동부아프리카를 여행했을 때 들른 곳이기도 했다. 불현듯 그때 추억이 떠올랐다. 당시 일정 중 카롱가 지역에 있는 한 고아원을 찾아 그곳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기타 포 아프리카를 시작한 이후여서 음악에 재능이 있는 친구를 만나면 기타를 주고 올 계획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만난 관계자에게 음악적 재능을 지닌 친구가 있는지 묻자, 그는 기타를 상품으로 건 오디션을 열자고 즉흥해서 제안했다. 동네에서 노래 좀 한다는 친구들이 다 모였다. 그중 실력이 월등했던 소녀에게 기타를 준 기억이 났다. 그 소녀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카롱가에 간 김에 수소문하니 북유럽으로 음악 유학을 다녀와 정식 데뷔하여 수도를 중심으로 활동한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이메일을 보냈더니 나를 기억한다며 자신의 기타가 낡았으니 새 기타를 달라고 했다. 이렇게 깜찍할 수가. 운 좋게 이듬해 아트드림캠프로 다시 한 번 말라위를 찾을 일이 생겨 새 기타를 들고 그 친구를 만나러 갔다.

사실 그 친구를 만나러 가기 전까지 기타 포 아프리카라는 이름하에 내가 펼친 활동에 강한 회의감을 품고 있었다. 내가 이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관여하는 일이 과연 옳은지 의구심이 들었다. 기타를 받고 이 사람들의 삶이 어디로 흘러갈 것을 상상하니 덜컥 겁이 났다. 이런 암울한 생각에 잠식당하자 그 친구를 만나기로 한 약속도 후회됐다. 그렇다고 이제 와 약속을 물릴 수 없어 친구가 부업으로 학생을 가르친다는 음악학교를 향했다. 그 친구는 나를 환영하는 의미로 동료, 학생들과 작은 공연을 준비했다. 내가 준 기타를 켜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자 왈칵 눈물이 났다.

아프리카오버랜드라는 공연을 통해 관객과 상상속의 아프리카여행을 떠난다
아프리카오버랜드라는 공연을 통해 관객과 상상속의 아프리카여행을 떠난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끄럽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음악가가 좋은 악기를 가지고 신나게 노래하는 모습을 보자 모든 의심이 눈 녹 듯 사라졌다. 결국 내가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보상 받는 것 같았다. 음악은 악한 목적을 가질 수 없다는 확신이 들어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역시 악기는 사람들이 만질수록 좋고, 악기는 악기대로 연주되다가 사라져도 그만이었다. 넓게 보면 이것이 내가 기타 포 아프리카를 통해 세상에 남기고자 한 메시지였다.

아프리카 오버랜드(Africa Overland), 음악으로 완성해나가는 우리의 여행이야기

‘아프리카 오버랜드’라는 공연이 기타 포 아프리카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다. 아프리카 오버랜드는 기타 포 아프리카 프로젝트에 공감하는 음악가들과 아프리카를 여행하듯 펼치는 공연이다. 내가 가이드가 되어 탄자니아 국제공항에서 세렝게티(Serengeti)까지의 여정을 재현한다.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수영도 하고 기린도 만나며 바오밥나무 군락지도 들른다. 또 배가 고프면 멈춰 서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 트럭을 타고 여행하는 설렘과 피로감을 그대로 관객들과 나눈다. 음악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미발표곡들로 채운다. 아프리카 오버랜드 공연은 여태껏 수십 번을 했으나 매번 새롭고 재미있다. 라이브 공연이 본질적으로 같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특히 아프리카 오버랜드는 대사나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관객과 무대가 다르니 매번 신선하다.

영상 없이 이야기와 음악에 기대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니 관객들도 훨씬 더 깊숙이 공연에 빠져든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배지를 사고 지불한 돈으로 다시 아프리카에 보낼 기타를 마련한다. 아프리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노래이자 공연이니 무엇이든 돌려주는 게 맞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디든 부르면 음향장비를 차에 싣고 무조건 간다. 덕분에 아름다운 광경도 많이 목격했다. 평생 동물을 본 적 없는 시각장애인에게 이야기와 노래로 아프리카를 꿈꾸게 한 적이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우리가 더 감동을 받았다. 마치 우리가 무엇이라도 된 냥 긍지를 느꼈다. 그때 먹먹했던 감정은 아마 평생 갈 것이다.

2016년과 2017년, 평창문화올림픽 아트드림캠프로 말라위를 찾았을 때 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의 음악 지도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음악적 정서, 본능이 우리를 능가한다고 판단했다. 이론이나 화성은 가르칠 수 있어도 음악을 지도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특히 그들이 생활에서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오히려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었다. 그래서 신시사이저, 기타 앰프 등의 기계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준 후 같이 노래하고 놀며 작업했다. 올림픽과 연계한 활동인 만큼 그곳 학생들과 올림픽 정신에 부합하는 노래를 만들었다. 작사 워크숍, 작곡 워크숍, 합주 워크숍, 편곡 워크숍 등 노래를 만드는 과정을 분리하여 진행하자 그 속에서 교육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2018년에는 루수빌로 학생들이 한국을 찾아 함께 만든 곡을 연주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국가 차원의 사업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욕망이 투영되어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하지만 무대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말라위 친구들이 워낙 흥이 많고 끼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삽시간에 무대를 휘어잡았다. 춤과 음악이 딱 붙어 있는 사람들답게 느린 곡에도 현란하게 춤을 추며 관객들의 혼을 빼놓았다. 당시 아트드림캠프라는 명목 하에 많은 기관과 조직이 문화예술 활동을 전개했다. 수십 개에 달하는 활동 중 우리가 진행한 프로젝트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덕분에 그때까지 활동을 펼치며 품어 온 의구심을 어느 정도 불식시키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아프리카 오버랜드팀
아프리카 오버랜드팀

나는 데뷔를 앞둔 음악가들이 조언을 구할 때면 아프리카 시위 현장에서 수집한 소리를 들려준다. 음악이 몸에 밴 아프리카 사람들이 시위하며 외치는 구호 소리는 마치 음악 소리처럼 유량하다. 나는 시위 현장마저도 우아하게 변모시키는 광경을 목격하며 음악이 사람을 얼마나 우아하게 해주는지 깨달았다. 그리하여 곧 대중음악시장의 일원이 될 음악가들에게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음악을 즐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강조한다. 또 기회가 닿으면 대중들에게 음악은 아무리 소비해도 닳지 않으니 마음껏 즐기고 스스로 소리를 내라고 조언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음원을 내지 않는 이유를 물으며 음반 발매를 권한다. 나는 음악을 기록하는 것보다 일상에서 실천하는 행위가 더 의미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녹음실보다 공연장을 더 쫓아다닌다. 물론 나만의 큰 그림이 있기도 하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노래인 만큼 우리끼리 부르고 연주한 것을 기록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야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지닐 터이다. 언젠가 꼭 아프리카에 아프리카 오버랜드 멤버들과 가서 그들의 소리를 담고 싶다. 때마침 2020년은 아프리카 오버랜드를 결성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다. 수년 전부터 읊어 온 ‘언젠가’가 2020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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