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고록⑬] 사우디에서의 새 사업 제안
[현봉철 회고록⑬] 사우디에서의 새 사업 제안
  • 현봉철 민주평통 쿠웨이트지회장
  • 승인 2021.08.0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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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제주도에서 출생, 4·3사태 때 부친 실종, 홀어머니 밑에서 태권도에 전념해 전국체전 우승, 월남전 참전, 중동 건설 붐 때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활동, 쿠웨이트 한인회장과 민주평통 지회장으로 봉사··· 현봉철 회장의 생애는 이처럼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함께 하고 있다. 한국경제 발전사와도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현봉철 회장의 삶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사진 오른쪽이 현봉철 회장

회사가 너무 어려워서 자존심 다 버리며 자기 삶도 없이 회사를 위하여 일만 하면서 회사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더니 이제 와서 배반당하는 기분 등 여러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회사를 그만두기로 나는 마음을 정리했다. 나는 NOC(non object Certificate)를 요청하고 서로가 웃으며 헤어지자고 건의했다.

1년 3개월 만에 깨끗하게 정리하고 귀국을 준비하는 중에 AL Arabi Landscaping 사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같이 사업을 하자고 했다. 파트너십으로 나는 운영을 맡고 자금은 그 회사에서 USD 1백만불을 준비하는 것으로 얘기가 오갔다. 당시 돈으로는 큰돈이었다. 서울에 와서 여러 가지 일 처리를 하고 다시 비자를 받아서 1985년도 4월14일 사우디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사업을 제안한 회사(Al Arabi Landscaping)는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호텔에서 며칠만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말로는 차근차근(step by step) 준비하자고 하지만 기다려도 뭐가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닷새가 흐르자 황당하고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전 회사에 가기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 가지 떠오른 생각은 먼저 출장비(2500사우디리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리야드로 출장을 가서 호텔에 짐을 풀고, 아는 분을 찾아가서 현재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렇게 지인을 찾아가서 현실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할 수 있었다. 나의 입장을 다 듣고 나더니 그분은 흔쾌히 협조를 받아들였다. 자재 납품 건이었다.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자재 납품이며, 현금 회전이 빠르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자재 납품으로 5만7천 사우디리얄 어치 주문을 받고 열심히 공급하고 나니 두 번째는 12만5천 사우디리얄짜리 주문이 들어왔다. 세 번째는 25만 사우디리얄짜리였다. 너무도 고마웠고 고마웠던 만큼 열심히 노력으로 보답을 했다. 때로는 트레일러 운전사와 함께 먼 길을 가면서 트레일러 뒤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온몸으로 뛰었다. 그동안 어려웠던 일들이 모두 해결됐다. 가족에게도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자존심을 살릴 수 있었다.

쿠웨이트 건설현장

꿈꾸던 시간이 다가왔다. 가족을 사우디로 데려와 애들과 아내와 함께 살 수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꿈 꾸던 날이었다.

여덟 달 동안 발로 뛴 결과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연말정산을 하니 스폰서에게 차 한 대와 이익금 12만 사우디리얄, 사무실도 모양새 있게 준비됐다. 나에게도 자금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연말 결산을 하는데 결산 내용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억지스러운 요구 사항이 너무 많았다. 상식에도 없는 요구 사항이라 많아 참으면서 대화를 하는데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내가 참고 넘겼던 일들이 폭발하듯 기억에서 솟아났다. 지금까지 약속 이행은 물론이고 협력 제공도 전혀 없었고 때로는 불편한 일들이 많았다. 우선 이 사람 삶 자체가 성실하지 못했다. 항상 술에 젖어 있었고 유학을 가서 못된 물만 들어서 온 사람이었다.

더 이상 인내도 감정조절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보고서를 스폰서 앞에서 던져버렸다. 당신하고는 비즈니스를 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그러는 과정에서 서로 해서는 안 될 얘기까지 오갔다. 하지만 강자는 스폰서였다. 나는 약자였지만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귀국할 생각으로 조금도 양보 없이 싸움을 이어갔다. 그쪽에선 당장 비자를 취소시킬 테니 귀국하라고 날뛰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그의 조카인 알 샤리프(AL SHARIF)가 나를 붙잡았다. 그때가 1986년 2월이었다. 샤리프는 스폰서의 조카였고 그동안 나를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붙잡으며 우리 삼촌은 문제가 있는 분이니 자신과 사업을 하지 않겠냐고 했다. 또 내 비자가 실은 그 조카 회사의 비자라는 것도 알려줬다. 아랍어로 쓰여 있어 내 스폰서가 누구인지도 그때 알았던 것이다.

새 회사는 불과 일주일 만에 등록이 됐다. 우리는 Al Sharif Landscaping 사를 만들고 일을 시작하였다. 회사 소개서도 새로 만들었다. 회사 주변에는 왕자와 공주도 있었다. 힘 있는 사람들이었다. 부족한 부분은 주변에서 지원받으면서 나는 점차 상황을 개선시켰다. 그렇게 차근차근 다시 시작하였다.

다시 시장도 많이 장악할 수 있었다. 어디서도 신뢰를 얻는 데는 자신이 있어서 자본금 없이 자재 납품을 할 수 있었다. 스위스, 영국, 독일 사람들과 같이 자재를 공급하는데 같이 작업 범위를 정하면 나는 사우디에서 영업 활동을 하고 자재는 영국, 네덜란드, 독일에서 보내주는 식이었다. 때로는 여러 컨테이너가 도착되면 팔아서 송금하기도 했다. 이익은 적어도 많은 것을 배웠고 위치가 향상되면서 생활이 안정적으로 정착됐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열심히 했다. 현장 감독관들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스펙을 잘 적응시켰다. 그렇게 활동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유럽팀들은 자재에 대한 서류나 스펙 문서는 잘 만들었다. 반면 실제 자재는 불충분한 것들이 많았다. 그런 것들이 기술이며 방법인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순진한 시골 출신인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모르는 사람은 속아 넘어가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기준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세계시장에는 그런 교묘함이 있었다. 국가마다 법이 있으니 그 국가 법 속에서 한다고 하여야 할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어떤 면에선 선진국의 횡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혹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려면 갖춰야 하는 수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2018년 개최한 쿠웨이트한인회 체육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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