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건망증
[이영승의 붓을 따라] 건망증
  • 이영승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1.08.09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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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이 심한 노부부의 대화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거실 냉장고에서 우유 좀 가져다 줘. 까먹을지 모르니 적어서 가.”

“당신은 내가 치매라도 걸린 줄 아시우?” 잠시 후 아내가 삶은 계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오자 남편이 말했다.

“왜 소금은 안 갖고 와? 그러기에 내가 적어 가라고 했잖아.”

이쯤 되면 부부 중 누가 더 건망증이 심한지 모르겠다. 고령화 시대가 본격화 되면 이런 사례는 허다할 것이며, 장수가 최고 축복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고 말 것이다. 고령화 시대에 가장 두려운 것은 치매이다. 주위에 치매 환자가 날로 늘어나니 누군들 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총기 좋다는 말을 듣던 나도 언제부턴가 깜박깜박할 때가 있다. 혹시나 치매 초기 현상은 아닐까 싶어 후배 의사에게 치매 증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어떤 사실을 기억하지 못해도 힌트를 주면 금방 기억하는 사람은 건망증이고 그렇지 못하면 치매인데 선배님은 분명 건망증입니다.”라고 했다. 다행이다 싶어 마냥 기뻐하니 누군가가 옆에서 “건망증 환자라고 하는데도 그렇게 기쁩니까?” 라고 해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최근 건망증과 관련해 내가 겪은 몇 가지 사례다. 골프 라운딩 후 옷가방을 두고 집에 와서 택배로 받은 적이 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다. 골프를 마치고 그린피를 계산하지 않고 나왔는데 외부 식당에서 식사 중 생각이 났다. 카운터에 전화해 사실을 말한 후 송금하겠다고 하니 “일행 중 두 번 계산한 사람이 있으니 그분에게 주세요.”라며 이름을 알려 줬다. 그분은 부인이 계산하겠다고 했는데 깜박해서 또 계산했단다. 어째든 깜박하는 사람이 나 뿐만이 아니라 위로가 되었으며, 덕분에 내 실수는 묻혀 버리고 그분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까지 들었다.

사례는 그뿐만이 아니다. 지인들의 이름이 왜 그리도 잘 기억나지 않는지 어이없을 때가 많다. 손에 들었던 물건을 어디든 잠시 놓는 순간이면 이미 내 것이 아닌 경우도 잦다. 외출 시 마스크를 챙겨 놓고도 그냥 나와 돌아간 적은 한 두 번이 아니다. 요즘은 현관문에 ‘마스크!’ 라고 크게 써서 붙여 놓았다.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지나친 적은 수도 없다. 얼마 전에는 환승역을 지나갔는데 되돌아오면서 그 역을 또 지나친 적도 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핸드폰을 보다가 일어난 일이라고 스스로 위안했지만 건망증과 영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루에도 여러 번 누르는 아파트 출입문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아내에게 전화한 적도 있다. “당신 치매에요?”라는 말에 뭐라고 변명 한마디 하지 못했다.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 핸드폰 메모장에 비밀번호를 저장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을 때는 천개가 넘는 등록번호 중에서 기억나는 번호가 하나도 없었으며 아내와 자식들 전화번호까지도 긴가민가했다.

하루는 아내가 외출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삼치를 한 냄비 지져놓고 상할지 모르니 꼭 데워서 먹으라고 했다. 저녁 먹을 시간쯤 되어 아내가 전화를 했다. 삼치를 데울 때 불끄기 전에는 절대 가스레인지를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 일로 일부러 전화하느냐며 짜증을 냈더니 숱한 경험자로서 하는 충고이니 명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레인지에 불을 붙인 후 저녁상을 차렸다.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치우려는데 어디서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레인지 쪽을 보니 연기가 자욱하다. 급히 달려가 불을 끄고 나니 삼치는 완전 숯덩이가 되었다. 좋아하는 삼치를 먹지 못한 것은 감내할 수 있으나 까맣게 탄 냄비를 씻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고희를 넘어서 건망증으로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100세 시대이다. 만약 나도 백수를 산다면 앞으로 30년을 더 버티어야 한다. 어찌 정신 건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요즘 연세 든 분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느냐가 관건이다.’라고 한다. 무심코 지나쳐들었던 그 말이 요즘은 가슴에 와 닿는다.

전문의 진단 없이도 치매와 건망증을 구분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단다. 골프 칠 때 마지막에 퍼팅한 후 깃발을 홀에 꽂지 않고 나오면 건망증이고 깃발을 손에 들고 나오면 치매라고 한다. 그리고 비자금을 은밀한 곳에 감춰 놓고 둔 곳을 찾지 못하면 건망증이고, 비자금 관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면 치매란다. 물론 에피소드겠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두 사례를 내게 대입시켜 보니 아직 치매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어떤 책에서 본 건망증에 대한 해석이다. 나이든 후에도 젊을 때처럼 온갖 기억을 다하면 정신력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나는 ‘뇌기능의 자동 조절 현상’이라 했다. 그렇다면 노후의 망각은 걱정이나 저주할 일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말이 아닌가? 앞으로 어떤 건망증이 작동하더라도 기꺼이 감수하며 살리라.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이사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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