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②] 이진룡 장군과 우씨 부인 의열비: 중국의 촌민조차 위대한 정신을 기억하다
[아! 만주②] 이진룡 장군과 우씨 부인 의열비: 중국의 촌민조차 위대한 정신을 기억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1.10.1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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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이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이진룡 장군과 우씨 부인 의열비

이진룡(李鎭龍, 1879~1918)은 황해도 평산군의 유림 가문에서 태어났다. 6살 때 당대 대유학자인 유인석의 문하에서 수학할 정도로 영특했다. 훈련원 판관을 지내며 유인석의 문하이기도 했던 우병렬은 이진룡의 특출한 재주와 성품에 매료되어 그를 사위로 삼을 정도였다. 우병렬은 자신의 큰딸을 불과 15살인 이진룡에게 시집보냈다.

이진룡은 을사늑약 후 고향인 평산군에서 장인 우병렬을 비롯하여 조맹선, 박장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참여한 의병 수가 4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에 일제는 탄압부대를 편성하여 의병 압살에 박차를 가했다. 수많은 전투에서 의병의 피해가 속출했다. 더욱이 일제는 이진룡에게 현상금까지 걸며 토벌 공세를 강화했다. 이진룡은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때마침 유인석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를 새로운 해외독립기지로 모색하고 있었다. 1908년 8월, 이진룡은 신식무기 확보 및 해외기지 건설을 위해 유인석을 좇았다. 그리고 러시아 연추에서 최재형, 이범윤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1년 말, 또다시 일제의 대토벌에 직면했다. 이에 이진룡은 간도지역인 관전현 청산구로 철수했다. 이곳에서 한인 이주민 4천인 대회 결성, 민족주의 교육 활동, 포수단 중심의 독립군 양성, 국내 진공 작전 등을 펼치며 국권회복을 위한 전초 비밀근거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 무렵, 이진룡은 안중근과 인연을 쌓기도 했다. 관동도독부고등법원 심문조사에 따르면, 안중근은 “이진룡으로부터 100원을 빌려 가자고 왔다. 그 돈이 없었다면 이 일이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답하고 있다. 이진룡이 안중근의 의거를 지원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또한 해동씨(海東氏)의 『의암유선생약사(毅庵柳先生略史)』의 기록을 통해, 안중근이 이토를 격살할 때 사용했던 권총이 원래 이진룡이 지니고 있었던 것임도 확인할 수 있다.

이진룡 장군 기념원 전경
이진룡 장군 기념원 전경

그러나 의병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하여 이진룡은 조맹선, 전성규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마침 동양합동금광회사에서 현금 7만원을 송금 마차에 싣고 평양에서 운산 북진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916년 10월5일, 이진룡이 이끄는 7명의 의병대는 밀림 속에 잠복하고 있다가 송금 마차를 기습했다. 일본 순사 1명을 포함하여 6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호송대의 위장술로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진룡은 운산송금마차 습격사건으로 일제의 끈질긴 추적을 당했다. 일제는 이진룡을 ‘폭도두목’, ‘폭도수령’, ‘적괴’, ‘수괴’ 등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신변을 숨긴 채 산촌에 잠복한 이진룡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이진룡은 붙임성이 좋아 중국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동정심도 강해 이웃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발을 벗고 나섰다. 이진룡의 의병부대가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전개할 수 있었던 비결도 촌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굳은 연계성 때문이었다.

반면에 일제는 끄나풀을 이용했다. 일제는 한인 주구(走狗) 임곡을 매수하여 3년에 걸쳐 이진룡의 행적을 추적했다. 결국 임곡은 1917년 5월25일 관전현 청산구 석가구에서 이진룡을 발견했다. 중국인 류계홍(劉桂洪)이 상을 당하자 일손을 돕고 술을 마신 채 잠든 상태였다.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쳐 이진룡을 체포했다. 이진룡은 과거 세 차례 체포된 바 있는데 그때마다 탈출했기 때문에 일본 헌병대는 극악한 방법으로 포박했다. 팔과 다리를 부러뜨리고 쇄골 빗장뼈를 철사로 꿰매 묶어 평양형무소로 연행했다.

이진룡은 재판 과정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직업을 묻는 일경의 심문에 “왜적을 토멸하여 나라를 구함이 업이다.”라고 답할 정도였다. 그렇게 1917년 12월 25일, 사형을 언도 받았다. 하지만 상고하지 않았다. 결국 이진룡은 1918년 5월 1일 평양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이진룡이 순국했다는 비보를 접한 우씨 부인도 곧바로 죽음을 택했다. 우씨는 자결을 결심하고 부친 우병렬과 의논했다. 우병렬은 딸의 자결 결심이 굳건함을 알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진룡 장군 기념원 개보수 작업
이진룡 장군 기념원 개보수 작업

朝鮮義士李公鎭龍 조선 의사 이진룡은
烈婦禹氏竝同取熊 열부 우씨와 빛나는 업적을 남겼네
夫爲國死文山之忠 남편은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文山(문산)의 충성이며
婦爲夫殉洪室之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순절했으니 洪室(홍실)의 가풍일세
日沈月升洪鳳凰翔 해 지고 달이 떠오르니 봉황이 하늘을 날듯
忠烈相資吾道之光 부부의 충과 열이 서로 함께 하니 우리 정신의 빛이라
(이진룡 장군과 우씨 부인 의열비 비문)

우씨 부인의 순절에 감동한 청산구 촌민들은 우씨의 장례를 정성껏 치르고 자루골에 안장했다. 그리고 1919년 3월에 청산구 촌민들이 소아하 강변 은광자촌 석가구 언덕에 의열비(義烈碑)를 세웠다. 이후 2018년 이진룡 순국 100주년을 기해 요녕성 동북항일연군 및 항일전쟁연구소, 요동항일영렬연구실, 한중교류문화원, 이진룡의 유가족 등이 협력하여 관전만족자치현청산구 은광자촌 소야하 기슭에 이진룡장군기념원을 복원했다.

그리고 이후 해마다 인근 중국 한족학교에서 이진룡컵 백일장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중국인조차 이진룡의 위대한 행적과 정신에 감복하여 그를 칭송하며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2020년에는 한중교류문화원과 국가보훈처가 우씨 부인의 묘소를 단장하는 한편, 의열비의 기단을 높이는 개보수를 통해 그들의 숭고한 정신이 더욱 높이 선양되기를 바랐다.

이진룡 장군과 우씨 부인 청명절 추모제
이진룡 장군과 우씨 부인 청명절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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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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