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69] 루스벨트 VS 루스벨트
[유주열의 동북아談說-69] 루스벨트 VS 루스벨트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1.11.1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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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미국 뉴욕 소재 대학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당시 미국 대학에서는 브라운 백 런치 모임이 유행했다. 점심시간에 누구나 격식 없이 세미나실에 모여 각자 갈색 봉지에 싸 가지고 온 햄버거 등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면서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발표(presentation)하거나 토론하면서 런치와 배움(lunch-and-learn)의 기회가 주어져 재미있었다고 기억된다.

어느 때인가 ‘루스벨트가(家)와 동아시아’라는 주제로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르는 두 명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마침 현지 뉴욕 출신이라 친밀감을 느꼈는데 두 대통령의 동아시아 정책으로 우리나라가 지도에서 사라지기도 했고 부활하기도 한 묘한 인연에 관심이 커졌다.

주말에는 지리를 익히기 위해 맨해튼섬을 중심으로 롱아일랜드 등 뉴욕시 주변을 돌아다녔다. 1524년 이곳을 처음 발견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조반니 베라차노는 “뉴앙굴렘”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후원자 프랑소아 1세가 왕이 되기 전 앙굴렘 백작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소아 1세는 “뉴앙굴렘”보다 자크 카르티에가 이끄는 캐나다 탐험단에 관심을 가지고 신대륙에 뉴프랑스 건설에 열중하는 사이 1626년 네덜란드는 인디언으로부터 24불에 상당하는 유리구슬로 맨해튼 섬을 구입해 “뉴암스테르담”이라고 이름지었다.

현재 뉴욕시의 문장에는 네덜란드 상인과 인디언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무렵 네덜란드에서 “뉴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사람 중에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가 있었다. 수십년 후 뉴암스테르담은 영국에 의해 점령되고 국왕 찰스 2세 동생 요크공에게 기증돼 “뉴욕”으로 개명, 영국의 식민지에 편입되자 클라에스의 아들 니콜러스는 ‘장미들판’이라는 뜻을 가진 로센펠트를 영국식으로 ‘루스벨트’로 바꾸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니콜러스의 장남 요하네스는 롱아일랜드 서쪽 오이스터베이에 자리 잡고 차남 야코부스는 바다보다 강을 좋아해 맨해튼 북쪽 허드슨강 중류 하이드파크에 정착했다.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는 오이스터베이의 요하네스 5대손이고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는 하이드파크의 야코부스 5대손이다. 나이는 24세 차이가 나지만 두 대통령은 12촌 형제가 된다.

씩씩한 카우보이 대통령으로 알려진 시어도어는 천식을 앓는 병약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의 부모는 체력단련을 위해 수시로 야외활동을 시켜 시어도어는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본가가 있는 뉴욕으로 돌아와 컬럼비아 대학의 로스쿨에 입학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시어도어는 1882년 로스쿨을 중퇴하고 공화당에 입당 뉴욕주의회 의원으로 당선, 정치에 입문했다. 미국을 방문한 대한제국의 보빙사 일행이 뉴욕의 5번가 호텔에서 아서 대통령에게 엎드려 큰절을 올려 화제가 된 것도 이 무렵(1883년)이었다.

시어도어가 26세 되던 1884년은 잊을 수 없는 해였다. 그해 2월 어머니가 사망한 후 몇 시간 안 돼 부인이 딸 앨리스를 출산한 후 사망했다. 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부인마저 동시에 세상을 떠나자 인생이 끝난 듯 멘붕에 빠진 시어도어는 앨리스를 여동생에게 맡기고 다코타주의 가족 목장으로 도피 2년간의 카우보이 생활로 슬픔을 달랬다. 그 후 심기일전 뉴욕으로 돌아와 재혼과 함께 정치인으로 새출발한다.

시어도어는 맥킨리 대통령 내각의 해군차관으로 발탁된 후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의 만류를 물리치고 차관직을 사직하고 의용기병대를 조직 직접 전쟁에 참가했다. 쿠바에서 전공을 세우고 국민적 영웅으로 복귀해 뉴욕주지사를 거쳐 1900년 맥킨리 대통령의 재선에 러닝메이트(부통령)로 당선된다. 1901년 대통령 취임 직후 맥킨리 대통령이 괴한의 총탄에 암살되자 시어도어는 대통령직을 승계, 42세의 최연소 대통령이 됐다.

시어도어는 바다를 지배해야 국력을 키울 수 있다는 해양력(sea power)을 강조한 전략지정학자 앨프리드 머핸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해군력 증대에 집중했다. 1904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면서 국력을 키우고 보다 적극적으로 해양진출에 나서게 된다. “말은 부드럽게 하면서도 큰 몽둥이를 들고(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그의 좌우명이 됐다. 시어도어는 이른바 ‘큰 몽둥이 외교(Big Stick Diplomacy)’를 통해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고 태평양으로 진출했다.

1905년 7월 육군장관 윌리암 태프트를 단장으로 하는 동아시아 순방단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했다. 시어도어는 태어나서 이틀 후 엄마를 잃은 장녀 앨리스를 포함시켜 약혼녀 니콜러스 롱워스 하원의원과 동행토록 했다. 첫 기항지는 하와이 호놀룰루였다. 하와이 거주 교민들은 시어도어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하면서 순방단의 장도를 축하했다. 순방단의 태프트 장관의 주선으로 이승만은 고종 황제의 특사 자격으로 하와이 교민 회장과 함께 뉴욕의 오이스터베이에 있는 사가모어힐의 사저로 대통령을 찾아갔다. 러일전쟁 후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여 있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미국이 지켜줄 것을 청원했다.

순방단은 일본의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일본에서는 가쓰라 총리와 비밀회담이 예정돼 있었다. 시어도어는 가쓰라 태프트 비밀회담을 통해 필리핀의 안전을 위해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밀약(비망록)을 승인했다.

일본 방문을 끝낸 순방단은 필리핀, 홍콩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태프트 단장은 미국으로 귀국했으나 나머지 순방단은 고종 황제의 특별초청을 받아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미일 간의 비밀 약속을 알 리 없는 고종 황제는 시어도어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황제 전용열차를 인천에 보냈고 앨리스 일행을 위해 황제가 친히 오찬연을 베풀었다.

그 무렵 뉴햄프셔주의 포츠머스에서는 시어도어의 중재 하에 러일전쟁 강화조약이 체결돼 일본은 미국의 묵인하에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권을 인정받고 그해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러시아 남하로 태평양의 안전을 우려한 시어도어가 일본을 지원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운명은 끝나게 됐다. 시어도어는 이듬해 노벨평화상의 수상자가 된다.

시어도어의 대외정책은 국익을 위해서는 약한자를 과감히 버리는 힘의 외교로 성공한 듯했으나 국내에 있어서는 독점금지 정책으로 공화당 보수파의 반발을 사서 재선을 포기했다. 친구이자 심복인 윌리암 태프트에게 자신의 정책을 이어줄 것을 당부하고 그의 당선을 도왔다. 대통령이 된 태프트가 자신을 실망시킨 것을 안 시어도어는 1912년 대선에서 공화당을 탈당 진보혁신당을 창당 입후보했다.

선거 캠페인 도중 군중으로부터 총격을 받았으나 양복 안주머니의 연설 원고가 막아주어 생명을 구했다. 이러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의 양분으로 어부지리를 얻은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후보가 당선됐다. 정치에 꿈을 버리지 않은 시어도어는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워런 하딩을 러닝 메이트로 지명, 1920년 대선을 준비하고는 건강이 악화돼 1919년 1월 사가모어힐 사저에서 수면 중 사망했다.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54세의 아버지가 재혼한 젊은 부인에서 태어났다. 프랭클린이 태어났을 때 이복형의 아들(조카)이 프랭클린보다 이미 3세 연상이었다. 프랭클린의 젊은 어머니 사라는 프랑스계 개신교(위그노) 출신으로 델러노 가문의 부잣집 따님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아편 등 중국과의 무역으로 큰돈을 벌어 고향에 방대한 토지를 구입하는 등 소문난 부호였다. 어머니도 외삼촌과 함께 어릴 때 홍콩에 거주한 경험이 있어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란 프랭클린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를 특별히 고려하는 친중파가 된 것도 외가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마보이였던 프랭클린은 어머니의 지도하에 홈스쿨링과 명문 사립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 진학했다. 그 후 롤 모델인 시어도어처럼 뉴욕으로 돌아와 컬럼비아 로스쿨에 입학했다. 프랭클린은 루스벨트가 집안 모임에서 만난 엘리너를 사랑하게 된다. 엘리너는 시어도어의 동생 엘리엇의 딸로 촌수로는 13촌 조카 뻘이다. 1905년 3월 성 패트릭 축일에 거행된 결혼식에 시어도어가 현직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요절한 동생을 대신해 조카딸 엘리너의 팔짱을 끼고 입장했다.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프랭클린이 월가의 기업변호사로 활동한 후 고향 하이드파크를 지역구로 하는 민주당의 뉴욕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오이스터베이의 큰집은 공화당이지만 하이드파크의 작은집은 민주당이었다. 프랭클린의 정치운은 활짝 열리는 듯했다. 윌슨 대통령 내각의 해군차관으로 영입되더니 1920년 38세의 나이로 윌슨 대통령을 이은 민주당의 오하이오주 제임스 콕스 지사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으나 공화당의 워런 하딩 후보에 패배했다.

프랭클린에게 정치적 역경이 찾아왔다. 대선 패배 후 여름별장에서 차가운 바닷물 수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소아마비에 걸렸다. 당시 상황에서 휠체어를 타고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프랭클린은 정계은퇴를 고민했으나 가족의 헌신으로 재활치료와 훈련을 통해 휠체어 정치인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프랭클린의 정치운은 다시 열려 1928년 뉴욕주지사에 당선되고 193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대공황으로 고통받는 국민들에게 국가주도 뉴딜정책을 선언 현직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프랭클린은 뉴딜정책을 통해 경제회복과 함께 복지정책을 성공시켜 1936년 재선에도 성공했다. 그의 뉴딜정책은 미국이 사회개혁을 통해 자본주의를 한 단계 격상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럽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으나 미국의 여론은 참전을 꺼리고 있었다. 1939년 6월 미국의 지원이 필요한 영국의 조지 6세가 찾아와 프랭클린은 자신의 사저가 있는 하이드파크로 초대했다. 엘리너는 국왕 내외의 오찬에 국민 음식 핫도그를 차려냈다. 한적한 미국의 전형적인 시골마을에서 핫도그를 먹는 국왕 내외의 서민적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자 미국민의 영국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고 여론이 바뀌기 시작했다. 조지 6세 내외가 먹은 핫도그가 2차 세계대전의 승기를 마련한 셈이다.

1943년 11월 프랭클린은 처칠 및 장제스와 함께 한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에 대해 자유독립 국가 승인을 결의한다. 40년 전 시어도어가 태평양의 안전을 위해 일본을 지지하고 대한제국을 희생시켰으나 프랭클린에게는 태평양의 안전을 오히려 교란하는 일본은 꺾어야 할 적이었다. 1945년 4월 프랭클린은 독일과 일본의 항복을 눈앞에 두고 조지아주 별장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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