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㉑] 함께 일어서는 환경을 조성하다- 우승훈 지구촌나눔운동 해외사업팀 과장
[아프로㉑] 함께 일어서는 환경을 조성하다- 우승훈 지구촌나눔운동 해외사업팀 과장
  • 우승훈(지구촌나눔운동 해외사업팀 과장)
  • 승인 2021.11.26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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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지구촌나눔운동 해외사업팀 우승훈 과장이 생애 첫발을 디딘 외국은 케냐였다. 평생 한 번 가기 힘든 아프리카대륙이 그에게 첫 해외 여행지가 된 배경에는 대학생 때 차곡차곡 쌓아온 봉사활동이 있었다. 우승훈 과장은 우연한 기회에 농촌활동에 참여하여 이타적 삶이 주는 행복감을 맛봤다. 그 후 자진하여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친 우승훈 과장은 그 경력을 내세워 해외봉사단에 지원했고, 이를 계기로 쭉 아프리카를 지향하는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심층적인 공부를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지구촌나눔운동의 르완다 사무소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한 우승훈 과장은 현재 서울에 있는 본부로 옮겨 케냐, 에티오피아, 르완다 사무소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진한 아쉬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여전히 관련 분야에 몸담고 있는 이유는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대안을 찾는 여정에 그가 지원하는 아프리카 사무소들의 현지인 책임자들과 한국 본부에 마음 맞는 동료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현지인 책임자들을 잘 지원했을 때 해당 사업이 그 지역사회에 성공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고 지속가능해지리라고 믿는다. 또한, 우승훈 과장은 전 세계가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많은 사회·경제·환경적 위기들을 아프리카대륙이 한발 앞서서 먼저 겪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아프리카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우리 함께 관심을 기울이고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학 시절 봉사활동이 맺어준 아프리카와의 인연

대학생 때 농촌활동을 활발히 다녔다. 대단한 포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선배들이 간다고 하기에 자연스럽게 따라다녔다. 단순히 농사일만 돕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고민을 듣고 그들의 목소리에 작게나마 힘을 보탰다. 그 과정에서 다른 환경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사소하더라도 내가 그들에게 보탬이 되는 존재라는 사실에 가슴 한편이 부풀어 올랐다. 방학 때 혼자 소록도를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한센인들은 우리와 외모가 조금 다를 뿐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다를 게 전혀 없었다. 함께 생활하며 친근감을 느꼈고, 그들의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일이 보람찼다. 2011년 한 오픈마켓에서 해외봉사단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을 때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는 기회일 수 있다는 예감이 퍼뜩 들었다.

지구촌나눔운동 르완다 자조그룹

특히 여러 경로로 봉사활동을 이어온 내 경험이 긍정적으로 검토되리라 기대했다. 그때 봉사단을 파견하는 지역은 아프리카국가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베트남과 인도 같은 아시아 국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케냐로 향하는 봉사단의 일원이 되었고, 당시엔 케냐여서 좋았다기보다는 내심 이왕 갈 거면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던 터라 흡족한 정도였다. 그전까지는 사실 아프리카에 관심이 없었고 그만큼 무지했다. 오히려 케냐로 배정받은 후 정보를 찾느라 인터넷을 기웃거리다가 막연한 선입견이 생겼다. 한글로 검색했을 때 도출되는 결과들이 질병, 기아, 내전 등의 부정적인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첫 해외여행 아니던가. 덜컥 두려운 마음이 앞섰지만, 이 여정을 함께하는 20명의 봉사단원과 인솔자가 있어 불안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두려움과 설렘이 뒤엉켜 머릿속이 복잡한 채로 케냐로 향했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Nairobi)에 있는 슬럼에서 일주일간 활동한 후 남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나망가(Namanga)의 마사이(Maasai) 지역에 있는 학교로 이동, 나머지 일주일을 보냈다. 처음 발 디딘 외국인 데다 그곳이 멀고도 낯선 아프리카의 대도시와 시골이었음에도 큰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가 처음으로 농촌활동을 갔을 때 느꼈던 낯선 감정 정도였다. 오히려 소소한 차이를 발견하고 관찰하는 일이 즐거웠다. 특히 농촌활동을 통해 살아온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서 오는 배움과 즐거움을 이미 경험했었기에 케냐에서도 서로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2주는 짧아도 너무 짧았다. 나는 아프리카대륙에 무한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안고 돌아왔다.

무엇보다도 케냐에서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서울에 돌아와 다시 바쁜 학교생활을 하는 와중에 문뜩문뜩 케냐 생각이 났다. 그전까지 동경한 적도 없는 곳을 고작 2주간 다녀왔을 뿐인데 어떤 강렬한 힘이 나를 이끄는 듯했다. 그때쯤 한 국제개발협력NGO의 인턴십 공고를 봤다. 케냐의 이웃 나라인 탄자니아의 다레살람(Dar es Salaam)이라는 대도시 외곽에 있는 빈민가의 여성들을 위한 직업 학교에서 일할 기회였다. 나는 케냐가 그리웠지만, 언어와 문화가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는 탄자니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해서 지원했고, 1년 동안 탄자니아에 머물게 되었다.

케냐 단기봉사

내가 파견된 기관은 지역의 여성들에게 재봉과 염색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학교로, 처음 도착했을 땐 사업장 책임자인 프로젝트 매니저를 포함한 모든 직원이 현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일한 한국인인 나는 그곳에서 주로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했다. 한국에 있는 본부와 매니저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매니저와 선생님, 학생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끔 지원하는 일을 했다. 또 외부인이기에 보이는 사무소 내부의 자원과 잠재력을 발견하고 흩어져 있는 정보나 활동 등을 연결하는 일을 도맡았다. 내가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주도하거나 변화를 이끄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쉽고 답답했다기보다 오히려 더 적성에 잘 맞는 느낌을 받았다. 성향상 앞에 나서기보다 오히려 곁이나 뒤를 지키며 그들을 묵묵히 돕는 일이 더 즐거웠다.

더 깊이 알아가기 위해 오른 유학길

탄자니아에 1년 있으며 그제야 아프리카가 어떤 대륙인지 아주 조금 감이 오기 시작했다. 알듯 말 듯할 때 더 안달이 나듯 아프리카가 더 궁금해졌다. 하지만 국내에서 생산되는 아프리카 관련 자료들로는 내 지적 호기심을 다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블로그를 개설해 자료를 취합하고 스스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큰 역할은 아니지만, 탄자니아에서 활동하며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꾸준히 기록하면 그 결과물이 언젠가 정보가 되리라 믿었다. 그런데 경험과 생각을 글로 정리하려고 들수록 오히려 한계에 부딪히는 듯했다. 내가 가진 배경지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리카대륙을 더욱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졌다. 서울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열심히 돈을 모아 2016년 비로소 유학길에 올랐다.

영국 브래드포드 대학(University of Bradford)의 아프리카평화갈등학(African Peace and Conflict Studies) 석사 과정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국제개발협력 분야에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기에 국제개발학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탄자니아에 있을 때 국제개발협력과 관련해 아쉬운 점이 많았다. 현지에서 탄자니아 사람들과 일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 외 한국과 현지의 불평등한 관계, 현지 맥락에 대한 몰이해, 자극적인 모금 홍보 방식 등이 내가 하는 일에 회의감이 들게 했다. 내가 탄자니아에 있어 행복한 이유는 탄자니아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 오늘과 미래를 보는 것이었다. 학자로서 공부를 열심히 해 아프리카 사람들이 일군 사회나 삶을 조금 더 전문적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을 한다면 더 행복하고 의미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애초에 유학을 결심했고, 아프리카학을 염두에 뒀다. 하지만 아프리카학은 들여다볼수록 인류학에 가까웠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내게는 낯선 분야였다. 그래서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아프리카평화갈등학이었다. 일종의 사회과학이며 내가 여태껏 관여해온 일과도 맥락이 비슷해 보였다. 특히 신생 학문이다 보니 연구 분야를 한정 짓지 않고 분쟁과 평화 등의 현상을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다차원적으로 보고 분석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당시 같은 과정에는 현장 경험을 가진 아프리카와 유럽 학생들이 많았고,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한국인이 영국까지 와서 아프리카를 공부한다는 사실에 의아해하기보다 오히려 식민통치와 빈곤, 그리고 내전을 경험한 한국의 맥락과 아프리카 연구를 연결하며 관심을 보였다. 내 입장에서도 이러한 연결고리를 통해 다양한 생각을 나누고 수업에 참여할 수 있어 기뻤다.

내가 이해한 평화갈등학에는 국제관계에 대한 현실주의(realism) 관점과 개발주의(developmentalism) 등 국제개발협력의 주류 관점을 비판하는 태도가 저변에 깔려 있다. 경험을 통해 국제개발협력에 막연한 아쉬움을 품고 있던 나는 체계화된 공부를 통해 실질적인 문제점을 비로소 직시했다. 앞선 경험에서 검증된 모델일지라도 막상 다른 상황에 적용해보면 지역과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값이 도출된다는 사실을 여러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특정 모델을 만들어 그것을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또한, 지구가 더 이상의 ‘개발’을 버텨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들었다.

그때부터 대안적인 발전 모델을 고민하며 더 열린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자마자 지금 소속된 기관에서 르완다 사무소의 프로젝트 매니저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학문적으로 고민하고 구상한 내용을 현장에서 실천해 볼 절호의 기회였다. 주저하지 않고 지원한 나는 영국에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다시 삶의 여장을 꾸려 르완다로 향했다. 사실 그때까지 르완다는 한 번도 고려해본 지역이 아니었다. 르완다와 관련한 배경지식은 1994년 일어난 르완다 제노사이드(genocide)가 전부였다. 그런데 내 눈에 르완다 정부가 어쩐지 이 중차대한 사건을 자국의 국민에게 하나의 관점으로 바라보길 강요하는 듯 보였다. 조금이라도 의구심이 들면 묻고 토론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채집하기를 즐기는 내가 과연 르완다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하지만 르완다의 첫인상은 특별했다.

탄자니아 송별회 

탄자니아의 복잡한 대도시 생활에선 느끼지 못했던 안도감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여러 위험 요소를 견제하느라 더는 긴장하지 않아도 됐다. 물론 현재 상황에도 복잡한 맥락이 있지만, 인류의 비극이었던 제노사이드의 상흔을 딛고 일궈낸 평화로운 사회의 모습은 일단 마음을 놓기엔 충분했다. 또한, 르완다에서 지내며 4월마다 진행되는 추모 행사에 참여해 지역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그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너무도 끔찍한 비극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이 사건을 정치공학적으로만, 외국인의 시각으로만 바라본 내가 새삼 부끄러웠다. 추모 기간을 함께 지내며 나는 르완다라는 사회를 비로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됐다.

더 넓은 포용으로 나아가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르완다 사무소는 수도 키갈리(Kigali)에서 꼬불꼬불한 도로를 약 한 시간여 넘게 가야 도착할 수 있는 농촌 한복판에 있었다. 르완다는 국력과 경제력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데 비해 농촌사회의 안전망은 잘 갖춰져 있지 않아 주민들이 자연재해나 질병과 같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주민들이 중심이 되는 저축모임을 조직하여 상부상조하며 공동체 내 사회적 안전망을 형성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나아가 공동으로 모은 목돈을 밑천 삼아 조금 더 큰 단위의 프로젝트나 공동 농업 등을 실시해 더 안정적인 소득을 얻도록 장려했다. 우리는 이를 자조그룹(self-help group)이라고 불렀다. 이미 3년간 진행된 1단계 사업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점에서 매니저로 투입되었고, 2단계 사업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당시 내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이 안전망이 절실하게 필요한 최취약계층에 기회를 주는 일이었다.

우리는 1단계 사업 과정에서 저축을 중심으로 하는 자조그룹의 참여자들이 저축할 여유가 없는 사람을 구성원으로 환영하리라 기대하는 일은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축할 여유가 없는 당사자도 스스로 할 수 없으리라고 단정 짓고 애초에 포기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번엔 새로운 자조그룹을 만드는 과정에 사업소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그룹을 구성하는 일은 여전히 주민 자치의 영역이었지만, 그 과정에 우리가 일부 개입하여 신청자들의 경제 상황을 파악하고 누구에게 자조그룹 활동이 더 필요한지, 그리고 사회관계망 분석을 통해 그룹을 조직했을 때 어떤 어려움이 생길 수 있을지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기존의 구성원들에게 더 어려운 사람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르완다 자조그룹 공동 농업 사진

사업소 내부적으로는 직원들의 역량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나는 처음부터 이 사업을 주도하고 싶지 않았다. 기존에 있던 직원들이 나보다 더 경험이 많고 이 지역에 평생 뿌리내리고 살아왔으며 또 살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많은 결정권을 현지 직원에게 내줬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들은 내가 결정 내려주기를 바라거나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을 어려워했다. 나도 사실 힘들었다. 새로운 안을 기획할 때면 내게도 머릿속에 그린 그림이 있었고 그것을 구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참고 기다렸다. 마지막에는 직원들이 내놓은 안이 내 생각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훌륭하여 만족스러웠다. 그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 선택이 맞았음에 안도했다.

내가 서울에 있는 본부로 돌아옴에 따라 나와 함께 일한 현지인 직원이 르완다 사무소의 프로젝트 매니저가 됐다. 그 직원이 사업을 주도하며 훌륭히 역할을 해내는 모습을 볼 때면 내심 뿌듯하다. 특히 요즘에는 오히려 빠른 일 처리를 요구하며 본부에 있는 나를 들들 볶는다. 또 본부에 역으로 새로운 사업안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펼치고 있다. 사실 나는 현지에서의 계약이 끝나면 국제개발협력 분야가 아닌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본부 해외사업팀으로 들어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관리하고 지원하는 동아프리카 3국 즉, 케냐, 에티오피아, 르완다 사무소의 최고 책임자가 모두 현지인이라는 점이었다. 탄자니아와 르완다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 사무소를 지원한다면 진정한 현지화에 성공하리라는 기대감을 안고 일하고 있다.

함께 일어서는 힘, 자립을 목도하다

사실 자조그룹처럼 주민의 자립을 목표로 하는 사업은 그 성과나 효과를 가시화하기 어렵다. 그런데 나는 그 성과를 눈으로 봤다고 확신한 순간이 있었다. 작년 르완다에 출장 갔을 때의 일이었다. 마흔 개에 달하는 자조그룹 지도자들이 모여 매년 기금을 모아 취약한 이웃을 돕자고 결의했다. 우리가 특별히 권한 적 없는 활동이었다. 그해에는 혼자서 대가족을 건사하는 할머니에게 집을 지어주기로 했다며 공사 현장에 나를 초대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40명이 넘는 참여자들이 모여 어려운 이웃을 위해 땀 흘리고 있었다. 나는 이 활동을 이끌어 온 한 자조그룹의 대표에게 ‘자립(르완다어로는 Kwigira-크위지라)’의 의미를 물었고, “공동체의 발전과 문제 해결을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렇듯 자립은 외롭게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기이며, 국제개발협력 활동가의 역할은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폭우로 집 일부가 무너진 어려운 이웃의 집을 수리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공동체의 문제를 고민하고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립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자조그룹의 1인당 저축액이 매년 꾸준히 늘고, 그 저축액을 종자돈 삼아 공동 사업을 추진해 건강보험료 완납이나 구성원 전원의 가축 구매 등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도 한다. 또 예전에는 급전이 필요할 때 집이나 소를 팔아 해결했다면 이제는 자조그룹 내에서 소액 대출을 받아 자산을 잃지 않고 당장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등 경제적 안정성이 생겼다.

여전히 거시적 관점에서 국제개발협력의 주류를 바라보면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들지만, 미시적으로 따져보면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는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업이나 연구를 하는 사람이 짧은 출장길에 기대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깊은 관계를 국제개발협력 업무를 하면 맺을 수 있다. 주민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다. 기회가 닿는다면 언젠가 아프리카 국가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 어차피 아프리카를 계속 연구할 거라면 아프리카 대륙 어디에선가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호흡하며 공부하고 싶다.

내가 국제개발협력에 몸담으며 만난 사람들의 작지만 중요한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싶다. 우리는 보통 아프리카의 미래상이 흔히 생각하는 선진국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내가 느끼기에 현재의 아프리카가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미래에 가깝다. 기후 위기, 자원 고갈, 도시화, 난민 문제 등 이제 전 세계가 심각하게 여기기 시작한 문제들을 현재 가장 먼저, 많이 겪고 있는 곳이 바로 아프리카대륙이다. 이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들에 성공적으로 대처한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본다. 아프리카 사람들과 함께 그들 앞에 산재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방향으로 접근한다면 우리에게도 값진 경험이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현시점에 아프리카 문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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