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2004년 10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사람이 있다. 일본 변호사 후세 다쓰지(1880~1953)가 그 사람이다. 1880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태어난 후세 다쓰지는 메이지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가 되면서 그는 약한 사람 돕기를 자신의 인생 목표로 삼았다. 특히 일본의 통치 아래 있던 조선인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는데, 법관이 되고 나서도 ‘조선 독립운동에 대하여 경의를 표함’이라는 논문을 써서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1919년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일본 도쿄에서의 2.8 독립선언으로 조선인 유학생들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후세 다쓰지는 기꺼이 이들의 변호인이 되어 “조선인들의 조선 독립 요구는 정당한 것이며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는 것 자체가 정의에 반(反)한다”고 법정에서 주장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조선인 유학생 변론을 자청한 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1923년 9월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일대에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 사망자 14만명, 이재민 340만명을 내는 참사가 발생, 일본 국내의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나갔다. 일본인들은 죽창과 낫을 들고 다니면서 조선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6천여 조선인이 희생을 당했다. 후세 다쓰지는 뜻있는 변호사들을 규합, ‘자유법조단’을 구성, 조선인들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보호하는 한편, 학살에 관련된 군경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후세 다쓰지는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쓴 조선인 박열과 그 동료들을 무료로 변론했다. 1926년에는 조선에 들어와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땅을 빼앗긴 농민들을 위한 토지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식민통치가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진행된 이들 재판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지만, 그러나 이 땅의 독립운동가와 농민들은 그래도 조선인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함께 싸워주는 변호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조선의 농민들은 후세 다쓰지를 ‘우리 변호사’라고 불렀다.
후세 다쓰지의 일련의 활동은 일본 지배세력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는 세 번이나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끝에 변호사 면허까지 취소당하는 정치 보복을 당해야 했다. 그가 변호사 면허를 되찾은 것은 1945년, 종전이 되고 나서 였다. 후세 다쓰지는 종전 후에도 재일조선인들이 벌이는 참정권 운동을 뒤에서 법률적으로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건국을 준비하고 있던 대한민국에 헌법 제정 등 일련의 입법과정에 필요한 법률 자료를 모아 전달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법률가로서 조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한 것은 일생에 걸친 그의 정의로운 투쟁에 대한 한국 국민의 존경의 표시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