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41] 캐나다동포 정해수의 고향 어머니 만남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41] 캐나다동포 정해수의 고향 어머니 만남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12.20 16:07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정해수와 고향 어머니

캐나다 정해수씨(89)의 이민초창기 황해도 고향방문 얘기다. 지난 1980년 9월 북한에 태권도(국제연맹)를 처음 소개할 당시 사진기자로 참여한 정 씨는 약 2주 시범단 일정이 모두 끝나자, 곧 고향방문 길에 나섰다. 마지막 원산 시범경기를 끝나고 평양에 올라온 직후였다.

그때 태권도 시범단 모두는 ‘평양시민 환영군중대회’(주관 허정숙 부수상)에 초청됐다. 정 씨만 당국이 마련해 준 벤츠로 군 인민위원장(군수) 안내아래 황해도 연백군(배천)으로 향했다.(해외손님은 주로 벤츠로 안내받던 시기로, 일본 토요타 차와 함께 활용된다.)

옛 눈에 익은 고향산천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는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랜 세월 고향길이 막혀 있는 것은 옆의 안내원 같은 ‘공산당’ 때문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마침 한 농가를 지날 때였다. 동네에서 전두환을 비방하는 확성기 소리가 크게 들리자, 안내원도 동조해 한마디 거들었다.

그때 정 씨는 참고 있던 화가 폭발했다. “아무리 전두환이 나쁘다 해도 그래도 남쪽에는 ‘자유’가 있소. 그런데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이 있다는 말이요?”하고 소리친 것이다. 안내원은 그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라며 “당신은 내가 이제까지 만난 사람들 중 최고 악질분자”라며 펄펄 뛰었다.

40대 중반 안내원은 “그동안 당신은 어디서 조국에 무슨 봉사를 했소? 전쟁 후 모두들 고향에서 엄청 고생하며 새 터전을 세울 때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이요?”라고 몰아세웠다. 정 씨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자각했다. 도중에 차를 세워 논가에 소변을 누고 돌아와, “자, 나도 고향 땅에 비료를 줬소”라고 말하며, 경솔한 자신 처신을 정중히 사과를 했다 한다.

북환 태권도 시범단과 함께 금강산 관광

근 30년 만에 어머니 만남을 안내하는 책임지도원에게 그가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정 씨 경우 진심이 통해 서로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실상 내가 아는 다른 해외이산가족 경우, 방북 후 안내원과 옥신각신하는 시비를 종종 보고, 들었다. 대개는 체류일정순서 문제로 인해 발생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북한당국이 다른 관광 등 일정을 먼저 진행시키기 때문이다. 보통 북의 치적 물(건축)이나 명소 등을 소개하고, 가족만남은 그 뒤 순서로 미루는 탓이다. 이 때문에 일부 성질 급한 이산가족은 안내원에게 “왜 가족들을 속히 안 만나게 해 주느냐?”고 독촉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평양안내원 입장에선 짜놓은 스케줄대로 진행시키는 것뿐이다. 안내원 마음대로 일정을 바꾸거나 정하지 않는다.

캐나다 이민초창기 방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70-80년대는 직접 고향을 방문해 가족을 만났다. 신청할 때 북한당국에 최소 방북 2주 전 시간을 둔 다음 가족을 만난다. 이는 북에서 미리 고향집과 주변 환경 등 필요한 보수작업을 준비하는 시간 때문이다. 북한 측으로선 그들 나름대로 고향에 대해 보다 좋은 인상을 보여주기 위한 성의로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이제 고향에서의 이산가족만남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아예 2013년 6월부터는 평양시 모란봉 구역에 이산가족 만남을 위해 ‘전문 가족면회소’를 만들어 놓았다. 명칭이 ‘평양시 모란봉면회자 숙소’다.

북한 평양 이산가족 면회소

2층 숙소건물 내에는 식당과 상점, 침실, 면담실 등이 있다. 1층 식당 홀에는 150명 인원수용이 가능해 연회와 결혼식도 할 수 있다. 화면노래반주 음악실 (노래방)도 2개 꾸며져 있다. 2층에는 침실 10개와 따로 면담실이 있다.

다시 정해수씨의 어머니만남 얘기로 돌아간다. 자동차가 고향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 환영인파가 보였다. 정작 어머니는 찾지 못했다. 모인 사람들은 30여명 친척과 동네사람 등이었다. 어머니는 아픈 몸이라 바깥출입을 못 했다. 방으로 뛰어들어 어머니 얼굴을 봤으나 금세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노인 얼굴을 붙잡고 왼쪽 코 옆의 큰 점부터 확인했어요. 틀림없는 어머니예요. 너무 오랜만의 만남이라 가슴만 벅차 눈물도 안 나왔다가 절로 눈물이 쏟아졌지요.” 당시 두 여동생은 47세의 정 씨보다 나이가 3살과 7살 어렸으나 더 늙어 있었다. “헤어질 때는 한창 청춘 시절 동생들인데 그간 고생이 너무 심했는지 많이 늙어 버렸어요”하고 말했다.

정 씨는 평양 올 때 잠시 묵었던 스톡홀름(스웨덴)에서 산 금반지를 어머니 손가락에 끼여 줬다. 기가 막히게 꼭 맞았다. 고향 집에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성묘를 하고 친척, 군 직원과 동네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2박3일간 꿈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내년에는 캐나다 가족을 데리고 함께 다시 오리라 마음먹었다.

정해수 부인 고향 성묘

캐나다 해밀턴 집에 돌아오면서 예상치 않던 수난을 겪었다. 그 시절 캐나다 도시는 북한 관련해 암울한 시대 속 ‘어둠의 도시’였다. 한 예로 캐나다 초창기 최초 한인의사(Dr.)인 황대연 박사가 졸은 본보기다. 황 박사는 교포사회 여러 단체에서 책임자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공개리에 북녘 고향을 다녀왔다 해서, 토론토한인회 이사장, 체육회 이사장 등 모든 공직을 내놓아야 했다.

정해수 씨 경우 해밀턴 메디컬 센터 엑스레이 주임기사일 뿐인데, 그를 향한 교포사회 눈길도 달갑지 않았다. 더구나 (지난 편 언급) 그의 병원 엑스레이 방에 걸린 북한 수예품 액자가 화근이 됐다. 하루아침 ‘백두산 풍경’액자가 ‘김일성 초상화’로 둔갑돼 비난의 중심에 선 것이다. 그에 대한 악의에 찬 루머는 그치지 않았고, 결국 교회까지 그만두게 만든 것이다.

정 씨는 해밀턴 한인연합교회 창립회원(집사)이었다. 한때 해밀턴 한인회 부회장과 6개월간 회장직무대리도 했다. 1976년 해밀턴 국제여자농구대회 때는 한국 김택수 체육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북 고향을 다녀온 후 그는 교포사회에서 ‘김일성숭배자’로 몰려, 오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평소 아는 지인은 그에게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교포신문에 내라고 강요했다. 대신 광고비는 내주겠다는 것이다. 이를 거부하자 한 과격인사 교인은 “교회에 얼씬도 하지 말라. 교회에 나오면 다칠 것이다”라고 위협했다. 한인사회에 실망한 그는 가정과 직장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내년 휴가 때는 가족을 동반해 고향을 방문키로 위안을 삼았다.

정해수 고향방문 음식

정 씨는 다음해 1981년 직장휴가 때 다시 북녘고향을 찾는다. 두 번째 방문에는 부인과 10세 딸을 대동했다. 늙은 어머니는 무척 기뻐했고, 동네 사람들은 따뜻한 눈길로 맞았다. “어머니는 첫 번 갔을 때는 병 때문에 문밖으로 못 나왔는데, 두 번째는 환영인파 속에 끼어 있었어요.” 북한당국에서는 아들이 온다고 의사를 파견하는 등 그간 어머니 병 치료 등 정성껏 돌봐줬다고 한다.

외아들의 고향방문으로 어머니 건강이 회복되고 거동이 자유로워졌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주변 관심과 도움이 컸다는 것이다. “아무튼 나를 만난 후 어머니 병이 거의 완쾌돼 그 후 7년을 더 사셨어요”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 가족을 보자 “이제 며느리와 손녀도 만났으니 한을 풀었다”고 무척 기뻐했다는 소식이다.

그는 캐나다로 돌아와 교포사회와는 별 접촉 없이 살았다. 북한고향을 다녀온 소수의 교포들과는 교류를 계속했다. 어느 주말 그의 집에서 몇 명 이산가족이 모였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북한 얘기 도중 의견다툼이 발생했다. “한 사람이 자꾸 이북자랑을 늘어놓는 거예요. 그래 듣다 못해 ‘이제 제발 좀 그만해둬요.’하고 목소리를 높였더니, 그게 말다툼이 되고 분위기가 깨져 버렸지요.”라고 말했다. 그 교포와는 그날 돌아갈 때까지 화해가 안 되고 불편한 마음인 채로 헤어졌다고 한다.

서너 달 뒤다. 정 씨는 고향 어머니로부터 질책의 편지를 받았다. “네가 어찌 조국의 막중한 은혜를 잊고 그럴 수 있느냐”는 꾸짖는 서한이다. 얼마 전 집에서 일어난 다툼을 누가 북에 밀고한 게 틀림없었다. 안 그래도 그간 어머니 편지 내용에 불만이 좀 있었다. 대부분이 ‘위대한 김일성 수령’ 운운한 정치색 소개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해수 황해도 고향집

그는 곧 어머니에게 “정치보다 집안소식 위주로 고향내용을 알려 달라”고 답장하고, 앞날 고향방문은 당분간 중단키로 했다. 더구나 당시는 북한 관련해선 혈육만남조차 부정적 시선이던 어두운 시대 환경이었다. 사면초가 입장인 정 씨는 일단 시간을 두고, 고향 땅을 밟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어머니 만난 경험담을 토론토 친북주간지 (뉴 코리아 타임스)에 기고했다. 그랬더니 생각지 못한 곳에서 초청이 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교포사회에서 그의 고향방문에 관심을 갖고 연락이 온 것이다. 정작 캐나다 현지에선 불순분자로 매도당하는 판국인데, 다른 해외에서는 그의 가족만남을 무척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초청 건은 직장에 매여 있어 무산됐다. 그는 병원 엑스레이 근무에만 매달리고, 틈나면 평소 익힌 서예공부에 전념했다.

나는 80년대 정 씨를 인터뷰하고 조선일보 책자에 글을 게재한 적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자유의식’이 철저히 몸에 배인 반공의 이산가족이다. 소위 빨갱이라는 친북교포들은 따로 있었다. 비록 극소수이긴 했지만 그중 한 명인 강 모 씨는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우리 김일성 주석님”이라고 말해 무척 놀란 적이 있다.

70-80년대 토론토에는 강 모 씨와 전충림(뉴코리아타임스 발행인)씨 두 명이 대표적인 친북 인사였다. 전 사장 경우도 빨갱이로 몰리긴 했지만 강 씨와는 차원이 달랐다. 친북신문사와 해외이산가족회를 만들어 이산가족들의 한을 풀어주는 고육지책이었는지 모른다. 북미, 남미 등지에서도 신청이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온 것을 안다.

정해수 씨 고향 안내 벤츠 차

강 씨는 개인 활동을 통해 북한선전을 했다. 북한에선 그들 2명을 캐나다 친북대표로 대우했다. 방북 후 김일성 주석과 촬영 시는 바로 옆자리에 사진(노동신문1면)을 찍었다. 다만 내가 이해 못 한 점은 두 사람 사이가 무척 나쁜 점이었다. 그들을 잘 아는 한 교포는 ‘그것은 북한에 대한 충성도 싸움 때문“이라고 비웃던 말이 기억난다.

정 씨가 고향방문을 일시 중단했던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2차 방북(81년) 이후 7년 세월이 흘러 88년이 됐다. 방북 후 궁지에 몰렸던 쓰라린 경험이 그의 마음을 위축시켰는지 모른다. 고향 어머니와는 가끔 서신교환을 주고받았기에 고향방문을 절실히 생각지 않았다.

아마 어머니는 매년 그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그건 내 친척만남 경험으로 안다. 비록 직계나 가까운 가족이 아니더라도 한번 북녘땅에서 일가 살붙이를 만나면 그들 생활에는 영향과 변화를 준다. 노인네 일수록 더하다. 아예 삶의 비중을 가족만남에 두다시피 하는 경우를 겪었다.

지난 1988년 노태우의 7.7선언(해외동포 방북허용)이 정식 발표되자, 정 씨는 그해 가울 3차 고향방문을 부랴부랴 준비 중이었다. 그때 갑작스레 어머니 부고를 받았다. 당국에선 어머니 비석을 세워 3백 달러를 부쳤다.

김일성 부자와 토론토 대표자 사진

“1년 전이라도 진작 방북했어야 했는데,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어요. 후회 막급하지만 어쩝니까. 한쪽에선 빨갱이, 또 반동이란 소리도 들려 방북시간을 조금 늦춘다는 것이 영영 어머니를 못 보게 됐지요.”

그 후 정 씨는 다시 북한고향을 찾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캐나다교회도 많이 달라졌다. 이젠 누구도 그를 빨갱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산가족의 선두주자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게 세월 흐름에 달려 있었다.

89년 평양축전 당시 밀입북 사건으로 남북한 모두에게 충격을 주고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임수경 학생이 문득 생각난다. 당시 임수경을 적극 옹호하고, 한국(조선)인을 지극히 사랑한 ‘루이제 린저’(독일 여류작가)의 시 소개로 글을 맺는다. 그녀가 오래전 한국 이화여대 강연 뒤 한국인에게 선사한 시였다.

정해수 북한 2차 가족방문

한국, 천개의 산을 가진 나라여
인내와 정열로 이룩된 사람들의 나라여
그렇게 많은 원수들에 의해 상처 난 나라이건만
너 불사조처럼 잿더미 속에서 
다시 소생하는 나라여
인내가 무엇인지 모르는 서양 사람의 머리로선
정말 이해되지 않는,
그러나 마음을 열고
저들과 사귀려하는 이에겐
참으로 오래도록 사랑하게 되는
힘을 가진 나라
너 코리아여!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혜연 2022-10-08 11:03:29
1950년대~1960년대까지 북한을 다녀온 한인교포들은 전부 재일교포들이거나 재중교포들 혹은 재소교포들이 전부였다는 사실 모르시죠?

박혜연 2021-12-23 00:17:32
7.7선언이전까지는 해외국적의 한인교포들이 한번 북한을 다녀오면 무조건 종북빨갱이로 내몰았던건 덤이라는 사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