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수필과 함께 살아 온 긴세월
[Essay Garden] 수필과 함께 살아 온 긴세월
  • 최미자 재미수필가
  • 승인 2022.01.03 0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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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전 국어 시간이다. 교과서에서 피천득의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다”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또 민태훈의 ‘청춘예찬’을 읽던 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 나는 요즘 아이들의 성숙함과 달리 사춘기를 느끼지 못하던 조금 둔하고 순진하던 십대소녀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 읽었던 문장들은 가슴에 뭉클하게 서서히 다가왔다.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람의 풀이 돋고,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의 새가 운다.’

이처럼 피천득과 민태훈 선생이 쓴 두 가지 예문은 매우 대비적이었지만, 훗날 나에게 많은 걸 깨닫게 했다. 학창시절 나는 문학적인 재능은 전혀 없었다. 성적도 뛰어나진 않았지만 국어선생님께 많이 질문했던 학생이었다. 역사와 기하시간을 좋아했고 고등학교 때는 영어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내 인생의 큰 사건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던 날 친정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서울 대학 병원에서 무의식 상태에 들어갔다는 소식이었다. 친정아버지는 갓난아기인 나를 와이셔츠 속에 품고 동네 사람들에게 늘 자랑하셨다고 어머니는 자주 들려주시곤 했다.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로 인하여 붕괴된 가정은 나의 모든 자존심을 무너지게 했다. 죽음만 생각하던 방황의 나날이었다.

난 부잡스러운 두 사내들 사이에서 선머슴처럼 자랐지만, 스스로 할 일을 잘했기에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부친을 잃으며 부자와 가난, 명예와 권력, 삶과 죽음, 병에 대한 고통 등 끝없는 의문들은 대학생인 내가 첫 수필을 쓰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가족과 사람들에 얽힌 인연과 업보를 탐구했다.

글을 쓰고 나의 치부를 고백하며 삶을 뒤돌아보았다. 큰 안목으로 조금씩 성숙해가야만 했다. 이민 초기에는 떠오르는 상념을 놓치기 싫어 가족이 잠든 새벽에 글을 몰래 쓰던 미치광이였다. 늦깎이 등단을 한 후 의논해 줄 친정모친도 안 계시니 한때는 글 쓰는 일도 사치스러운 것 같아 포기하고 싶었다.

은사이신 국어 선생님이 좋은 글은 사람이 된 맑은 영혼에서 흘러나온다는 격려 말씀을 떠올린다. 돈과 권력, 싸이코들이 지배하려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야 할지. 거짓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음모를 여태 모르고 살아온 어리석은 나. 지금이라도 함께 미쳐 돌아가면 안 되겠다. 손전화에만 빠진 어른과 젊은이들은 너무 모르니 안타깝다.

다행히 역사와 진실을 알고 있는 분들이 아직 살아계시고, 좋은 책들이 있다. 사람답게 살며, 자유와 존엄과 도덕을 지키려는 후손들을 기대하며 계속 글을 쓴다. 세 번째 출판 때는 방일영 재단의 언론인 지원금(2013년)을 받고 믿어지지 않던 세상의 청정함이 살아있음에 놀라웠다. 그동안 수많은 무주상보시의 글을 썼다. 한 권의 책을 만들 때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네 번째 책도 그렇게 내 손으로 꾸민다.

수필은 나의 운명인가보다. 어린 시절 느낌이 떠오르면 종이 위에 글을 쓰시던 부모님의 창의적인 일상처럼, 나도 그렇게 내 영혼으로 문학적인 삶의 향기가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이제 배고픔은 줄었지만 사악한 인간들이 더 많은 세상. 우리들 올바른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업주부로 살아오며 마술부엌에서 수필과 함께한 세월이 돌아보니 어느덧 오십년이다. 수필은 나의 첫사랑이다.

필자소개
미주 한인언론 칼럼니스트로 활동
방일영문화재단 지원금 대상자(2013년) 선정돼
세 번째 수필집 ‘날아라 부겐빌리아 꽃잎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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