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71] 칸발리크(大都)의 고려인
[유주열의 동북아談說-71] 칸발리크(大都)의 고려인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1.0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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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대사관에 근무할 때다. 주말이면 중국 지인과 함께 역사탐방을 다녔다. 지인은 일본에서도 유학한 적이 있고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해박했다. 그는 베이징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쿠빌라이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여 ‘칸발리크’라고 부르고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 ‘캄발룩(Cambaluc)’으로 기록함으로써 시작됐다고 한다. 칸발리크는 몽골제국의 위대한 황제 칸(汗)이 사는 곳이라는 의미다.

중국 대륙 전체로 보아 베이징이 동북쪽 변방으로 보이지만 유주(幽州)로 알려진 이곳에 관심을 둔 민족이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족이었다. 중국의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동북지방(만주)에서 볼 때 베이징 지역이 거점이 되는 곳이다. 금나라는 이곳을 중도(中都)로 하여 수도의 기능을 두고 중시했는데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도 북쪽의 몽골 고원에서 멀지 않아 유사시 후방지원이 용이한 점이 고려되어 수도(大都)로 정했다.

당시 대도의 도시계획이 지금 베이징의 기반이 됐고 그 후 명(明) 태조 주원장이 대도를 점령하여 북쪽을 평정했다는 의미로 베이핑(北平)으로 고친 것을 영락제가 난징(南京)에서 수도를 이전하여 베이징(北京)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 후 금의 후예인 청(淸)나라도 베이징을 중시해 계속 수도로 사용했다. 베이징이 중국대륙 동북에 치우쳐있다고 하지만 청나라가 망하고 동북지역이 중국의 일부가 되면서 베이징이 수도로서 어느 정도 동서 균형이 잡힌 모습이 됐다.

대도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베이징 대사관 부임 전에 국내 지인으로부터 대도에 가면 고려 충선왕이 설립했다는 오늘날 싱크탱크 같은 만권당(萬卷堂)을 찾아보라는 당부가 생각나서 지인에게 부탁했다.

벚꽃이 화창한 어느 봄날 우리는 베이징 서쪽 국빈관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멀지 않은 위위엔탄(玉淵潭) 공원으로 갔다. 드넓은 호수를 끼고 있는 이곳은 베이징에서 벚꽃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벚꽃이 서울이나 일본에서 보는 고목과 달리 식수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어린나무였다. 지인은 이곳이 금나라 중도시절부터 황실별장지로 이 근처에 충선왕의 만권당이 있었다고 한다.

몽골을 통일한 칭기스칸이 인근의 서하(西夏)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나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인 호라즘왕국을 차지한 후 몽골제국을 세우고 금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고려를 침공했다. 1231년도였다. 당시 고려의 무신정권은 바다를 두려워하는 몽골기병의 약점을 알고 예성강을 따라 내려와 강화도로 천도, 저항했다. 고려조정은 30여년간 버텼지만 국토는 몽골기병의 말발굽 아래 초토화되고 있었다.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제국은 남송과의 전쟁도 치루고 있어 고려와 화해의 필요성으로 4대 칸 몽케는 고려국왕 대신 태자의 입조로 항복조건을 완화했다. 당시 고려왕 고종은 강화사절로 태자(후에 원종)를 몽골로 향해 떠나도록 했다. 태자의 여행 도중에 몽케 칸이 병사했다는 소식과 함께 칸의 동생이자 칭기스칸의 손자들인 왕자들 사이에 후계자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전갈도 들어왔다.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와의 형제경쟁이 내전으로 발전했다. 쿠빌라이는 남송 정벌을 위해 중국 서남부에 주둔했고 아리크부카는 수도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었다. 고려태자는 두 왕자 중 쿠빌라이를 지지했다. 아리크부카에 비해 열세였던 쿠빌라이는 “당 태종도 정벌하지 못한 고려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하늘의 뜻이다.”(高麗萬里之國, 自唐太宗親征而不能服, 今其世子, 自來歸我, 此天意也)는 선전으로 1264년 내전에서 승리, 1271년 대원(大元)을 건국했다. 고려태자의 선택이 쿠빌라이와 고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태자가 대도에 체류 중 부왕 고종이 죽자 귀국해 원종이 된다. 쿠빌라이는 고려의 지지에 보답하여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하지 않겠다(不改土風)는 약속을 함으로써 중국을 포함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는 수많은 민족들에게 변발이 강요됐지만 고려만은 예외가 됐다. 원종은 원나라의 지원으로 무신세력을 제거하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했다.

1274년 원종은 자신의 아들 태자 심(諶)을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케 하니 그가 충렬왕이다.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됐다. 충렬왕은 원의 요청으로 일본정벌에 필요한 군선을 제작하고 원나라 병마 사육을 위해 제주도에 목장을 설치해 준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와의 사이에 혼혈아 태자 장(璋)이 태어났다. 태자 장은 외조부 쿠빌라이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수차례 원나라에 다녀오고 징기스칸의 증손녀인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했다. 태자가 원나라 체류 중 생모 제국대장공주는 고려의 생활에 적응 못 하고 후궁들의 시샘에 고통을 받아 일찍 세상을 떠났다.

태자는 급거 귀국해 문제를 일으킨 부왕의 후궁을 처단하고 개혁조치를 시행하는 등 부왕을 압박하자 충렬왕이 양위하면서 태자는 충선왕이 된다. 충선왕의 개혁정책에 대한 부원파(附元派) 권문세족의 반발과 왕비 계국대장공주의 불만 등이 겹쳐 원의 압력으로 즉위 8개월 만에 퇴위되고 상왕 충렬왕이 복위된다.

1308년 충렬왕이 죽자 대도에 체류 중이던 충선왕이 복위됐으나 그는 귀국하지 않고 메시지(傳旨)를 통해 국정을 운영했다. 나중에는 아들 충숙왕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대도에서 후에 원의 황제가 되는 왕자들과 교류했다. 1314년 충선왕은 자신의 저택에 만권당을 건립 수많은 진귀한 서적을 수집하면서 원나라의 대학자들을 초빙하고 고려에서 수재로 알려진 이제현을 불러 이른바 국제학술연구소를 만들었다.

이제현(1288-1367)은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의 사위 이금서의 후손으로 15세에 성균관시에 장원급제하고 이어서 과거에도 합격 벼슬길에 올라 충선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이제현은 만권당에서 우리에게 송설체로 유명한 조맹부와 염복 등 대학자와 교류하고 중국의 성리학에 대해 연구했다.

1316년 이제현은 충선왕을 대신해 사천성의 불교명산 아미산(峨眉山) 치제(致祭)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는 3개월의 여행 기간 도중의 풍경과 방문처를 담은 여행기를 시(詩)로 지어 역마를 통해 만권당의 충선왕에게 보내면 만권당의 학자들은 시를 돌려 읽으면서 여행분위기를 공유했다고 한다. 1319년에는 불교 신자인 충선왕을 수행 경항(京杭) 대운하를 통해 절강성 보타사(普陀寺)를 찾았다.

1320년 원나라 조정에도 변화가 왔다. 자신의 후원자인 인종이 죽고 그의 아들 영종이 즉위하자 충선왕은 환관의 모함을 받아 티베트(吐蕃)로 유배된다. 대도에서 15,000리의 티베트 라싸에서도 다시 400km 서쪽 사캬라는 지방의 사찰에 유배됐다. 충선왕은 쿠빌라이의 외손자로 한때 황제의 자녀들과 다름없는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이 모든 것을 잃고 6개월 걸려 소수의 수행원으로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고난의 여행을 했고, 고지대 티베트에서 2년 6개월간의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을 견뎌냈다.

고려에 귀국 중이던 이제현은 충선왕의 유배사실을 알고 원나라 조정에 수차례 탄원을 하여 겨우 감숙성 타사마(朶思麻)로 이배가 이뤄진다. 이제현은 충선왕을 만나기 위해 먼길을 마다않고 타사마를 다녀왔다. 충선왕이 타사마에서 7개월을 보낸 1323년 원나라 조정은 충선왕의 사촌 매제인 진종(태정제)으로 황제가 바뀌면서 유배가 풀려 대도로 귀환됐으나 유배지에서 잃은 건강을 되찾지 못해 2년만인 1325년 사망한다. 충선왕의 유배와 죽음으로 만권당은 해체되고 만다.

그 무렵 원의 황실과 부원파들에 의해 고려를 원의 한 지방(省)으로 편입시키자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있었다. 고려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이제현은 만권당을 통해 알게 된 원의 유력 지인들을 설득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不改土風)”라는 쿠빌라이칸의 유훈을 근거로 입성책동의 부당성을 강력 주장해 입성논의를 중지시켰다.

이제현은 영구귀국해 충선왕의 아들 충숙왕을 도왔다. 충숙왕이 죽은 후 즉위한 충혜왕이 흉악무도한 행실로 폐위되고 대도로 소환돼 중국 광동성으로 유배 도중 죽는다. 충혜왕의 장남 충목왕이 8세 나이로 즉위했으나 4년 만에 요절하자 이제현은 원나라에 가서 충혜왕 동생 왕기(王祺)를 청원했다. 왕기는 충숙왕의 차남으로 대도에 입조해 10년 이상 체류하면서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상태였다. 원 조정은 충목왕 동생 충정왕을 즉위케 했으나 11세의 어린 나이로 국정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자 재위 2년 만에 폐위시키고 이제현의 진의를 받아들여 1351년 왕기를 즉위시켰다. 그가 공민왕이다.

공민왕은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한족의 반란 상황에서 원나라의 멸망은 머지않았다고 보고 이제현을 재상으로 등용 원의 간섭에서 고려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부원파를 제거하는 등 개혁정치를 했다. 이후 원에 충성을 의미하는 충(忠) 자를 더 이상 달지 않도록 하겠다는 결의도 보였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의 사망으로 공민왕은 멘붕상태에 빠져 신돈에게 전권을 맡김으로써 이제현은 이에 반발 사임하고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가 키워낸 인재 중에는 이곡 이색 부자가 있는데 특히 이색은 고려말 학문 세계를 이끌어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를 배출했다.

몽골제국의 힘은 초원에서 달리는 몽골기병에서 나와 초원으로 연결된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원이 없는 중국 대륙에 갇히게 되자 군사력이 약해져 한족의 저항을 받고 건국 100년도 안 돼서 멸망의 길을 걷게 됐다. 지인은 원나라 건국 초기 중국의 논밭을 갈아엎고 거대한 초원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황당해 보이지만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쿠빌라이가 고려인(원종)의 결단에 힘을 얻어 원을 건국했고 고려의 태자는 원의 공주와 혼인하고 즉위 전에 상당 기간 원의 왕자들과 어울리면서 대도생활을 했다. 개방적인 고려에서 왕실 간의 교류와 함께 상류층의 대도 거주가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주원장의 북벌에 의해 1368년 원이 대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쫓겨갈 때 당시 황제 혜종(순제)의 황후는 고려 공녀 출신의 기황후였다. 고려인 기황후는 북원의 황제가 되는 소종을 낳고 30여년간 대도의 원황실에서 최고의 실세였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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