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⑯] 정암촌: 연변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충청도 사람들을 만나다!(2)
[아! 만주⑯] 정암촌: 연변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충청도 사람들을 만나다!(2)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3.0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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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정암촌 마을 표지석과 농가(2003년 마을개량화 사업 이전)
정암촌 마을 표지석과 농가(2003년 마을개량화 사업 이전)

2020년 어느 겨울날, 정암촌 마을회관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울려 있다. 다들 50도가 넘는 빠이주(白酒)를 몇 순배 돌린 터였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다. 동향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정암촌의 한 노인이 꽹과리를 손에 쥐고 일어나 노래 한 가락을 뽑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우리가 부르던 아리랑이 맞긴 한데 생소하다. 그러니 멀뚱할 수밖에… 어색함을 눈치챘는지, 노인은 “이 노래가 우리의 고향노래 청주아리랑입니다. 고향에서는 정작 잊혔다고 하니, 이렇게 온 김에 이 노래나 배워 가시라유” 하며 너스레를 떤다.

중국 요녕성 선양시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의 커뮤니티 중 하나인 충청향우회 회원들이 정암촌을 방문했다. 선양에서 도문까지 10시간이나 족히 걸렸지만, 중국의 동향인 마을을 방문한다는 사실에 다들 들떠 있었다. 해질 무렵 정암촌에 도착하니, 중국의 여느 농촌 마을과 다를 바 없는데, 사람들이 충청도 말씨를 쓴다. 멀리서 온 손님들을 위해 백숙이며, 매운탕이며, 인절미며, 이것저것 푸짐하게 한상을 차려 건넨다. 배고플 테니 어서 먹으라고 권하는 마음씀씀이가 참 푸근하다. 밤새 우리는 그렇게 먹고 마시고 춤 주며 노래 불렀다. 

한민족이 머무는 곳이면 그 어디든 간에 아리랑이 존재한다. 사할린이나 연해주에 살고 있는 한인의 의식 속에도 아리랑이 존재하고 있고,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고려인의 의식 속에도 아리랑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동북삼성, 즉 만주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의식 속에도 아리랑이 존재하고 있다. 이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불우한 처지, 이주의 삶에서 응어리졌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낯선 이국땅이었기 배가되었던 자국문화에 대한 애정과 애착 등이 어우러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정암촌 마을회관 전경
정암촌 마을회관 전경

고향의 그리움으로 불렀던지라 고향의 아리랑이 자연스럽게 정착 

근대 이후 만주지역은 한민족의 유랑과 이주의 무대였다. 그런데 1930년대 집단개척민 형식으로 집단이주한 사람들, 예컨대 경상도 사람들, 전라도 사람들, 충청도 사람들의 정착지에는 아직도 아리랑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집단이주가 곧 언어 및 생활습속을 동반한 문화적 이주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주와 동시에 새로이 집을 지어야 했다. 그래서 공동노동과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마을을 건설한 후에는 화전을 일구고 산나물을 채취하여 연명했다. 뒤에는 논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발해가 사라진 지 1,000년 만에 다시 벼꽃을 피웠다. 이주민들은 고향에서 농사짓던 방식 그대로 만주지역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수전을 만들었다. 진펄을 갈아엎고 물도랑을 내고 논둑을 만들고 강물을 끌어들여 논을 풀었다. 각종 농기구와 일상 생활용품은 가능한 고향의 것을 계승하려 했다. 농업이 유일한 생산 수단이었기 때문에 농악대를 구성하여 두레농사를 지었다. 농악대를 구성하고 두레농사를 지었던 탓에 아리랑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논노래가 전승될 수 있었다. 
 
또 이방인으로서 문화적 차이를 절감했기에 고향의 전통문화를 고수할 수 있었다. 만주지역은 이주민들에게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깨닫게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고향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민족의 차이는 제국과 식민의 차이, 근대와 전근대의 차이라는, 즉 우월과 열등의 차이로 표출되었다. 어쩌면 그러한 차이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만주지역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중국의 이민족과 만난 이주민들은 자국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타자와 차이를 은연중에 주장할 수 있었다.      

요녕성 선양시 충청향우회 회원들의 정암촌 방문(마을회관 내 환영 행사)
요녕성 선양시 충청향우회 회원들의 정암촌 방문(마을회관 내 환영 행사)

이 시기에 만주지역이나 그 다른 이름으로 지나(支那)를 소개한 글, “그쯤 一般婦女들의 思想程度가 低級하고 아모런 自覺과 生活意識이 없시 無知無力한 境地에서 해날을 보내는 것이 아마 큰 이유라 하겠지요” 등에서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으로 만주족과 조선인의 차이를 구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나풍속집』에서도 만주족의 성향이나 의식주, 관혼상제 등을 다루면서 그들의 민족성을 은근히 야만이니 패륜이니 폄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만주지역의 이주민들은 한족 또는 만주족과 함께 삶을 영위하면서도, 문화적으로 우월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여 사회생활의 한 측면에서 민족혼을 절대적으로 지켜 나갔다. 결과 혼인망이 일정 지역 내에서 중첩적으로 형성되었다. 만지주역으로 집단이주가 집안 전체의 집단이주가 아니라 일부 구성원의 이주였기 때문에 원주지와 같은 집성촌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부계혈통을 넘어선 범주의 인척관계는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혈연관계를 통해 원래부터 지녔던 한족이나 만주족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이 고착되었다. 또한 소수민족으로서 정치․경제적 지위가 불리한 조건에서 생존을 위한 전략으로 혈통간 결속과 민족정체성을 강화해야 하기도 했다.
   

조선족 논농사 시연[사진=바이두]
조선족 논농사 시연[사진=바이두]

이러한 배경에서 만주지역 곳곳에는 조선농민의 집단 정착지로서 전통마을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들 마을에서 아리랑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주하기 이전에 “신유행! 신유행!”이라고 할 만큼 지역과 신분, 세대와 남녀의 격차를 무마시키며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던 아리랑을 향유했던지라,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는 주인공의 처지와 이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처지가 동일했던지라, 아리랑에 대한 이주민의 인식은 남달랐다. 더욱이 고향의 아리랑을 부르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던지라 고향의 아리랑이 자연스럽게 전승될 수 있었다. 

망향의 설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불렀던 노래, 청주아리랑

1936년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석탄리에서 태어나 세 살에 부모님을 따라 정암촌으로 이주한 고(故) 신순호가 나에게 한 말이다. “설이나 추석 뭐 청명 같은 날이 되면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고, 시집 가보니까 시아버지도 그렇게 서러워서 울더라니까. 고향의 산소를 돌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하니까 더 간절했던 거지. 죽기 전에 나 한번만 데리고 가라며 명절날만 되면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래 어쩔 수가 없으니까 동네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앉아 술 한잔씩 돌리며 청주아리랑 부르는 것을 내 많이 들었지. 그래서 내가 지금도 이렇게 하잖아.” 

정암촌 사람들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을 기해 청주아리랑을 더욱 애타게 불렀다.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버린 상황에서 마음이나마 고향의 산소로 내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향은 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고향의 노래는 이들에게 위안이었다. 그래서 서로를 위로하며 고향의 기억을 더듬어 고향의 노래, 청주아리랑을 불렀다. 청주아리랑을 통해 고향의 정경을 마음 속에 담았으며, 또 살아생전에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을 노래 속에 담았다. 

정암촌 이주 1.5세대 신순호(1936~2019,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석탄리에서 태어나 세 살에 부모님을 따라 정암촌으로 이주)
정암촌 이주 1.5세대 신순호(1936~2019,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석탄리에서 태어나 세 살에 부모님을 따라 정암촌으로 이주)

전렴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전렴 // 울 너머 담 너머 님 숨겨두고 / 난들난들 호박잎이 날 속였네     
전렴 // 팔라당 팔라당 갑사나 댕기 / 곤 때도 안 묻어서 사주가 왔네      
전렴 // 사주는 받아서 무릎에 놓고 / 한숨만 쉬어도 동남풍된다
전렴 // 시아버지 골난 데는 술 받아오고 / 시어머니 골난 데는 이 잡아주자
전렴 // 시동생 골난 데는 엿 사다주고 / 시누이 골난 데는 사탕 사주지
전렴 // 며늘애기 골난 데는 업어나 주고 / 막내동서 골난 데는 홍두깨찜질
전렴 // 시아버지 죽어서 조탰더니 / 왕골자리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전렴 // 시어머니 죽어서 조탰더니 / 보리방아 물저노니 또 생각난다
전렴 // 시동생 살림나서 조탰더니 / 나무가리 쳐다보니 또 생각난다
전렴 // 시누이 시집보내 조탰더니 / 빨래줄 떨어지니 또 생각난다
전렴 // 아리랑타령이 얼마나 좋은지 / 밥 푸다 말고서 엉덩춤 춘다

위의 청주아리랑은 1978년에 조선족 민요 연구가 김봉관이 정암촌의 상쇠로 활동했던 고(故) 신철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정암촌 마을 풍물패
정암촌 마을 풍물패

사설에서는, 수줍은 처녀의 여리고 앳된 모습으로부터 결혼 후 현실에 순응하며 고난의 삶을 이겨나가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한국여성이 겪는 생활상의 애환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무엇이 빌미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시부모의 골이 잔뜩 나 있다. 갈등이 촉발된 것이다. 그러나 갈등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며느리는 능청스럽게 시아버지에게 술을 받아주고, 시어머니의 이를 잡아준다.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인가 시부모가 스러졌나 보다. 며느리는 문득 그 자리에서 부대꼈던 그들이 몹시 그립다. 이미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노래 속의 화자는 시집살이의 설움을 잘 이겨내고 있다. 그러나 가슴 한켠은 공허하다. 오늘을 살면서 어제가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했던 사람들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련이 앞선다. 숱한 아리랑이 전승되고 있지만 자아낼 수 없는 청주아리랑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청주아리랑의 정서는 정암촌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서이기도 하다. 청주아리랑의 화자가 그리워하는 어제와 정암촌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어제는 결국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청주아리랑의 화자가 그리워하는 어제는 시집식구들이며, 정암촌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어제는 고향이다. 시집식구들을 등진 이후에야 시집식구들이 그리워지는 것이나, 고향을 등진 이후에야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은 모두 어제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주시립예술단 청주아리랑 창작 공연(2021. 2. 5)
청주시립예술단 청주아리랑 창작 공연(2021. 2. 5)

고향 떠난 어느 민족이 그렇지 않겠는가만, 일제강점기에 식민정책의 희생양으로서 자신들의 처지를 감내해야 했던 정암촌 사람들의 망향의식은 더욱 컸다. 그리고 그것은 한(恨)으로 응어리져 버렸다. 정암촌 1세대들은 정암촌에서의 삶이 일시적인 정착이겠거니 위안하면서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바람을 간직하며 살았다. 그러나 바람은 헛된 바람이 되어 하나 둘씩 세상을 등져갔다. 그럴수록 견주어 후예들에게는 귀소의식이 형성되었다. 갈 수 없는 부모 나라의 갈 수 없는 고향이지만 자꾸 그곳으로 치닫는 그리움, 원형처럼 대물림되어 버린 절망과 미련 사이에서 발발한 그리움에서 후예들의 귀소의식이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청주아리랑의 대물림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정암촌 1.5세대도 죄다 스러졌다. 2~3세대들은 여차하면 부모 나라를 드나들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영주할 수도 있다. 이제 고향은 더 이상 그리움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토록 차단해 왔지만, 한족이나 타향 사람들도 빈 농지를 찾아 정암촌에 정주하고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청주아리랑의 전승력이 약화되어 가고 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근간에 이르러 음반, 출판, 미디어, 공연 등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해 정암촌 사람들과 청주아리랑의 내력을 영구히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살아있는 역사, 살아있는 문화로서 그 가치가 오랜 생명력을 발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소개
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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