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포츠담회담이 열린 체칠리엔 궁...“독도 영유권 회복은 이 회담 덕분(?)”
[탐방] 포츠담회담이 열린 체칠리엔 궁...“독도 영유권 회복은 이 회담 덕분(?)”
  • 이종환 기자
  • 승인 2022.03.30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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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다리’에서 멀지 않아...베를린은 폭격으로 황폐화돼 장소 없어
체칠리엔 궁전 입구 전경
체칠리엔 궁전 입구 전경

(포츠담=월드코리안신문) 이종환 기자= 베를린 인근 포츠담의 체칠리엔 궁전 앞에서 38선이 화제가 됐다.

“한반도 분단이 포츠담회담에서 결정된 게 아닌가요?”

“그 회담에서는 한반도 독립을 천명한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한 거지, 38선을 그은 것은 아니에요. 분단은 일제 패망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서 온 사람들끼리 얘기가 나온 것이다. 포츠담회담 장소였던 체칠리엔 궁을 찾아간 것은 3월27일 일요일이었다. 마침 체칠리엔 궁 입구에는 한국인 3명이 안내지도를 보고 있었다. 38선 대화는 이들과 오간 내용이다.

포츠담은 일제 패망후 한반도 독립이 재확인된 곳이어서 한국사람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날 혼자라도 가볼까 했는데 지인인 김 도미니카 전 베를린 파독간호요원회장이 안내를 자청했다. 독일 생활 50년인 그는 파독간호사로 와서 한국인 최연소 병동수간호사도 지냈다. 지금은 현지의 교포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한국 전통무용을 하고 있다.

서베를린과 포츠담을 잇는 일명 '스파이 다리'.
서베를린과 포츠담을 잇는 일명 '스파이 다리'.

“앞에 보이는 다리가 ‘스파이 교환’으로 유명한 다리입니다.”

체칠리엔궁으로 가는 길에 김 도미니카 회장이 지나는 곳을 소개했다. 서베를린과 동독 포츠담을 잇는 다리였다. “당시 스파이 활동을 하다가 잡힌 사람들을 이 다리 위에서 교환을 했다”고 설명하는 그는 “동서 경계를 넘나들던 호수의 오리들을 스파이로 쓰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김 도미니카 전 베를린 간호요원회장
김 도미니카 전 베를린 간호요원회장

궁전은 ‘스파이 다리’에서 멀지 않았다. 호수 연안에 아름답게 지어진 대저택이었다. 1910년대에 영국식으로 건축해, 당시 체칠리엔 황세자비 거소로 썼던 곳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영국 처칠 수상, 소련 스탈린 서기장은 1945년 7월 하순 여기서 만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국내 사정이 악화돼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독일은 앞서 5월에 이미 항복한 상태였다. 독일을 점령한 연합국 정상들은 베를린이 포화로 초토화돼 만날 만한 장소가 없자, 인근 포츠담의 이곳에서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회담이 열린 것은 1945년 7월17일부터 8월2일까지였다.

이곳 회담에서는 아직 항복을 하지 않고 있는 일본에 대해 주로 논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합국 정상들은 이곳에서 1943년의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했다. 카이로선언에는 일본의 식민지는 모두 해방되어야 하고, 특히 “한국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를 거쳐 자유와 독립을 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포츠담회담이 열린 방의 모습
포츠담회담이 열린 방의 모습

포츠담회담에서는 식민지 독립은 물론, 일본 영토에 대해서도 못박았다.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의 네 섬과 연합국이 인정하는 작은 섬에 한정된다”고  문서화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독도가 우리땅으로 복귀된 것도 이 회담 덕분이 아닌가 싶다.

체칠리엔 궁전 입장료는 1인당 10유로였다. 현장에는 우리말 오디오 가이드 기기도 비치돼 있었다. 현장에는 이들이 만나 논의한 원형 테이블과 집무한 책상, 의자 등의 집기들이 당시 모양대로 전시돼 있었다. 정상 회담이 이뤄졌던 원형테이블에는 그들이 앉은 자리를 알 수 있도록 국기들도 꼽힌 채 전시돼 있었다.

회담장으로 가는 복도 벽에는 2차대전 패망 직후의 베를린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전시돼 있었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와 독일군들의 소총과 철모들이 쌓여있는 사진, 거리를 울며 헤메는 사람들의 사진들이 패망 당시의 베를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회담장으로 가는 복도에 전시된 패전후의 독일 모습 사진
회담장으로 가는 복도에 전시된 패전후의 독일 모습 사진

체칠리엔 궁을 찾았을 때는 일요일이었다. 이 때문에 궁 주변을 산책하거나 달리기를 하는 독일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달째 지속되고 있을 때여서, 이곳을 안내한 김도미니카 회장은 “나는 6.25 전쟁중에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전쟁은 너무 무섭고 싫다”고 말했다.

체칠리엔궁이 있는 포츠담은 구 동독 지역이다. 장막으로 둘려쌓인 서베를린을 빼고는 주변이 모두 동독 시절의 억압을 겪은 지역들이다.

나치 독일과 이어 분단을 겪은 독일인들은 이곳을 찾으면 어떤 느낌을 가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체칠리엔 궁을 빠져나와 김도미니카 회장과 함께 인근 상수시(Sanssouci) 궁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상수시'는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상수시 궁전은 독일 프로이센 왕가의 여름 궁전이다. 프랑스 베르샤유 궁전을 본따 1745년에서 1747년에 걸쳐 건립되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이 궁전을 지은 후 볼테르 등 프랑스의 사상가들을 불러 독일의 근대화를 논의하고 고민했다.

상수시 궁전에서 내려다보는 앞 정원
상수시 궁전에서 내려다보는 앞 정원

하지만 빠르게 발전하던 독일은 결국 1차대전을 일으켰고, ‘문고리 권력’들에 갇혀 근심을 잊고 있던 빌헬름 2세는 갑작스런 패전 소식에 큰 충격을 받고, 1918년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탈출한 후 다시는 독일로 돌아오지 못했다.

옛글에 "천하의 근심은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말이 있다. 북송(北宋) 때의 범중엄(范仲淹)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글이라고 한다. 

아마 프로이센의 왕이나 독일제국의 황제가 '근심없는 궁전'보다는 '먼저 근심하는 궁전'을 짓고 고민했다면 독일과 유럽의 근현대사는 아마 상당히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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