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⑲] 최윤구 추모비: 이념보다 무장투쟁의 실리를 추구하다
[아! 만주⑲] 최윤구 추모비: 이념보다 무장투쟁의 실리를 추구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4.1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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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기사 “사람을 찾습니다”(중국 『료녕신문』, 2011년 2월 11일자)
기사 “사람을 찾습니다”(중국 『료녕신문』, 2011년 2월 11일자)

2011년 2월 11일자 중국의 한 신문지상에 사람을 찾는 기사가 실렸다. “강학영이 최윤구의 딸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라는 간절함으로 시작하여 하단에는 최윤구에 대한 정보를 간단히 제공하고 있다. 강학영은 중국 요녕성 선양시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이다.

강학영에 의하면 ‘최윤구의 본명은 최승팔이며, 1903년 평안북도 초산군에서 태어났고, 1929년 조선혁명군에 가입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1936년에 조선혁명군이 와해되자 중국 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가입하여 양정우 사령의 참모로 활동하다가 1938년 12월 화전현 홍석립자에서 전사했다’는 것이다.

얼마 후 중국 요녕성 선양시 주재 북한영사관이 강학영에게 연락을 했다. ‘최윤구의 딸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손자는 북한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강학영과 최윤구의 손자가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최윤구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이는 조선혁명군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쇠퇴와 소멸이라는 주제와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윤구(崔允龜, 1903~1938)
최윤구(崔允龜, 1903~1938)

조선혁명군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제4사 사장(師長)으로 등장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삼성을 점령했다. 그리고 동변도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조선혁명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1932년 1월 15일,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을 이끌던 국민부가 간부급 인사 40여 명을 비밀리에 신빈현으로 소집했다. 타개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내부고발자의 밀고로 오히려 31명이 체포되었다. 바로 신빈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국민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이 해체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1932년 2월 초, 국민부가 고이허를 조선혁명당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양기하를 국민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양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임명한다. 당(黨), 정(政), 군(軍)의 조직을 재건하려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달에 관전현에서 양기하가 일본군과 만주 군벌의 협공으로 전사한다. 국민부의 새 지도부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양세봉은 새로운 돌파구로서 중국의용군과 공동 노선을 선택한다. 심지어 마적이나 대도회(大刀會) 같은 집단과도 협력하여 대대적으로 봉기 태세를 갖춘다. 대도회는 반제국(反帝國), 반군벌(反軍閥)을 외치던 중국 농민군이었다. 이때 조선혁명군의 병력은 400여 명이었으며, 한중연합군의 전체 병력은 2,000여 명이었다. 양세봉은 한중연합작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조선혁명군을 5개사로 개편하여 박대호, 한검추, 조화선, 최윤구, 정광배를 1∼5사의 사장(師長)으로 임명한다. 즉 신빈사건 이후 조선혁명군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제4사의 사장으로 최윤구가 등장한 것이다.

소류하자 야습전(夜襲戰) 전적비와 최윤구 추모비(중국 길림성 화전시)
소류하자 야습전(夜襲戰) 전적비와 최윤구 추모비(중국 길림성 화전시)

양세봉은 한중연합작전을 통해 연전연승의 신화를 창조한다. 1932년 4월, 신빈현의 영릉가를 공격하여 일본군과 만주국군 80여 명을 사살하고 반격의 거점을 확보한다. 1932년 5월,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연합하여 다시 영릉가를 공격하자 이틀간 공방전을 거쳐 사수한다. 1932년 5월, 신개령에서 2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한다. 이어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5월 한 달간 일본군과 만주국군 1,000여 명을 사살한다. 한편 1932년 7월, 최윤구는 통화현 쾌대무자에서 단독으로 작전을 펼쳐 일본군과 만주국군 8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전통적인 명분을 지킬 것인가? 무장투쟁의 실리를 좇을 것인가?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 공산당 계열의 무장 세력이 형성, 급부상했다. 이들은 민간인으로 구성한 중국의용군과 달리 정규군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양세봉은 중국 정규군과 체계적으로 연합하기 위해 조선혁명군을 3개 사령부 7개 중대로 개편한다. 이때 최윤구가 제2사의 사령(師令)으로 중국 동북항일연군과 소통하며 맹활약한다. 그러자 일제가 한중연합군을 섬멸할 목적으로 6,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토벌 작전을 전개한다. 동시에 투항 권유, 회유, 매수 등의 공작을 병행한다.

일제에 투항하는 독립군들이 속출했다. 전체적인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1934년 9월에는 양세봉 총사령관이 밀정에 의해 허망하게 순국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36년 12월에는 조선혁명당 중앙위원회 고이허 주석이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다. 이는 사실상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최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이허 주석은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의 이념을 뒷받침하던 정신적 지주로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강학영(왼쪽, 중국 요녕성 선양시 거주)
강학영(왼쪽, 중국 요녕성 선양시 거주)

조선혁명군은 당시 200여 명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관전현과 환인현 경계의 신개령에 산채를 짓고 유격전을 대비했다. 그러나 1937년 3월 일제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조선혁명군 제1사 사령 한검추와 교육부장 윤일파 등 51명이 일제에 투항했다.

조선혁명군 내부에서도 분란이 일었다. 김활석 총사령관은 현 상태를 유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반면, 최윤구를 비롯한 젊은 참모들은 중국 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여 싸울 것을 주장했다. 김활석은 조선의 독립을 표방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이라는 명분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하여 100여 명의 병력과 함께 투쟁하지만, 1938년 9월 일본군에 의해 생포되고 만다.

반면 최윤구는 1938년 3월에 6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양정우가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가담하여 투쟁을 이어갔다. 일제는 조선혁명군의 명맥이 이어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사촌형 최승복을 산야로 끌고 다니며 최윤구에게 투항하라 절규하며 개인적인 감정을 자극했다. 한 달 후 나무 등걸에 “나를 찾는 것보다 나의 시체를 찾는 것이 쉬울 것이다”라는 글귀가 보였다. 그제야 일제가 최승복을 풀어주었다.

북한 평양시 대성상 혁명열사릉 최윤구 반신상(왼쪽 최주용)
북한 평양시 대성상 혁명열사릉 최윤구 반신상(왼쪽 최주용)

1938년 12월 2일, 양정우를 추격하던 토벌대에 포위되어 최윤구가 순국한다. 이때 조선혁명군의 잔존 병력도 거의 전멸한다. 조선혁명군의 명맥이 완전히 끊기는 순간이었다. 1990년에 중국 길림성 화전시 인민정부가 최윤구가 사망한 바로 그 자리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추모비에는 “1938년 말 양정우가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1로군은 홍석립자에서 야간을 틈타 만주국군을 기습하여 100여 명을 섬멸하고 적기 1대를 격추시켰다. 전투 중 1로군 참모 최윤구가 장렬히 희생되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중국의 평가가 아니더라도, 최윤구의 무장투쟁은 강도나 지속성, 중국 공산당과 연대를 통한 생존 전략 등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선사한다. 그리고 오직 항일이라는 목표를 위해 이념과 민족을 초월했다는 사실은 남북한의 통일 논리를 구상하는 데도 교훈을 선사한다. 반드시 새로운 평가로써 재조명해야 할 만주지역 항일투사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최윤구의 본적은 평안북도 초산군인가, 경상북도 청도군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강학영은 누구인가? 결론적으로 최윤구의 외조카이다. 강학영에 의하면, 최윤구는 1903년 평안북도 초산군 선천면에서 태어났다. 1907년 최윤구의 어머니는 남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셨고, 남동생은 7살 때 실종되었다. 그러자 최선경(최윤구의 큰아버지)이 홀로 남겨진 최윤구를 양자로 맞아 들였다. 이를 계기로 최윤구와 최승일(강학영의 어머니)이 유년 시절을 함께 보냈다. 최윤구는 1920년에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 이후 1923년 아내와 딸을 처갓집으로 보내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에 몸을 던졌다.

1936년 중국 봉천성 조선총독부 문서(조선혁명군 제2사 최윤구의 본적을 청도군으로 기재)
1936년 중국 봉천성 조선총독부 문서(조선혁명군 제2사 최윤구의 본적을 청도군으로 기재)

최승일은 북한에 살고 있을 최윤구의 부인과 딸, 즉 자신의 올케와 조카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이에 강학영이 신문지상에 ‘사람을 찾습니다’는 기사를 냈고, 결국 북한의 최주용(최윤구의 손자)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강학영은 최주용의 말을 빌려, 평양시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최윤구의 반신상이 있는데, 1975년에 김일성 주석이 최윤구의 반신상 앞에서 만주지역의 독립군들이 반공(反共)에서 연공(聯共)으로 이념을 바꾸는 데 최윤구가 큰 역할을 했다며 치하했다는 것, 그리고 연장선에서 최윤구의 자손들이 혁명열사의 후손으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주변에 알렸다.

한편 한국 정부는 조선혁명군의 잔존 병력을 이끌고 중국 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2005년에야 최윤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독립유공자의 유가족으로서 등록 신청서를 제출한 이는 미국 LA에 거주하는 최윤구의 조카 최인빈이었다. 신청서의 내용에 의하면, 최윤구의 본적은 경상북도 청도군이며, 1919년 3.1운동 때 청도군 운문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데 가담하여 일제의 추격을 받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내용을 독립기념관이 발간한 장세윤의『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51권』, 2009)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윤구의 본적은 평안북도 초산군이며, 그 자손들은 북한에서 혁명열사의 후손으로 살고 있다고 하는 강학영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 최윤구의 본적은 경상북도 청도군이며,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다고 하는 최인빈의 주장이 맞는 것인지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늘에 가려졌던 만주지역의 독립투사들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이때, 좌우의 이념 논란도 아니고 독립유공자의 유가족 지정 논란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불필요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2005년, 미국 LA 최인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2005년, 미국 LA 최인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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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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