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성 칼럼] 가장 잔인한 달 4월에 깨쳐본다(하)
[정대성 칼럼] 가장 잔인한 달 4월에 깨쳐본다(하)
  •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 승인 2022.05.09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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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4월 28일 오후 매헌 윤봉길 의사가 모셔져 있는 충남 예산의 충의원을 찾았다. 오전에 아산 현충원에서 있은 이순신 탄신 477주년 기념 다례회에 참석한 뒤였다.

그는 작년 6월 29일 서울 서초구 양재시민의 숲에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했다. 그 때문에 예산 충의원 방문은 예상된 행보였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대표단의 귀국 날에 맞춰 방문했다. 이순신 장군과 윤봉길 의사가 역사의 기억 속에서 이날 다시 소환된 의미도 음미할 만하다.

임진왜란 400주년 때, 일본에서는 양심적 역사학자들이 조선침략의 기억을 되살자는 운동을 벌였다. 필자는 그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필자 라인에서 박삼중 스님을 지원해 귀무덤, 코무덤에서 공양을 드렸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전공을 과시하고 자신을 영웅화하기 위해 코무덤, 귀무덤을 지었다. 하지만 교토 인근 등 귀무덤 근처에 사는 일본인들은 과거 잔인한 악행의 광기, 부도덕함이나 조선인들의 원망은 잊어버리고, 귀신령, 코신령이 귀코 병을 치유해준다는 미신을 믿으며 기복신앙으로 공양해왔다.

그래서 400주년 때 심포지엄에서 한일 역사학자들이 모여 침략을 기억하고 조선인의 한을 풀기 위한 공양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때 일본학자들은 일본 연호를 붙여 ‘분로쿠, 케이쵸 에키(징벌)’라 불렀던 역사용어를 스스로 ‘임진왜란’으로 바꿨다.

귀코 썰기는 귀코로 한 되 이상 되는 양을 채우면 토요토미가 인신매매를 허락했기 때문에 이뤄졌다. 그로 인해 서양 선교사들에게 팔려 노예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운명은 가혹했을 것이다. 참고로 오늘날 스페인에는 ‘꼬레’, ‘하뽕’이라는 지명, 인명이 있다. 각기 한국, 일본이라는 의미다.

왜란 당시 한반도를 덮은 생지옥의 잔혹상은 지금 일본우익들이 주장하는 “조선노예를 해방시켜줬다”는 등의 순기능으로 지워지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백성들을 놔두고 일찌감치 도망간 선조가 한심스럽고 원망스러울수록, 세계사에 길이 남을 백전백승의 이순신의 활약상은 위대하게만 다가온다.

세종, 성종 때 충신 신숙주의 명저 『해동제국기』는 일본의 왜구의 잔인성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쳐들어오지 않도록 일본에 대해 잘 보듬어주는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외교철학이 담겨있다. 율곡 이이의 양병설이 아니더라도, 선조는 충신 신숙주의 유지(遺志)라도 알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했어야 했다.

하지만 선조는 조총의 존재를 미리 알면서도 사냥도구로나 치부했다. 그나마 동이족 후예로서의 우리 궁술과 편전(片箭)이 있었고 의병과 거북선 등이 나와 우리나라를 구했다. 기록에는 비행기를 제작해서 왜성을 탐사하는 데 사용했다는데, 세계 최초의 비행기이다. 이태리로 팔려간 조선인 기술자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행기 메모 제작에 자극,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장 잔인했던 것은 조선 조정 정치가, 관료들의 이순신에 대한 시기심, 따돌림, 모함이다. 장연실, 신숙주, 이순신 등 세계적으로 특출한 천재들을 제쳐놓고 국운을 쇄락하게 만들어버린 조선 왕조였다. 그 역사가 안타깝다. 망국에 이르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이순신장군 탄생일에 다시 되새기는 이유다.

왜란 때 조선의 여러 기술들을 빼앗아간 일본은 서양 기술과 더불어 잘 받아들여 승승장구했다. 18세기 일본 수도 에도(동경)는 영국의 산업혁명 전의 런던보다 번화한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문명을 자랑했다. 그럼에도, 조선통신사들은 허울 좋은 보고에 치우쳐, 객관적으로 보고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이 소(小)중화의식에 묻혀있을 때, 일본에는 명치유신이 일어나 흑선의 한을 되레 조선에 되갚았다. 일본은 운양호 사건으로 뒤집어씌워 구미제국주의 모방의 길을 택한다.

1876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 김기수는 조일수호조규 체결 일본 측 외교관 모리야마 시게루 집에 갔을 때, 그가 잔뜩 메모를 적어놓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를 발견했다. 우리가 신숙주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을 때, 일본인들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려고 우리 조상의 기록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4월 29일은 쇼와(소화) 일왕 탄생일이기도 했다. 90년전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커우공원(현, 노신 공원)에서 열린 당시 이른바 ‘천장절’(일왕 생일 축하일) 행사 단상에 도시락 폭탄을 던져 고위 일본인들의 사상자를 낸 의거 날이었다. 그 의거로 일본육군이 저지른 제1차 상해사변의 조율을 마무리하던 시게미츠 마모루 공사가 부상을 입어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공교로운 것은 그 시게미츠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외무대신 자리에 올라있어 미주리호 선상에서 맥아더를 상대로 패전조약에 조인하는 치욕을 당하는 주인공이 됐다는 인연이다. 신이 쓴 각본 같다.

이 의거 사건으로 장개석이 감탄하여 김구 선생에게 지원금을 보내 뤄양군관학교 한인반을 창설하는 것에 동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는 중경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광복군 창설로 이어진다. 하지만 광복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 정식으로 참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전승국의 열매는 장개석이 다 가져갔다. 하지만 그후 장개석도 김구도 구미열강으로부터 둘 다 버려지는 운명에 처해졌다.

필자는 윤석열 당선인이 출마선언을 매헌기념관에서 하는 걸 보고 윤봉길 의사에 대해 새로이 관심이 쏠렸다. 예산에 충의원, 생가, 기념관도 두루 찾아봤다. 느낀 바를 세가지로 줄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농촌계몽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윤봉길의 면모. 특히 『농민독본』을 지어 “조선은 농민의 나라”, “상공업이 아무리 발전해도 농업을 잊으면 안 된다”고 간파한 그의 혜안에 감복했다. 지방활성화 시대에 지금도 유효하다.

둘째, 농민계급 출신이긴 하지만, 서당에서 한학을 잘 전수받아 한시도 잘 썼다는 점이었다. 그의 한시들을 천천히 읽어보면서,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참된 살신성인의 우국지사 면모를 지녔다고 느꼈다.

셋째, 시게미츠의 후손이 충의원을 방문해 과거사를 사과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일본 측 장군들의 후손들 또한 서애 서거 400주년 때 안동을 방문해 사과한 적이 있다.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생각할 때, 잔혹한 과거사들이 화해의 아이콘으로 탈바꿈되는 지혜와 아량도 필요하다.(하지만 필자는 ‘양재시민의 숲’을 ‘매헌공원’으로 개칭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윤봉길 의사는 일본 카자나와 형무소에서 처형당해 순국했다. 카나자와에서 노후생활을 하시는 필자의 은사도 유골반환운동을 도우셨다고 한다. 그는 페북에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 방문할 때에는 꼭 카나자와에 들러 윤봉길 의사의 사적지를 참관하시기 바란다”고 적었다.

윤석열 정부가 빠르게 한일관계 개선에 나서기를 바란다. 장연실, 신숙주, 이순신, 윤봉길 같은 유능한 분들을 외교 일선에 포진시키기를 빈다. 특히 신숙주가 말한 ‘일본을 보듬는 외교’는 지금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 이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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