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성 칼럼] ‘태평성시도’ 모사 소감
[정대성 칼럼] ‘태평성시도’ 모사 소감
  •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 승인 2022.06.0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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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시도[사진=국립중앙박물관]

대통령 취임식이 있은 5월 10일 필자는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모사 작업에 들어갔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명군 정조의 재위 기간(1776~1800)이나 그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대작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축하의 뜻을 담아 모사를 시작했다.

각 113.6×49.1cm, 8폭으로 이루어진 이 대작을 A3용지 도화지 4장의 크기에 축소해 세밀한 모사를 시도하였다.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지 않았지만, 미완인 채로 이를 일본에서 발행되는 잡지에 실었다.

연일 밤새우면서 죽을 고생을 했는데, 이 모험과도 같은 도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즉, ‘태평성시도’는 세계미술사 명작들에 어깨 나란히 해도 손색없는 걸작이라는 발견이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는 것이다.

서양에는 성모자상 등 기독교 종교 그림이 많다. 동아시아에서는 불화, 연꽃 그림 등 불교 종교화가 많다. 또 선녀화, 선인화, 마고(麻姑)상 등 도교 종교화, 삼신도, 호랑이 그림 등 토착 종교의 종교화도 적지 않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선비들은 종교화보다는 산수화, 화조풍류 등을 화폭에 담고 감상했다. 그런 점에서 태평성시도야말로 유교 이데올로기의 구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는 논란은 제쳐 놓자. 우리는 유교가 삼강오륜 등으로 불리는 분명한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음을 안다. 그 논리는 맹자의 측은지심에 상징되듯, 인간의 자연적인 심적 움직임에 기반하고 있다. 우물가를 위태롭게 아장거리다 우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려는 아기를 보고 인간은 그 아기를 구하려고 덤벼든다. 배움이 모자란 어린 자는 경험이 많은 어른을 존경하고, 부부는 서로 화창하고, 남편의 도가 있다면 부인의 도가 있다. 그렇듯, 군신 관계도 설명된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다.

동시에 유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극히 인간의 상식을 함양하고, 상식에 입각한 가르침이다. 종교가 아니라 학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자인하기도 하고, 타 종교로부터 그렇게 자리매김 당하곤 한다. 아무튼 태평성시도는 그러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각, 유교적 통치 이데올로기를 알게 모르게 담고 있다.

서양미술사를 평가할 때 기독교적 영향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지 않듯, 여기서도 이 그림을 평가할 때 유교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질 필요가 없다. 장난꾸러기 아기들,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어린이들, 어른들, 온갖 물건을 만들고 파는 상공인들, 그것을 사려는 서민들, 아이를 돌보는 부인들, 보모들, 할머니들, 체통 있는 집안의 시집행렬, 과거에 합격한 총각의 축하행렬, 점잖은 귀인들의 행렬, 하천공사나 건설공사를 하는 노동자들, 농사짓고 각종 농기구 작업하는 농부들, 군사 훈련 하는 군인들, 나아가 멀리 서쪽 나라들에서 온 낙타와 코끼리들, 산대·연희 꾼들, 원숭이들 등등. 사농공상이라고 원래 중농주의가 강한 유교이지만, 18세기 실학의 발현이 있었듯, 영·정조 시대의 중상주의 이데올로기가 여실히 드러나면서, 실사구시 정신으로 현실을 발전시키려는 실학적 유토피아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이 설계했다는 저 유명한 기중기도 등장한다.

필자는 대학원 전공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 동경대 대학원 연구생으로서 중국 고전과 조선 실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그때 중국어도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동경대에 유학 와있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심상치 않았다. 중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망명한 사람들인 것이다. 필자는 문외한으로 지켜보다가 드디어 천안문 사건이 터졌다. 남 핑계 대는 건 아닌데, 필자는 그때 중국에 대한 환멸을 확실히 맛보고 중국학, 실학 공부가 싫어지는 마음이 생겨 결국 전공을 좀 더 현실 세계와 관련이 깊은 근현대사로 바꿨다. 지금 되돌아보면, 후회하는 마음도 있다.

필자가 대학교 2학년 때 불문과로 가려다 문예과(문창과)로 진로를 정했던 일도 기억난다. 필자는 일본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줄곧 미술부에 소속해 유화를 그리시는 미술부 선생님의 특강을 과외수업처럼 매일 받았다. 중학교 미술 선생님은 추상화 화가셨고, 고교 미술 선생님은 완전히 인상파이셨다. 그러면서 필자는 기독교 성경책과 프랑스 상징시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불문과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결국 불문과를 선택하지 않았다.

김용권 씨라고, 불문과 선배를 훗날 알게 됐다. 그분은 불문과를 나왔지만, 한국문학이나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계셨다. 필자는 오사카외국어대학에서 펴낼 <조선어 대사전> 교정, 만화 <임꺽정>의 초벌 번역 등을 도와드린 기억이 있다. 필자가 불문과를 선택하지 않고 문예과를 선택한 이유는 장차 한국어, 한국문학, 문화의 영역으로 지적 호기심을 집중시키겠다는, 나름의 결심이 숨겨져 있었다.

필자가 다닌 와세다대학에는 조선어 과목이 있었다. 오오무라 마스오라는 전임교수가 가르쳤고 그 외에는 시간강사들이 조선어문학을 가르쳤다. 그중에 윤학준 선생님이 필자를 귀여워하셔서 아담한 자택으로 학생이었던 필자를 초대해주신 것이 기억난다. 그때 윤학준 선생님의 고등학생 정도 되신 따님이 우연히 집에 있어서 짧게 대화를 나눴다. 화장실 안에 화학기호 일람표가 붙여져 있어, 물어보니 따님이 이공계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따님한테, “부친께서 훌륭하신 조선학(한국학)의 대가이신데, 어째서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했다. 따님은 “조선(한국)은 지구상에서 너무 조그마한 나라인데, 과학은 전 우주를 상대하잖아요?”라고 대답했고, 그때 필자는 그녀에게 “조선은 보기에는 작은 나라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무한한 우주와도 같은 세계가 펼쳐지는걸요”라고 말해준 기억이 난다. 윤학준 선생님은 대화를 들으시면서 가만히 미소 짓고만 계셨다.

아무튼, 필자가 문예과로 간 이유는 한국 조선이라는 소우주를 탐험하고 언젠가는 한국어로 창작을 하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오무라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졸업논문을 김사량을 주제로 썼고, 동경대를 포기하고 메이지대 대학원으로 가서는 춘원 이광수로 석사 논문을 썼다. 현재 필자는 소원했던 대로, 한국어로 창작을 하고 있다. 한국어 세계의 무한한 우주를 개척하기 위해서다.

5월 10일, 윤 대통령 취임식에 참여했다. 항간의 아저씨, 아주머니들, 지방에서 올라오신 분들 등 일반 서민들 사이에 앉아서 지켜봤다. 그들의 반응을 보고 있으면서 놀란 것은 이들이 참으로 소박하고 순진한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왠지 ‘태평성시도’에서 나와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인 것처럼 느꼈다. 예술은 이렇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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