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77] 클로드 모네와 클레망소
[유주열의 동북아談說-77] 클로드 모네와 클레망소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2.07.0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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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왼쪽)와 조르주 클레망소[사진=위키커몬스]
클로드 모네(왼쪽)와 조르주 클레망소[사진=위키커몬스]

삼성그룹의 고 이건희 회장 수장품에서 미술관에 기증한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이 화제다. 이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전시실에 수련의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미술관 측에서 그림을 강조하기 위해 원작을 촬영한 영상을 바닥에 비추어 관객이 수련 연못에 서 있는 느낌을 주려고 했던 것 같다. 그 연못은 파리 중심부를 흐르고 있는 센강의 하류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으로 파리에서 노르망디 해안 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림에 문외한인 필자가 모네의 수련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생애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일본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유럽 출신의 동료 외교관의 초대로 그의 자택에서 같은 또래의 각국 외교관들이 모여 식사를 했다. 그의 집에 모네의 수련 그림이 있었다. 그림 속의 연꽃을 보고 동양적인 꽃을 그린 모네에 관심이 갔다. 연꽃은 흙탕물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더럽히지 않고 깨끗한 꽃을 피우고 맑은 향을 내는 고귀한 꽃으로 우리 옛 선비들이 좋아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모네의 그림은 일반 연꽃(lotus)과 달리 수련(water lily)이라고 부른다.

후에 알았지만 다년생의 수생 식물인 수련은 연꽃과 식물학의 과(family)는 같으나 속(genus)은 다르다고 한다. 연꽃에는 우리가 식용하는 연근이 생기지만 수련은 없다. 월동을 위해 연꽃은 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하지만, 수련은 줄기에 보관하기에 연근이 없다고 한다. 사물의 관찰 방식의 차이일까. 서양에서는 수련을 물에 연결시키지만 중국에서는 피고 지는 것에 중점을 두어 잠자는 연꽃(睡蓮)으로 이름을 지었다. 햇빛이 쨍쨍한 한 낮에 피었다가 오후가 되면 꽃잎이 오므라들어 잠자리에 드는 모습을 강조한 것 같다. 모네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님프(女神)가 욕망의 신 프리아포스의 겁탈을 피해 수련으로 변했다는 그리스신화에 따라 님프(Nymphéas)라고 부른다고 한다.

클로드 모네는 1840년 파리에서 출생했다. 운수업을 하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센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노르망디 해안의 항구도시 르아브르(Le Havre)로 이사했다. 그곳에는 모네의 외가가 있어 아버지는 처가의 도움을 받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항구(harbor)의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된 르아브르는 7세기 북유럽의 봐이킹족들이 이곳을 통해 센강을 거슬러 올라 파리를 침공한 적이 있었을 정도로 오래된 항구다. 전장 780km의 센강은 철도가 건설되기 전 프랑스의 중요한 내륙교통(水路) 역할을 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모네는 캐리커처(인물의 특징을 과장한 그림)를 잘 그려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고 팔아서 용돈을 벌어 쓰기도 했다. 그는 매일 센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나가 시간마다 빛이 달라짐에 따라 바다의 색채라든지 주변 풍경의 인상이 달라짐을 관찰하면서 흥미를 느꼈다.

영국의 도버해협에서 볼 수 있는 백악절벽(white cliff)이 즐비한 르아브르의 바다와 강 그리고 절벽 등 아름다운 풍경이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모습은 한평생 모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인상파(impressionism)’ 기원이 된 ‘인상·해돋이’는 모네가 르아브르 바다의 해 뜨는 아침 풍경의 순간 인상을 포착해 빠른 속도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화가적 재능을 인정받은 모네는 정식으로 그림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난다. 모네는 전국의 젊은 화가들이 몰려드는 몽마르트르에 자리 잡고 그림공부를 하면서 카미유라는 모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동거했다. 당시 모델은 거리의 여인처럼 신분이 낮고 경멸의 대상이었다. 르아브르에서 사업을 착실히 하면서 아들이 자신의 사업을 이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모네의 아버지는 모네가 화가가 되겠다고 집을 나가고 더욱이 비천한 여자와 동거하면서 결혼까지 하겠다고 하니 크게 화를 내고 일체 송금을 중단했다.

카미유는 1867년 모네의 첫아들을 낳았다. 그가 장모네였다. 20여 년 후 프랑스 코냑 지방의 브랜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후에 유럽통합을 이루어낸 장모네(1898-1979)와는 동명이인이다. 모네의 작품에는 카미유 모자의 그림이 많다. 빛의 변화에 관심이 많은 모네는 전통적인 실내 인물화보다 화구를 챙겨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그의 모습은 160여 년 전 조선의 화가 정선(겸재)이 연상된다. 정선(1676-1759)은 중국의 남화 전통에서 벗어나 금강산 등 명산을 찾아 야외에서 실경을 그리는 진경산수화의 독자적 화풍을 만들어 냈다.

모네와 이름이 비슷하여 헷갈리는 화가가 있다. 모네보다 8세 연상인 에두아르 마네이다. 마네는 할아버지부터 판사를 지내고 아버지도 유명한 법조인인 금수저 집안 출신인데 화가가 되면서 괴짜 행동으로 유명해진다. 당시 여인의 누드는 비너스 등 신화의 인물에 한해서 그릴 수 있는데 마네는 모델을 벌거벗겨놓고 정장한 신사들과의 야외 오찬 모습을 그렸다. 그의 ‘풀밭 위의 오찬’과 고급창녀를 누드로 눕혀 놓은 ‘올랭피아’는 순수성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화제를 모아 살롱전(국전)에도 출품했다. 심사위원들로부터 퇴짜를 받아 낙선하게 되지만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맏형으로 존경받는다.

가난한 화가 모네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백화점을 경영하는 오셰데라는 사업가가 자신의 집을 모네 그림으로 채울 정도로 모네를 좋아하고 그의 소폰서가 되어 주었다. 모네는 든든한 후원자 덕에 안정된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으나 그것도 잠깐 오셰데는 사업에 실패하여 가족을 버리고 쫓기는 몸이 됐다. 모네는 오셰데의 부인 앨리스와 그의 자녀를 맡게 됐다. 그 무렵 카미유는 둘째 아들 미셸 모네를 출산하고 부인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앨리스가 모네의 자녀를 돌보게 됨에 따라 두 사람의 사랑이 싹트고 모네는 오셰데가 사망한 후 그녀와 재혼을 한다.

대가족을 거느리게 된 모네는 파리에서 고향인 르아브르를 다니면서 열차의 차창을 통해 보아 둔 센강에 가까운 지베르니의 땅을 구입 자신의 꿈인 거대한 정원을 조성하여 생의 절반을 보낸다. 언젠가 모네가 자신이 이룩한 최대의 걸작은 그림이 아니고 지베르니의 ‘정원’ 그 자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느 해인가 파리 여행 중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지베르니를 찾았다.

'수련이있는 연못'(Le Bassin Aux Nympheas,1919-1920)[사진제공=문화체육관광부]
삼성그룹의 고 이건희 회장 수장품에서 기증한 '수련이 있는 연못'(Water-Lily Pond)[사진제공=문화체육관광부]

드넓은 정원에 들어서자 꽃의 정원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꽃들이 손님을 반겼고 한쪽의 물의 정원은 센강의 물길을 정원으로 끌어들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관리인들이 조그마한 배를 타고 연못의 부유물을 청소하며 수련을 관리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유명한 수련은 마침 눈을 감지 않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쪽에는 일본식 아치형 목재 다리가 걸려 있고 대나무와 함께 수양 버드나무가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곳이 일본인지 프랑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건물에는 일본 에도시대 풍속판화 우끼요에(浮世繪)가 가득한 방이 있어 놀래기도 했다.

17세기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들이 가보지 못한 중국에 대한 환상으로 중국물품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들을 열광시켰다. 특히 도자기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고 중국풍 의상을 구해 입는다든지 사토(城)의 한쪽에 중국식 정원이나 차이나 룸을 만들어 과시하기도 했다. 이를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고 불렀다.

19세기가 되면서 프랑스 혁명으로 구체제와 귀족들이 몰락하자 시누아즈리도 쇠퇴하고 그 대신 일본문화가 수입돼 자포니즘(Japonism)이 번성했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전인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처음으로 참가 일본문화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영국이 지원하는 천황파에 대해 에도막부를 지키려는 쇼군파를 지지하고 있어 일본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모네가 자포니즘에 빠진 것은 오랜 친구 조르주 클레망소(1841-1929)의 영향이 컸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본인도 의사가 된 클레망소는 수상이 되기 전에 ‘진실의 수레바퀴가 어둠에서 나와 힘차게 굴러가라’는 의미로 로로르(L'Aurore, 黎明) 신문사를 창간했다.

그는 사장 겸 주필로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에밀 졸라(1840-1902)의 ‘나는 고발한다’를 신문 제1면에 게재토록 한 용기 있는 언론인이었다. 클레망소는 파리 18구(몽마르트르)의 구청장을 역임하여 모네 및 로댕 등 예술인과 교유하고 그들을 돕는 데 적극적이었다. 클레망소에게는 일본인 절친이 있었다. 일본 총리를 지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1849-1940)로 두 사람은 소르본느대학 시절 같은 하숙방을 쓴 친구였다.

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를 움직이는, 미국 영국 이탈리아의 수뇌와 함께 프랑스 대표로 4 거두의 한사람이 된 클레망소는 일본 대표로 참석한 사이온지 긴모치의 입장을 지켜주는 데 큰 역할을 하여 전후 일본이 강대국이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베르니의 수련을 보고 나면 파리 시내의 오랑주리 미술관을 가보지 않을 수 없다. 모네의 수련을 좋아한 클레망소는 모네에게 8개 대형 수련 연작을 그리도록 주문하고 미술관은 연작을 전시할 타원형 갤러리를 준비하도록 요구했다. 1827년 파리의 튈르리궁전의 오렌지 온실(橘園)이었던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의 방’이 공개됐다. 둥근방을 가득 두른 수련 연작이 사람들을 환호시켰다. 모네가 세상을 떠난 지(1926. 12) 불과 몇 개월 후였다. ‘수련의 방’ 입구에는 로댕(1840-1917)의 작품인 크레망소의 두상이 놓여있다.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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