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청년이 겪은 해방과 6.25 당시 북한 실상 체험담– 2
북한 청년이 겪은 해방과 6.25 당시 북한 실상 체험담– 2
  • 글 맹동욱, 해설 송광호(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 승인 2022.07.22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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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동욱 러시아 공훈예술가의 북한 수기

예로부터 북한 아오지는 함북의 유명 탄광지대다. 정치범 수용소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남북에서 ‘아오지’ 지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지금은 북에서 아오지 이름 자체가 없어졌다. ‘은덕(恩德)’ 탄광이 됐다. 옛 함북 경흥군 지명이 은덕군으로 변하면서 아오지도 ‘은덕’이라고 바뀌었다.

지난 1989년 1월 첫 방북 때 이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함께 방북한 한 해외 이산가족과 대화 중에 “행동을 조심해요. 잘못하면 ‘아오지’로 끌려가요”하고 농담했는데, 옆에서 이 말을 들은 북한 관광총국 안내원이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화국(북한)에서는 더는 ‘아오지’라고 말하지 않소. 은덕(恩德)이라고 부릅네다”라고 전해주었다. 이름이 개명된 때가 80년대 초반으로 들었다. 어쨌든 아오지라는 지명은 오랜 세월 우리나라의 악명(惡名)높았던 탄광 지역 대명사였다.

6.25를 통해 북한은 지명이 달라지거나 새 이름을 붙인 데가 더러 있다. 맹동욱의 고향 성진(城津) 역시 김책(金策)시로 바뀐 지 오래다. 북한에서 김책(김일성 최측근, 6·25전쟁 때 사령관으로 사망) 이름은 북 주민들 누구나 아주 귀에 익다. 김책시, 군, 김책 대학, 김책 항구 등 50년대에 진작 새 이름 ‘김책’이 생겨 북 주민에게 회자됐기 때문이다.

해방 후 맹동욱은 고향 성진(함북)과 황해도 해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공산사회에 깊은 염증을 느낀 이 문학청년은 2번의 남쪽 탈출 시도가 실패하면서, 결국 함북 아오지 정치범 형무소(탄광)에 보내진 것이다.

잠깐 아오지를 들여다보자. 북한 아오지 탄광은 한반도 최대 규모의 탄광이다. 석탄 매장량만 150억 톤에 달한다. 남한 최대의 삼척탄광 매장량이 2억 톤, 호남지역 최대 화순탄광 매장량이 고작 4,200만 톤인 것과 비교한다면, 아오지는 엄청난 크기의 대규모 탄광이다.

또 아오지의 석탄 질(質)은 다른 탄광들에 비해 품질이 최상이라 한다. 무척 화력이 강하고, 유황성분이 별로 없고, 매연이 심하지 않고, 독한 가스가 별로 나오지 않아 일제 강점기부터 소문난 양질의 석탄 생산지였다.

일본은 해방 전부터 이 정평 있는 아오지 석탄을 조선반도 전국에 보급했다. 웅기(雄基)항(港)이 건설되자 강안(江岸, 회령-웅기) 철도를 이용해 일본에까지 가져갔다고 한다.

또 이곳은 노동 강도(强度)가 아주 드센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누구든, 북한 고위층조차 좌천될 경우 “아오지 탄광노동에 보낸다”는 유행어가 퍼질 정도였다. 6·25 때 체포돼 평생을 아오지에서 노동일을 하다 탈북했던 한 국군포로의 아오지 증언(證言)도 있다.

이제 제2부로 맹동욱 러 공훈예술가가 겪은 생생한 체험담이 이어진다. 6·25전쟁이 발발한 그 날은 그가 아오지에서의 첫 형무소 생활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해설=송광호 전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

투항하는 중공군들
투항하는 중공군들

죽음의 아오지

아오지. 함경북도 경흥군 두만강 연안에 있는 조선 제일의 무연탄광 지대인 함북 탄전 가운데의 하나. 그러나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이곳엔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나가는 사람은 없다는, 그래서 ‘죽음의 아오지’로 불리던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아오지는 죽음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매일같이 수십 명의 정치범이 시체가 되어 구덩이에 던져졌다. 내가 아오지에 도착한 첫날이 바로 1950년 6월 25일, 피의 일요일이었다. 그날 새벽 북한은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38선 전 지역에서 전면 남침을 감행했던 것이다.

수용소 소장은 우리 정치범들을 시멘트 바닥에 무릎 꿇어 앉히고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러댔다. “이 악질 반동 새끼들아! 너희들이 하늘같이 믿고 떠받들던 이승만 정권은 우리 위대한 김일성 수상동지의 진격명령을 받은 인민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 아직 너희들이 여기에 살아남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할 일인 줄 알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일 잘하는 놈만 남기고 나머지는 죄다 없애 버릴 테니까 알아서들 해라.”

수용소 소장은 가장 죄질이 나쁘고 악독한 강도, 절도, 살인자 등을 선택하여 ‘조장’으로 뽑아 우리를 감시하도록 했다. 이들 흉악범 조장들은 같은 죄인이면서도 보위 병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정치범을 괴롭히고 잔인하게 죽이는 대가였다.

그들은 인간 백정이었다.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옷을 홀딱 벗긴 다음 밧줄로 온몸을 결박했다. 그런 다음 입에다 똥 묻은 걸레를 틀어막고 빨갛게 달아오른 철사로 온몸을 인두질하는 것이다. 결박당한 몸을 뒤틀며 죽어가는 사람의 처절한 몸부림과 단말마적인 비명을 그들은 즐기는 것 같았다. 이들 흉악범 조장들이 아오지에선 실지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확성기에선 매일같이 쉬지 않고 인민군의 승리에 대해 떠들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서울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머지않아 위대하신 김일성 수상동지가 통일 정부의 수령이 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김일성과 스탈린
김일성과 스탈린

확성기의 떠드는 소리로 보아 전쟁은 북한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모양이었다. 이제 나는 한 가닥의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히 좌절된 채 무기력한 짐승처럼 하루하루를 견뎌 나가고 있었다.

아침 7시 컴컴한 감방에서 콩밥을 한 덩어리 먹고 지하탄광에서 온종일 석탄을 캐야 했다. 아침마다 수용소에서 탄광으로 가는 자갈밭 길을 맨발로 뛰었다. 대열 좌우에는 수십 명의 보위 병들이 자동소총을 겨누고 쉴 새 없이 욕질을 해가며 우리를 위협했다.

몸이 쇠약하거나 병이 걸려 뛰지 못하고 길에 쓰러진 사람은 그것으로 끝장이 난다. 그러니 누구든지 넘어지거나 대열에서 처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뛰어 가는 것이다.

수용소 주위는 나무도, 풀도, 다른 어떤 시설도 없는 완전히 텅 빈 공간에 자갈밭만이 한없이 이어졌다. 그 위를 북쪽에서 불어오는 모진 바람이 휘몰아쳤다. 탄광에 도착하면 보위병들은 우리를 흉악범 조장들한테 인계하고 자기들은 탄광 밖에서 경비를 섰다. 조장들은 우리를 즉시 탄광 입구에 무릎을 꿇려 앉혔다. 그런 다음엔 장작개비, 굵은 철사 등으로 덮어놓고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이 반동 새끼들! 이 염병하다 뒈질 놈들! 갱내에선 서로 말해도 안 되고 쳐다봐도 안 된다는 규칙을 세웠는데, 네 놈 새끼들은 그걸 제대로 지키는 새끼가 없다. 몽둥이맛을 보아야 정신을 차릴 테냐?” 몽둥이가 조각이 나고, 철사가 떨어져 나가면 나중엔 구둣발로 사정없이 찼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탄광에서 반항하거나 탈출을 기도할까 봐 미리 우리들의 기를 죽이는 일종의 경고수단이었다. 한바탕 매 맞는 의식이 끝나면 작은 등불과 안전모를 받아서 지하의 각자 할당된 구역으로 내려간다. 가스 냄새와 석탄가루로 금방 콧구멍이 막혀 와도 놈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지하탄광 속이 그래도 훨씬 나았다. 탄광에선 종일 석탄을 캐고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김일성과 해방 태극기 환영
김일성과 해방 태극기 환영

사람들은 공포와 위협에 질려 무조건 순종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탄광에서 나오면 아침에 매 맞던 입구 그 장소에서 매 맞는 의식을 되풀이했다.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이라도 내면 더 매질을 가했다. 만약에 놈들을 쳐다보다간 쳐다본다는 구실로 몇 곱절 더 맞아야 했다.

“야, 이 새끼야! 보긴 뭘 봐! 앞으로 한자리하면 날 잡으려고 봐두는 거야? 네 놈이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러면서 까무러칠 때까지 몽둥이로 후려쳤다. 아오지에 온 첫날 나는 멋도 모르고 남이 맞는 걸 보다가 일을 당할 뻔했다.

“너, 뭘 보는 거야? 남이 매 맞는 것이 그렇게 부러운가? 그럼 너도 소원대로 죽게 해주지.” 악질 조장이 내게 매질을 시작했을 때 갑자기 보위병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날 죽었을지도 모른다.

“일어섯!” 보위병 구령에 즉각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조장들 손에 맡겨졌다.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다시 수용소로 돌아갔다.

당시 내 나이 17세, 위대한 문호를 꿈꾸던 내 꿈은 아오지 생지옥 속의 매질과 굶주림, 시커먼 석탄가루 속에서 격심한 노동으로 허물어져 갔다. 확성기에서는 여전히 인민군이 승리하고 있으며, 적은 후퇴만을 거듭해 미군 괴뢰집단의 손으로부터 남조선이 해방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열변을 토해냈다. 나는 절망감에 빠졌다.

밤낮으로 승리의 행진곡을 내뿜던 확성기가 오늘부터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대신 포탄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놈들도 우리를 탄광으로 내몰지 않았다. 매 맞는 사람도, 피 흘려 쓰려지는 사람도 없었다. 기세등등했던 간수들도 풀이 죽어 있었다. 늘 콧노래를 부르던 박가 성의 간수도 더는 노래하지 않았다.

김일성과 스티코브(북한 군정사령관)
김일성과 스티코브(북한 군정사령관)

“이봐,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우리는 목소리를 낮추어 서로 소근 댔다. “전쟁에서 망하는 모양이야.” 또다시 대포소리, 공습경보가 울렸다. 우리는 비행기 소리와 먼 곳에서 폭탄이 작렬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살았다! 우리 편이 승리했다!” 우리는 작은 소리로 외쳤다. 빛이 보이는 듯했다.

다음날 우리는 수용소 내 넓고 음침한 외딴 건물로 옮겨졌다. 흉악범인 조장들까지도 다 감금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곧 철문이 활짝 열리고 자유의 몸이 되리라 믿었다.

10월 5일 아침 6시. 철문이 열리고 수용소 소장을 비롯하여 무장한 보위병 수십 명이 나타났다. 수용소 소장은 종이쪽지를 보며 번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250번, 205번, 60번…” 약 30명이 불려갔다. 그들은 기쁨에 넘쳐 가벼운 걸음으로 철문을 나갔다. 우리는 그들이 좋은 소식을 갖고 돌아올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약 20분가량 지났을 때였다. 수용소 담벼락을 스치는 날카로운 총소리가 들려왔다. 한방, 또 한방… 수용소 안은 일순 조용해 졌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 죽이려는 거다.” “하나씩 불러내 총살하는 거야.”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죽음의 공포가 수천 명이 수용된 큰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음날인 10월 6일 아침 6시. 어제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사람들이 어디로 간다는 걸 똑똑히 알기 때문에 번호를 불린 사람들은 얼굴이 금세 파랗게 질렸다. 또 계속해서 총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은 이제 무서운 것이 없었다. 쌓인 증오와 격분이 폭발되기 시작했다.

10월 7일부터는 불려나가는 사람들의 반항이 시작됐다. 전에 우리를 개 패듯 하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며 피 흘리는 놀이를 즐겼던 흉악범 조장들은 이제는 우리 눈치만 보며 우리 곁에 오는 걸 무서워했다.

1.4후퇴 때 서울 탈출-한강
1.4후퇴 때 서울 탈출-한강

이렇게 1주일이 지나자 꽉 들어찼던 감방이 반은 비게 됐다. 감방 안은 서로 얼굴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컴컴했다. 어둠 속을 기어 다니며 서로 통성명하며 이곳에 온 사연을 털어놓았다. 명천(明川)에서 살았다는 어느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나를 위로했다.
“우리야 살 만큼 살았으니 억울할 것도 없지만 앞길이 구만리인 어린 네가 가엾다.” 그 소리에 나는 쌓이고 쌓였던 설움이 폭발하여 서럽게 울었다. “그렇지만 얘야, 끝까지 마음을 굳게 먹어라. 쓰러지는 순간까지 희망을 버리면 안 돼.”

그런 중에도 신의주 학생사건으로 투옥된 고희준의 죽음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번호를 불리어도 감방 구석에 앉아 태연스럽게 노래를 불렀다. 간수 두 명이 강제로 붙잡아 일으키려 했으나 한순간에 쳐 눕히고 그들 목을 발로 밟았다.

“아무리 빨갱이가 부자간에도 총질한다고 하지만. 인간의 탈을 쓰고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이 죽음의 행진이 웬일이냐? 너희들도 인간이면 마음을 돌리고 우리와 같이 자유대한으로 넘어가자!”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따발총 소리가 들리더니 고희준 603호는 배를 움켜쥔 채 쓰러졌다.

고희준 사건이 있었던 후 3일 동안 계속 조용했다. 더는 6시가 되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은 한꺼번에 죽이려고 준비하는 게 틀림없어.” 누군가 한 얘기가 우리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졌다. 사람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생명의 본능마저도 상실해 버린 듯했다. 우리는 오래 고여 있어 썩어가는 물과 같았다.

다시 세상 밖으로

10월 15일 아침 6시. 오랜만에 철문이 열리고 수용소 소장이 나타났다. 이변에는 인민군 복장을 한 장교 3명이 같이 있었다. 소장은 전처럼 번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중에 나도 끼었다. 100여 명쯤 호명 당한 우리 정치범들은 감옥 현관 앞에 섰다. 나는 호위병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가 없었다.

김일성 부자
김일성 부자

“자,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너희들은 5년 이하의 선고를 받았고, 젊고 건강하기 때문에 오늘 날짜로 무죄판결을 내린다. 그 대신 조국에 봉사하기 위해 인민군대에 입대해 적과 용감히 싸워야 한다. 만일 도망가거나 적에게 투항하면 그 즉시 총살이다.”

우리는 어리벙벙한 채로 죽음의 아오지 수용소를 나왔다. 내게 벌어진 일이 현실 같지 않았다. 이렇게 석방되다니. 우리는 대열을 지어 자갈밭을 지나 큰길을 향해 걸어갔다. 인민군들은 우리에게 행진곡을 부르며 걸으라 했으나, 곡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죽음의 아오지는 보이지 않았다.

전쟁은 9월 15일 미 해병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 28일에는 서울을 다시 탈환했다. 그 여세를 몰아 10월28일에는 압록강 유역인 평북 초산까지 점령했다. 흩어진 인민군은 제각기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도망쳤다. 대세가 기울자 북한에서는 마지막 총알받이로 정치범까지 전쟁터로 몰아냈던 것이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남과 북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자일 수 없는 전쟁이었다. 전쟁을 도발한 김일성 집단의 사리사욕을 위해 온 민족이 희생당해야 했던 비극이었다. 아오지에서 받은 공포는 뼛속까지 스며들어 나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 대열은 조국 땅을 떠나 중국으로 후퇴해 갔다. 두만강에 이르니 벌써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새까맣게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후퇴하는 우리를 멸시와 분노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중공군 서울 일시점령
중공군 서울 일시점령

국경을 넘어 중국 도문 정거장에 도착해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복과 겨울모자, 체코제 군화를 받았다. 도문역전 광장에서 부대를 새로 편성했다.

나는 부대 중대장의 포병모집에 고등중학생들과 함께 지원했다. 중대장은 대열을 살피더니 나를 앞으로 세우며 분대장을 하라고 했다. 총 한번 쏘아보지 못한 내가 인민군대의 분대장이 된 것이다. 죽음의 아오지에서 곧장 중국 땅으로 넘어오자마자 생긴 일이다.

문득 아오지에 있던 정치범들을 생각했다. 경제범과 살인강도, 절도범들은 우리보다 먼저 인민군에 강제 입대했고, 마지막으로 건강한 정치범들을 입대시킨 후 몇 개 탄광을 폭파해버렸다는 소문을 이곳에서 들었다.

나는 매일 힘겨운 군사훈련을 받았지만, 아오지 생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오지에서 겪은 고통과 힘겨운 노동 덕에 나는 중대연대에서 모범전사가 되었다. 제2 군단사령부는 각 사단에서 우수한 상급전사를 추려내 소위급 군관으로 진급시켰다. 포병 군관학교가 창설되자 나는 사단 추천으로 군관학교로 가게 됐다.

전시(戰時)라 군관학교 3년 과정을 불과 2~3개월에 끝내야 했다. 담당 교관은 중국 출신으로 전투경험이 많았지만 무식(無識)했다. 그는 자신의 무식을 감추기 위해 엄격한 규율과 무서운 체벌로 우리의 기를 죽이려 했다. 훈시할 때 조금만 주의를 돌리면 한밤중에 옷을 벗긴 채 혹한의 어둠 속에서 떨어야 했다. 만주벌판의 칼날 같은 추위 속에서 벌을 받으면 금방 귀와 발이 얼어들었다.

교관은 “인민군대의 군관은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면 안 되고, 죽더라도 ’김일성 수령님과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부르며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하를 괴롭히는 것이 유일한 낙인 것 싶었다. 우리는 저항심을 잃고, 오직 명령에 복종하는 인간 로봇(Robot)일 뿐이었다.

그렇게 군관지휘 훈련을 받던 어느 날이다. 수업시간에 갑자기 나타난 군단 고관들 앞에서 군사시위를 하게 되었다. 사열을 받는 군단 고관 중에는 소련군 고문도 참가했는데, 맨 앞에선 장군의 얼굴이 낯이 익어 자세히 보니 바로 김철우 아저씨가 아닌가.

시위가 끝나고 그들이 가려고 할 때 나는 교관의 허가도 없이 대열에서 뛰어나가 “철우 아저씨 아닙니까?”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그도 나를 보더니 “이거, 동욱이 아니냐?” 하며 반가움에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계속)

김일성과 김구선생
김일성과 김구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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