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㊱] 개발협력으로 아프리카의 새로운 미래를 열다 – 이상훈 르완다 PIASS대학 교수
[아프로㊱] 개발협력으로 아프리카의 새로운 미래를 열다 – 이상훈 르완다 PIASS대학 교수
  • 이상훈(구호개발전문가, 르완다 PIASS대 교수)
  • 승인 2022.08.0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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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이상훈 교수(Piswa 묘목장에서)
이상훈 교수(Piswa 묘목장에서)

이상훈 교수는 우리나라 1세대 현장 구호활동가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의 수습간사였던 이상훈 교수는 1994년 르완다 내전이 발발하자 국경 너머로 피신한 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현장에 파견됐다. 그곳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가지자 더는 구호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워졌다. 그때 그가 선택한 대안은 개발협력 분야였다. 하지만 사전지식 없이 도전한 개발협력 분야는 모호했고 구호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 구호활동을 함께 했던 미국인 동료들이 개발협력 전문지식을 배우기 위해 본국에 돌아가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따라 이상훈 교수는 개발협력 분야를 제대로 공부하고 전문성을 갖추고자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역개발학 석사 과정을 마친 이상훈 교수는 한국인 최초의 국제기아대책기구 우간다지부 지부장으로서 에이즈로 고통받는 아동들을 후원하고 전쟁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을 도우며 현장경험을 쌓았다. 이후 카즈유키 사사키(Kazuyuki Sasaki) 교수의 적극적인 권유로 르완다 PIASS(Protestant Institute of Arts and Social Sciences)대학의 교단에 선 이상훈 교수는 오랜 갈등을 겪었던 르완다에서 화해와 용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사사키 교수의 생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학생들이 갈등의 원인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도록 정치학과 개발프로젝트 운영 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학생들도 서서히 인식을 바꾸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부터 생각이 점차 바뀌어 나간다면 르완다에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터. 한편, ‘나누리’라는 사회적 기업을 세우고 르완다 현지에 ‘나누리 메디컬센터’를 개원한 이상훈 교수는 의료혜택을 제공받기 어려운 르완다 주민들에게 공공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상훈 교수는 2018년에는 모교인 연세대학교로부터 ‘언더우드 선교상’을, 2020년에는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Korea NGO Council for Overseas Development Cooperation: KCOC)로부터 ‘든든한 동반자’상을 받았다.

Goma refugee camp
Goma refugee camp

아프리카대륙 구호현장에 투입되다

나는 격동의 시기인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하면서 민주화운동을 경험했다.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구조부터 뿌리째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급변하는 국제질서와 정치상황을 보며 고민 끝에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회구조보다 인간 내면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어떻게 하면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성경을 접하고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매듭은 풀렸다.

그때부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는 소명의식이 나의 삶을 지탱하는 중심추가 되었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신문을 정독하던 중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에서 제3세계에서 봉사할 기독교인을 찾는다는 공고를 발견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는 나의 소명을 굳이 우리나라에 국한하여 전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처음으로 한국이라는 사회 밖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이었다. 그렇게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마음속에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에서 간사로 수습과정을 밟던 중 1994년 르완다 내전이 발발했다. 구호활동이 필요했고 아프리카대륙에서도 오지에 위치한 난민촌에 직원 중 누군가 파견되어야 했다. 당시 나는 갓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한 달 경력의 수습 간사였지만 현장에서 부딪히기로 결심했다. 어찌 보면 상당히 무모한 결정을 내린 격이었다. 27살이던 내게 해외 경험이라고는 군대 제대 후 배낭여행으로 유럽을 두어 달 다녀온 것이 전부였고 영어 실력도 콩글리시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용기를 내 비행기에 올랐다. 최종 목적지는 르완다의 이웃 나라이자 당시 자이르라고 불렸던 현재는 콩고민주공화국에 위치한 난민촌이었다.

Uganda Kumi 후원아동 가정방문
Uganda Kumi 후원아동 가정방문

자이르까지 가는 길부터 만만치 않았다. 인도와 케냐를 경유해 르완다에 겨우 닿았고 르완다에서 자이르까지도 갈 길이 멀었다. 다행히 먼저 도착한 미국팀이 차량을 지원해줬다. 나는 그때까지 세계 각국의 NGO들을 불러 모은 상위 기구가 어디인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현장에서 유엔난민기구 간판을 보고 그제야 알았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선발요원으로 파견되어 종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 일하다가 급성간염에 걸려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했다.

2주 후 우리나라 의료팀이 도착했고 우리는 난민촌 한 곳을 맡았다. 난민들에게 의료 서비스와 급식 등을 제공하기 위해 본거지에서 난민촌까지 매일 2시간씩 비포장도로를 왕복하여 달렸다. 곧 피로감이 극에 달하며 구호팀 내 의료진과 비의료진 사이에서 종종 갈등이 생기곤 했다. 나는 의료진을 대신해 살림을 혼자 감당했기 때문에 힘이 부쳐 본부에 추가 인력을 요청했다. 다행히 케냐에서 선교 활동 중이던 자원봉사자가 합류하기로 했다. 그런데 지원자를 마중 나갔을 때 뜻밖에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덜컥 겁이 났다.

사실 그렇게 젊은 여성이 올 줄 상상하지 못했다. 실제 허드렛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 도망갈까 걱정됐다. 그런데 그녀는 빨래, 설거지 등 궂은일을 기꺼이 도맡았다. 덕분에 팀 분위기가 한층 더 밝고 가벼워졌다. 당시 나는 구호활동만 하러 왔다면서 그 외에 잡다하고 시시한 일들은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많이 지쳐 있었다. 하지만 때마침 나타난 여성 자원봉사자의 착한 마음씨에 이끌려 2주 만에 청혼했다. 24시간 함께 붙어 있다 보니 금세 가까워져 마음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아내도 같은 입장이었던 것 같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청혼을 수락했고 함께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살자고 약속했다.

Global Governance 강의(왼쪽), PIASS 대학 강의
Global Governance 강의(왼쪽), PIASS 대학 강의

개발협력 전문가로 거듭나다

나는 난민촌에서 수년간 구호활동을 펼치다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Nairobi)에 위치한 기아대책기구 지원사무소로 옮겨 개발협력분야에서 아동복지와 지역개발 등을 담당했다. 케냐 체류 중 딸 둘이 나란히 태어나 잠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었다. 혼자라면 상관없겠지만 딸들이 태어나니 생계문제나 교육, 의료 등 현실적인 조건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함께 구호활동을 했던 미국인 동료가 귀국 후 개발협력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 처음 개발협력이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학문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자못 놀랐다. 구호활동에서 개발협력 분야로 옮기면서 나는 늘 개발협력의 본질과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결국 오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미국에 가기로 결심했고 컬럼비아대학교 지역개발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유학자금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기아대책을 세우기 전에 네가 앞으로 살아갈 대책부터 세우라’며 놀렸던 대학 동창과 친인척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줬다. 가족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고 유학 중 막내아들까지 태어나 생활이 빠듯했지만, 유학생활을 통해 개발협력 전문지식을 얻고 다양한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개발협력의 맥락을 이해하고 전체적인 구조를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도 생겼다. 미국 유학은 여태껏 단순한 구호활동가에 가까웠던 내가 장기적인 개발협력 전문가로 거듭나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국제기아대책기구 우간다지부 지부장으로 임명되어 다시 아프리카대륙으로 돌아갔다. 직원 100여 명에 연간 3백만 달러의 예산을 집행하는 막중한 지위였다. 부담이 크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장기적인 개발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 감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루에 40~50개의 이메일을 처리하고 각종 회의와 서류작업, 직원관리 등 업무가 쏟아지는 일과가 매일 반복됐다. 과중한 업무량과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렸으며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처음에는 우왕좌왕했다. 전부 내려놓고 싶은 충동이 들다가도 한국인 최초로 대규모 단체의 현장 책임자를 맡았다는 사명감에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난관들을 헤쳐나갔다.

농업사업 평가작업
농업사업 평가작업

내가 지부장으로 근무하던 4년간 국제기아대책기구 우간다지부는 우간다 어린이 5,700여 명을 후원하고 에이즈로 고통받는 500여 가정을 돌봤다. 그리고 북부 우간다에서 살아가는 전쟁 난민들의 식량과 식수를 구하는 한편, 전쟁으로 미혼모가 된 100여 여성들의 정신과 치료와 재활 훈련을 도왔다. 많은 사람이 우간다의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가 빈곤이라 생각하지만 빈곤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여아 성폭행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차일드 마더(Child Mother)’라는 단체와 협력해 전쟁터에 끌려가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을 한 아동들의 재활을 돕고 소송을 도왔다. 이처럼 나는 주어진 4년 동안 최초의 한국인 지부장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맡은 바 책임을 다했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르완다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교단에 서다

2010년 6월, 우리 다섯 식구는 우간다를 떠나 르완다에 도착했다. 내가 르완다 PIASS(Protestant Institute of Arts and Social Sciences)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기 때문이다. 박사 과정을 수료하지 않은 만큼 나는 교수가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교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같은 대학 개발학과에 재직 중이던 카즈유키 사사키(Kazuyuki Sasaki)교수의 추천 덕분이었다. 카즈유키 교수는 다양한 현장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명문대학교에서 개발협력을 공부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나와 학교를 설득했다. 나는 카즈유키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개발학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개발학을 배우려면 사회 전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철학, 종교 등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꼭 그렇게 깊게 들어가지 않더라도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역사학의 기본 지식을 갖춘다면 깊이가 달라진다. 그래서 카즈유키 교수가 이끄는 개발학 과정도 2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먼저 1~2학년을 대상으로 전공 기초 수업으로 정치, 경제, 사회학과 통계, 회계 등을 가르친다. 이후 3~4학년들은 본격적인 전공수업을 배우게 되는데, 프로젝트 운영, 조사 방법론, 평가 방법론 등 보다 더 실무적인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프리카국가 소재 대학에서 개발학은 졸업 후 국제연합(United Nations: UN)이나 국제 NGO로 취업할 수 있는 전도유망한 학과에 속한다. 나는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한 내용을 기반으로 직접 진행한 프로젝트나 현장에서 접한 경험을 활용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폭넓은 학문적 이해와 함께 아프리카대륙의 개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카즈유키 교수는 원래 농학자로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전수하고자 에티오피아에서 다년간 활동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 사회 내부를 들여다보니 단순히 농업기술이 부족해 가난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가난의 근본적 원인은 갈등이었다. 그건 이웃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그는 갈등 문제를 심도 있게 공부하고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후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무엇보다 화해와 용서를 가장 먼저 강조했다. 나도 그의 생각에 크게 공감한다. 많은 아프리카 국가는 갈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발전하기 어렵다. 특히 르완다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새로운 미래를 열기 어렵다.

내전을 되풀이해온 르완다는 지금이 가장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시기다. 하지만 언제 다시 충돌이 일어날지 모른다. 국민 대다수가 과거 자신의 가족을 죽인 사람과 한 마을에서 살고 있으니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채 잠재해 있는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정치학 및 개발프로젝트와 관련된 내용을 강의했다. 여러 가지 사례연구를 통해 인간 사회의 갈등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이러한 노력이 통한 걸까. 서로 다른 민족의 학생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고 교류하는 감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사다난한 과거를 지나온 르완다의 투치와 후투는 사실 얼굴만 봐서는 구분하기 어렵다. 같은 환경에서 10세기 넘게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다. 비슷한 외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강단에 서면 단박에 구분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두 민족이 결코 함께 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즈유키 교수와 나를 비롯한 교수진들은 학생들이 갈등 문제의 내면과 이면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도록 정말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그 결과 4학년이 됐을 때 학생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음을 발견했다. 심지어 2년 전에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강력하게 반대했음에도 투치와 후투로 이뤄진 캠퍼스 커플이 결혼에 성공했다. 이는 젊은 세대의 의식이 점차 바뀌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러한 변화에 작게나마 일조할 수 있어 정말 기뻤고 강단에 서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나누리 병원
나누리 병원

봉사와 경제구조 사이의 균형을 갖춘 나누리 메디컬센터

르완다는 의료수준이 열악한 나라다. 인구 1,200만여 명에 의사는 900여 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2013년, 교회 후배이자 개인 후원자였던 박준범, 백지연 의사 부부가 르완다에서 1년간 의료 봉사를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각각 내과와 소아과 전문의인 두 사람은 매년 활동 기간을 연장하다가 아예 집을 팔고 돌아와 병원을 짓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나는 의료인이 아닌 만큼 병원을 운영하는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는 터라 망설여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열정이 곧 내 마음을 움직였고 학교를 짓기 위해 마련해둔 부지 일부를 병원을 세우기 위해 내놓았다.

우리는 십시일반으로 헌금한 돈을 모으고 선교사들 개인의 희생을 통해 공사비용을 마련한 끝에 드디어 ‘나누리 메디컬센터’를 세웠다. 르완다에서는 할 수 없었던 대장내시경 설비를 도입했고 최근에는 물리치료사도 합류했다. 르완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고 선교의 뜻이 워낙 강한 부부는 이들을 최대한 무료로 진료를 하려 했다. 하지만 무료 진료만으로는 병원이 계속 운영될 수 없을 것이 자명했다. 그래서 나는 무료 진료를 하는 만큼이나 오랫동안 의료봉사를 지속할 수 있는 금전적 자원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렇게 부부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은 무료 진료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유료 진료를 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또한, 개발협력의 관점에서도 ‘무료’가 가지는 부정적 효과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이 단순히 바깥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자연스럽게 내부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칫하면 오히려 스스로 해결할 의지나 자립심을 꺾는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의료분야에도 엄밀히 시장이 존재한다. 무료로 약을 나눠주면 현지 병원과 약국의 수요를 감소시켜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본의 아니게 시장을 왜곡시켜 결과적으로 의료산업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무료로 진료를 하다 보면 굳이 병원치료가 필요 없는 경미한 환자들까지 찾아와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길이 닿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따라서 이들을 가려내기 위해 불가피하게 행정절차를 추가해야 한다. 이런 문제는 사실 선교 병원뿐 아니라 전 세계 원조 기관들이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들 부부 역시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의료봉사와 현지 경제구조 사이에 균형을 맞추며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아프리카 이웃을 위해 마음속에 마련한 자리

사람들은 종종 내게 말한다.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은 많다고.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이웃이 없다. 마음속에 이웃이 없으면 세계 이웃과 공존할 수 없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반박한다. 가난한 사람이 한국에만 많은 것은 아니라고. 한편,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내가 굳이 아프리카대륙에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다 이해하고 있다. 국내의 가난한 사람이나 해외의 가난한 사람이나 다 귀하다.

더구나 아프리카대륙의 가난과 우리나라의 가난은 비교할 수 없다. 아프리카대륙의 절대 빈곤은 우리의 가난과 비교 대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며 사는데 먼 이웃에 관심을 두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 자국중심주의에 빠져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웃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도 이웃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줄 알아야 한다. 어려워도 버티다 보면 더 오래 버티는 힘이 생기고 그만큼 포용력도 커진다.

르완다 학살 추모공간
르완다 학살 추모공간

나는 이웃에 대한 마음 없이 자원활동에 대한 환상만을 품고 왔다가 후회하는 젊은이들을 많이 봤다.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거나 아예 도착하자마자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기대했던 것과 달라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실망감을 자주 표현했다. 자원활동이라는 것이 원래 궂은 일이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환경을 탓하는 것은 이 일을 왜 하려 하는지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 채 왔기 때문이다. 가치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과 아름다운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다르다.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하는 일은 당사자에게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일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의 기회를 박탈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선택을 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아프리카대륙의 이웃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Men look for better methods, but God looks for better men.” 나는 미국의 성직자 어윈 W. 루처(Erwin W. Lutzer)가 남긴 이 글귀를 좋아한다. 좋은 마음의 밭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자신에게 맞는 방법 즉, 길을 찾게 된다는 의미를 품은 글귀다. 젊은 세대들도 방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원활동을 왜 하려고 하는지 스스로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보고 뜻을 세우기를 바란다.

한번은 나누리 메디컬센터의 박준범 의사로부터 버려지는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족들이 힘들고 지쳐 더는 찾지 않은 채 방치되는 것이다. 그는 병실에서 죽음만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해줄 것이 없다며 마음 아파했다. 결국 우리가 하는 자원활동의 의의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지키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개발협력 또한 필요한 것이다. 나는 임종을 앞둔 르완다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호스피스에도 힘쓰고 싶다. 아프리카대륙에 있는 이웃들이 우리 마음속 자리에서 따뜻하고 편하게 쉴 수 있기를 바란다.

Piswa 후원아동
Piswa 후원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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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 2022-08-17 01:27:47
세상엔 존경받을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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