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㉓] 사도하자전투 전적지: 일본과 만주국의 연합군이 덫에 걸리다
[아! 만주㉓] 사도하자전투 전적지: 일본과 만주국의 연합군이 덫에 걸리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2.08.2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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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의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대흥구진 후하촌의 느릅나무(1931년 2월 5일, 일본 토벌대가 중국공산당 왕청현위 서기 김상화의 목을 잘라 효시했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대흥구진 후하촌의 느릅나무(1931년 2월 5일, 일본 토벌대가 중국공산당 왕청현위 서기 김상화의 목을 잘라 효시했다.)

연변조선족자지주 후하촌(后河村; 吉林省 延邊朝鮮族自治州 汪清縣 大興溝鎭)에 도착했다. 김상화(金相和) 열사 기념비가 서 있다. 여느 기념비에 비해 웅장하다. 김상화는 1920년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유격대를 지휘하다, 1931년 2월 일본 토벌대에 목이 잘린 인물이다. 그의 목은 마을 한복판 느릅나무에 한동안 매달려 있었다. 한인이더라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한 인물은 중국 정부가 보란 듯이 기념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이념에 따른 선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공산주의 계열이든, 민족주의 계열이든 오직 항일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느릅나무 아래에서 잠시 머뭇대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도하자(四道河子)’라는 기념비가 눈에 들어왔다. 차를 멈춰 섰다. 왕청현 인민정부가 건립한 ‘사도하자 학살 사건’ 기념비였다. 1935년 정월 대보름, 스물여덟 가구의 산간벽지에 100여 명의 일본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네 갈래로 흐르는 강 때문에 항일유격대의 근거지로 오인한 것이었다. 일본 토벌대는 다짜고짜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1시간 만에 57명의 양민이 숨을 거두었다. 일본 토벌대가 물러가자 삼도하자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리고 밀짚 더미 속에 숨겨둔 어린아이 8명을 구해냈다.

그러나 정작, 목적지로 삼은 사도하자전투 전적지는 멀고 멀었다. 길림성에서 흑룡강성으로, 성(省)을 달리해야 했다. 그래도 대륙의 너른 땅에 제법 이골이 나서 그러려니 한다. 사도하자전투 전적지는 흑룡강성 영안현(寧安縣)에 위치하고 있다. 인근에는 발해의 5경(五京)으로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위치하고 있다. 이래저래 한 번쯤은 둘러볼 만한 곳이다. 드디어 사도하자 전적지에 도착했다. 드론을 띄워 주변 지세를 살펴봤다. 1933년 4월 15일 새벽, 한국과 중국의 연합군이 이곳의 지세를 활용해서 놓은 덫에, 드디어 일본과 만주국의 연합군이 걸려들고 말았다. 

길림자위군과 길림구국군의 반만항일운동 전개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당시 동북지역의 군벌 장학량(張學良)은 일본군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과 충돌을 피하라’는 국민당 정부의 명령에 따라 저항하지 않았다. 일제는 동북지역을 손쉽게 석권했다. 그리고 1932년 3월 푸이(溥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앞세워 만주국(滿洲國)을 수립했다. 그러나 동북지역의 인민들은, 국민당 정부의 노선과 달리, 자진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더구나 만주국이 수립되면서부터는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일제히 몰아내겠다는 목표로 반만항일운동(反滿抗日運動)을 전개했다. 

반만항일운동은 봉천군벌(奉天軍閥) 계열의 지방주둔군,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 세력, 공산주의 계열의 무장 세력, 그리고 대도회(大刀會), 홍창회(紅槍會) 같은 농민 위주의 자위단이 참여했다. 이들은 ‘반만항일(反滿抗日)’의 기치를 내걸고 독자적으로 혹은 연합작전을 통해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공격했다. 이때 지청천(池靑天)의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이두(李杜)의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왕덕림(王德林) 예하 오의성(吳義成)의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사도하자학살사건유적지(四道河子慘案地) 기념비
사도하자학살사건유적지(四道河子慘案地) 기념비

길림자위군은 북만주 일대에서 친일, 매판적 정권에 반대하는 10개 현(縣)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군소(群小) 세력이었기에 가능한 여느 무장 세력과 연합하고자 했다. 한국독립군이 길림자위군과 연합투쟁을 벌인 것도 이러한 특성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길림자위군은 1932년 2월 하얼빈(哈爾濱), 쌍성(雙城) 등지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러자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토벌에 나섰다. 이에 1933년 1월 소련 영내로 퇴각했다. 이후 길림자위군의 잔존부대는 대도회(大刀會), 홍창회(紅槍會) 등과 연합하여 명맥을 이어갔다. 

한편 길림구국군은, 길림자위군이 동북군(東北軍, 東北邊防軍) 출신의 정규군이었던 것과 달리, 자발적으로 분기한 인민들의 대오(隊伍)였다. 구국의 일념으로 일떠선 무장 세력이었기에 병력이 1만5천 명에 이르렀다. 1932년 3월 영안현(寧安縣)을 점령하고 본부를 동녕현(東寧縣)에 두었다. 장기 항전체제를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33년 1월 간도파견군의 대토벌로 대오가 흐트러졌다. 그래도 오의성은 잔존부대를 이끌고 길림자위군과 연합작전을 펼치며 항전을 이어갔다. 

한국독립군과 길림자위군의 한중연합투쟁 개시: 서란현전투

한국독립군 참모장 조경한(趙擎韓)이 오상현(五常縣)과 서란현(舒蘭縣)에서 270명의 병력을 모집하고, 사령부가 위치한 방정현(方正縣)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중에 길림자위군 소속 사복성(謝復成) 부대와 조우했다. 병력은 2,000여 명 규모였다. 조경한은 사복성과 의기투합했다. 조경한은 무기가 필요했고, 사복성은 병력이 필요했다. 한국독립군은 길림자위군 내 유격독립여단(遊擊獨立旅團)으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장총 200정, 소총 70정, 탄환 5,000발, 수류탄 1,200개를 지원받았다. 한중연합군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1932년 1월 29일, 한중연합군은 서란현(舒蘭縣) 현성(縣城)을 공격했다. 현성에는 일본군 1개 분대, 만주국군 1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길림자위군은 현성을 동, 서, 남, 삼면에서 공격했다. 한국독립군은 북문 밖 20여 리 골짜기에 매복했다. 사복성 부대의 기습으로 2시간 30분간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과 만주국군은 압도적 병력의 사복성 부대를 당할 수 없었다. 북문을 통해 이통현(伊通縣) 방향으로 퇴각했다. 예상이 적중했다. 한국독립군은 매복 지점에서 사격을 가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150여 명을 살상했다. 소총 121정, 탄환 8,000여 발, 박격포 2문, 포탄 22상자, 피복 100여 벌, 군마 5필도 노획했다. 

한중연합군은 이틀 후 서란현에서 액목현(額穆縣)으로 이동했다. 그러던 중 장광재령(張廣才嶺)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2개 대대와 마주쳤다. 느닷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장광재령은 백두산의 지맥으로 험준하기 짝이 없었지만, 한중연합군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지세를 활용하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200여 명을 살상했다. 또한 만주국군 500여 명이 투항했다. 적군의 사기가 꺾이자, 한중연합군은 액목현도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할 수 있었다. 

사도하자전투 전적지(흑룡강성 영안현에서 북쪽 방향, 1933년 4월 15일 한국독립군과 중국구국군으로 구성한 중한연합토군이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어 유인작전을 설계했다.)
사도하자전투 전적지(흑룡강성 영안현에서 북쪽 방향, 1933년 4월 15일 한국독립군과 중국구국군으로 구성한 중한연합토군이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어 유인작전을 설계했다.)

한중연합군은 액목현에 주둔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1932년 3월 말 중동철로(中东铁路)를 따라 북상했다. 그러다 오상현(五常縣) 납봉산(拉鳳山)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1개 사단 규모의 연합부대와 맞닥뜨렸다.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이미 한중연합군의 이동을 간파했던지라, 1시간 남짓한 격전이었지만 한중연합군의 피해는 막대했다. 이후 사복성 부대는 동만주로 향했고, 한국독립군은 방정현의 사령부로 향했다. 우연한 조우, 그리고 두 세력의 의기투합으로 이루어진 약 두 달간의 한중연합투쟁이었다.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의 한중연합투쟁 확대: 경박호전투, 사도하자전투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당중앙회의를 소집했다. “군사 활동을 동만(東滿; 연길, 화룡, 왕청, 동녕, 훈춘, 영안 등)으로 한정하고, 그곳의 길림구국군과 한·중 합작을 추진한다”라고 의결했다. 길림구국군이 간도파견군의 대토벌로, 당시 해산 위기에 놓였기에 상생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즉 일제는 1932년 4월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을 간도파견군으로 출병시켰다. 왕덕림은 동만의 산야에서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베리아로 퇴각했다. 이후 왕덕림 예하 오의성이 길림구국군 총사령 대리로서 시세영(柴世榮)의 잔존부대를 지휘했다. 

1933년 1월 한국독립군이 시세영 부대와 연합했다. 연합군의 명칭을 중한연합토군(中韓聯合討軍)으로 정하고, 활동 본거지를 동만 및 중국과 소련의 국경지역으로 삼았다.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중한연합토군이 동만으로 이동했다. 

1933년 2월 경박호(鏡泊湖)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1개 대대가 동경성(東京城)에서 경박호 쪽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중한연합토군은 호수 주변 계곡의 양쪽 기슭에 매복했다. 과연 일본군 전초부대가 매복 지점을 지나갔다. 중한연합토군은 후속부대가 빙판으로 걸어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후속부대가 타격 범위에 들어왔다. 중한연합토군은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불의의 기습에 응전하지 못했다. 이로써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했다. 총기 70정, 실탄 6,000여 발도 노획했다. 

1933년 3월 중한연합토군이 사도하자(四道河子)에 주둔했다. 이때 원종교(元宗敎) 신도 500여 명이 교주 김중건(金中建)의 유언에 따라 한국독립군에 가담했다. 김중건과 지청천의 교분이 평소 두터웠을뿐더러 노선도 같았기 때문이다. 자원하여 입대하는 한인 청년들도 증가했다. 한국독립군의 군세는 나날이 높아갔다. 그러자 4월 14일, 영안현(寧安縣)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연합부대가 중한연합토군의 세력 확산을 막기 위해 공격을 준비했다. 그런데 마침, 중한연합토군이 미연에 이 정보를 입수했다. 

길림자위군의 행진
길림자위군의 행진

중한연합토군은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어 유인작전을 설계했다. 요컨대 소부대의 유인, 주력부대의 매복과 공격, 그리고 퇴로의 차단이었다. 4월 15일 새벽, 일본군과 만주국군 약 1사(師) 병력이 영안현 황가툰(黃家屯)에서 이도하자(二道河子)를 거쳐 사도하자(四道河子)로 진격했다. 유인작전에 걸려든 것이었다. 중한연합토군은 매복 지점에서 맹공을 퍼부었다. 퇴로도 끊겼기에 일본군과 만주국군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과반수의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패잔병도 중한연합토군의 추격에 목숨을 잃었다. 중한연합토군은 승세를 몰아, 5월 2일 목림자(木林子), 주가툰(朱家屯), 황가툰(黃家屯)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잔존병력도 20여 차례 전투 끝에 섬멸했다. 

한국독립군에서 한국광복군으로 독립전쟁을 전개

중한연합토군이 승전을 거듭하며 군수 물자를 노획하자, 길림구국군 총사령 대리 오의성이 본대를 이끌고 중한연합토군을 흡수했다. 독자적으로 작전을 펼쳤던 시세영 부대는 오의성 휘하로 편제될 수밖에 없었고, 한국독립군도 오의성이 지휘하는 길림구국군과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의성 부대에는 공산주의 세력이 왕성했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출신 주보중(周保中)이 참모장으로서 지휘권을 발동하고 있었고, 한인 공산주의자로 구성한 왕청유격대, 훈춘유격대 등 별동대(別動隊; 항일 게릴라 조직)도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사실 한국독립당, 한국독립군은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지도자 김좌진(金佐鎭)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창건한 조직이었다. 공산주의 운동이 확산하는 데 맞서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하려는 의도였다. 당연히 반공적 색채를 띠었으나, 오의성이 지휘하는 길림구국군과 연합으로 공산주의 세력과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보중은 한국독립군의 공산화 공작을 주도했다. 음해와 모략이 난무했고 대립과 갈등이 촉발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주보중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오의성의 명령조차 무시할 정도였다. 

반면 한국독립군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게다가 연변지구 한인들이 대부분 좌경화되어 갔다. 활동 기반이나 동력도 사라진 것이었다. 이 기회를 노려, 주보중이 시세영과 야합하고 한국독립군에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그렇다고 한국독립군이 순순히 응할 리는 없었다. 그러자 오의성의 명령을 빙자하여 2개 사(師)를 동원하고, 지청천 이하 지도부 요원 80여 명을 구금했다. 그리고 한국독립군 부대를 포위하여 강제로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독립군 간부 330여 명이 체포되었다.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기념사진(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기념사진(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

위기의 순간에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이자 한국독립군 참모장 조경한이 나섰다. 그제야 오의성도 한국독립군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 주보중의 음모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오의성은 주보중을 비롯하여 길림구국군 내 공산주의 세력을 축출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한국독립군 간부들은 풀려났지만, 더 이상 길림구국군과 연합할 수 없었다. 지청천은 독자적인 활동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미 북만주에 공산주의 세력이 만연할뿐더러 일본군이 동북지역, 특히 나자구(羅子溝) 일대에 대한 토벌 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진퇴양난에 처했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청천에게 새로운 계획을 전달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협조하에 한인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광복전쟁을 이끌 핵심 간부로 양성할 계획이니 교관 겸 책임자로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지청천은 조경한 등 한국독립군 핵심 간부 및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킬 한인 청년 40여 명을 선발하여 관내로 이동했다. 사실상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잔존부대가 북만주에 남아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활동은 미미했다.

관내로 이동한 한국독립군 지도부, 그리고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서 육성한 한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결국 1940년 9월 충칭(重庆)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했다. 구한말 의병 봉기로부터 1910년대 만주지역으로 망명과 무관학교 운영, 1920~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전개, 1940년대 한국광복군 창설과 연합작전, 그리고 광복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한국독립운동사는 그야말로 좌절과 극복, 위기와 영예, 그러한 굴곡과 파란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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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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