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철 회장, “제주 4.3때 고향에서 희생자가 많았어요”
현봉철 회장, “제주 4.3때 고향에서 희생자가 많았어요”
  • 제주=이종환 기자
  • 승인 2022.09.2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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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주민 3분의 1이 희생돼… 현 회장의 조부와 고모, 선친도
현봉철 회장 가족

(제주=월드코리안신문) 이종환 기자

“앞에 보이는 백사장에서 동네 사람들이 희생됐어요. 저희 고모도 여기서 아들 둘과 함께 희생됐다고 들었습니다.”

현봉철 회장이 바다 쪽으로 펼쳐진 모래벌판을 가리키며, 제주 4.3 사건 때의 얘기를 꺼냈다.

썰물 때였는지 백사장은 큰 벌판을 이루고 있었다. 제주 표선면에 있는 바닷가였다. 지금은 표선해수욕장으로도 여름이면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제주에 간 것은 추석 직후인 9월 14일이었다. 현봉철태권도장학재단 모임에 참여했다가, 현 회장의 고향인 표선면도 둘러봤다.

제주4.3사건은 미군정 때인 1947년 3월1일부터 6.25가 끝난 1954년 9월21일까지 7년 7개월간 제주도에서 발행한 무력충동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1947년 3.1절 기념식을 마친 군중들이 가두행진을 할 때 한 어린이가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차인 것이 계기가 됐다. 군중들이 경찰을 향해 돌팔매질을 했고, 경찰은 이를 경찰서 습격 의도로 오인하고 발포를 했다. 군중 6명이 사망하고 시위 관련자들의 끌려가자 제주도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3.1발포사건은 남로당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좌파세력을 충동해 총파업을 유도했다. 주민들과 경찰의 충돌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듬해에는 남로당의 주도로 무장봉기도 일으켰다. 1948년 4월 3일 새벽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의 경찰지서 가운데 12개와 우익인사의 집을 일제히 습격했다. 4.3사건이라는 명칭도 여기서 유래한다.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5.10 선거를 앞두고 있던 군정청은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육지에서 서북청년단과 응원경찰을 증파했다. 이들은 제주 방언을 알아듣지 못해 주민들과 일본어로 소통했다는 얘기도 있다.

왼쪽부터 현 회장 형, 누나, 자형

무장 빨치산들은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선거관리사무소도 공격했다.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미군정청은 평정작전을 시작했다. 토벌전이었다.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중앙정부도 뒤를 이어 대대적인 토벌전에 나섰다. 여순반란은 제주도로의 토벌대 파견에 반대해 일어난 사건이다.

10월 17일 제주도경비사령부는 포고문을 내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해안선에서 5km 밖의 산간지역은 통행을 금지하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포고령 소식이 고향 마을에 전해진 것은 음력 10월 15일이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집을 비우고 빨리 마을을 떠나야 했습니다.”

제주 표선면 가시리가 현봉철 회장의 고향이다. 현 회장은 그때 태어난 지 보름이 된 갓난아기였다. 당시 27세였던 부친은 포고령이 내리기 전, 일본 밀항선을 타겠다면서 집을 떠나고 없었다.

현 회장의 어머니는 당시 8세였던 누이 현금자씨, 4살이었던 형 현봉길 씨를 데리고 외갓집으로 갔다. 외가는 남원읍 신흥리에 있었다. 여듧살짜리 누이는 이불을 지고, 현 회장은 애기 구덕에 담겨 갔다고 한다.

현 회장의 얘기는 고향마을인 표선면 가시리로 이동해서, 더욱 자세하게 이어졌다. 해안가에서 7-8km 떨어져 있는 가시리 마을은 한라산 중턱에서 넓은 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시리 집에는 형인 현봉길 씨가 살고 있었다. 가시리의 집을 찾아가자 현 회장의 누이인 현금자 씨와 자형인 오상식 씨(86세)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4.3사건 당시 13세였던 자형 오상식 씨는 가시리 출신으로 세무공무원을 퇴임했다고 한다.

“가시리는 4.3 때 제주에서 세 번째로 희생자를 많이 낸 마을입니다. 확인된 피해자 수만 412명에 이릅니다. 신고할 사람이 없는 집이거나 어린애들의 이름은 피해자 명단에서 빠졌는데, 이들을 합치면 더 많습니다.”

오상식 씨는 이렇게 소개하며, “당시에는 아버지나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폭도 가족이라고 해서 다 죽였다”고 말했다. 어린애들도 함께 죽였다고 한다. 당시 가시리에는 300여 호 살았는데, 마을사람 3분의 1이 희생됐다.

“할아버지와 고모도 그때 목숨을 잃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먹을 것 챙겨서 내려오신다고 마을에 잠시 돌아가셨다가 주검으로 발견됐고, 고모는 아들 둘과 함께 폭도 가족으로 분류돼 표선 백사장에서 희생됐습니다.

당시 8살이었던 현금자씨의 얘기다. 고모부는 혼란을 피해 육지로 배를 타고 일찍이 떠났다고 한다, 남아 있던 고모는 어린 아들 둘과 함께 하산인원을 수용한 표선국민학교에 가 있다가 폭도 가족으로 분류돼 결국 희생됐다. 당시 멀지 않은 친척이 경찰이어서 다른 데로 가지 않고 표선으로 내려간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모는 최후의 순간 동서한테 두 아들중 하나만이라도 맡아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해 어린애 둘과 함께 희생됐다. 동서 역시 같은 또래 아이 셋이 있어서 도저히 받아줄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 집안과는 지금도 서먹한 관계라고 현금자 씨는 말했다.

“4.3 당시 마을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경찰에 있었어요. 친척이어서 그를 믿었는데 도움을 받기는커녕, 그로 인해 마을에서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고 해요.”

폭도 가족을 죽일 때는 총이 아니라 죽창을 사용했다고 한다. 심지어 코를 꿰서 끌고 가고, 가둬놓고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해변가에 의지할 친척이 없는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가 억새밭에 숨었다가 불타 죽기도 했다. 현 회장의 할아버지도 누가 죽였는지 나중에 알게 됐다고 한다. 서로 가까운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잔인한 시기였다.

현 회장의 부친은 일본 밀항선을 타겠다면서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됐다. 현 회장의 어머니는 남편이 돌아올까 미련을 가진 채 평생 가시리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현 회장이 부친의 희생 소식을 알게 된 것은 모친이 타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4.3희생자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제주공항에서 유해가 나왔다. 당시 많은 사람이 제주공항 자리에서 희생됐는데, DNA 감식으로 알게 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낮에는 토벌대가 오고, 밤에는 산사람들이 내려왔습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현봉길는 불과 네 살 때여서 당시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자라면서 들은 수많은 얘기들은 기억하고 있다. “육지사람과는 결혼하지 말라”는 얘기도 수없이 들었다.

제주 4.3은 70여 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도 제주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특히 희생자를 많이 낸 가시리의 상처는 더 깊다. 빨치산 혹은 ‘산사람’들 보다는 대한민국의 군경들에게 당한 상처가 더 커서, 더 쓰리고 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을 전혀 모릅니다.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일본 해군에 복무하다가 광복을 맞았다고 들었는데, 혹시 일본에라도 사진이 있을까 하고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가시리 마을을 떠날 때 현 회장이 남긴 말이다. 현 회장은 쿠웨이트에서 건설업을 경영하면서, 현재 민주평통 중동협의회장도 맡아 봉사하고 있다. 쿠웨이트한인회장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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