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80] 건청궁의 가을 하늘
[유주열의 동북아談說-80] 건청궁의 가을 하늘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11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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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영정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영정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말인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을미사변의 보고를 받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첫 반응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의 법궁 경복궁에 밀어닥친 일본 낭인들은 고종과 왕비(명성황후)의 처소 건청궁으로 몰려갔다. 장안당의 고종을 겁박한 후 왕비의 침전 곤녕합에서 겁에 질려 있는 여인들을 무차별 칼로 찌르고 도망치는 한 여인을 뒤쫓아 살해했다. 낭인들은 왕비의 시신을 찾아 불태웠다. 조선의 국모는 날이 밝아오는 건청궁의 가을 하늘에 한 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일본 정부의 계획은 용의주도하였다. 기쓰네가리(狐狩り, 여우사냥)라는 작전명으로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자로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 후임 공사가 맡았다. 왕비를 제거하되 외관적으로 왕실 내부의 알력에 의한 정변으로 위장했다. 그날 건청궁에서 당직을 섰던 우크라이나 청년 세바틴이 목격하여 베베르 러시아 공사를 통해 황제에게 보고됐다.

매년 10월이면 먹먹하면서 복잡한 마음으로 경복궁의 건청궁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일 역사 갈등의 원점의 하나인 을미년의 ‘사변’ 아니 ‘왜변’은 일본 사람도 부끄러워해 입에 올리기 꺼리는 문명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야만적 폭거였다. 사바틴의 구체적 기록이 없었다면 역사의 뒤안길에 영원히 묻히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그의 조국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금년, 위험을 무릎 쓴 사바틴의 현장 기록이 새삼스럽다.

건청궁 전경[사진=문화재청]
건청궁 전경[사진=문화재청]

사바틴의 아버지는 당시 러시아 영토인 우크라이나의 남북으로 흐르는 드네프로강 동쪽의 작은 지방의 귀족 출신이고 어머니는 18세기 러시아에서 농민 반란을 일으킨 푸가초프 코사크 후예였다. 아버지가 재혼하자 10대의 사바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삼촌에 의탁되어 건축학교를 다녔다. 학업을 끝내지 못하고 취업이 잘 되는 항해사가 되기 위해 해군 양성소에 다시 입학하였다. 해군이 된 사바틴은 블라디보스토크 극동 함대에 배치되고 결혼하여 자녀도 두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건축기사로서 삶을 살고 싶어 해군에서 제대, 중국 상하이에 정착하였다. 상하이 조계 지역에는 수많은 서양 건물이 재건축 또는 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바틴은 고종의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에 의해 조선 왕실의 건축기사로 고용되어 1883년 입국하였다. 그는 왕의 처소인 건청궁에 2층 높이의 서양식 건물 관문각을 건축하였다.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은 고종은 건청궁에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로부터 동양 최초의 전등을 끌어왔다. 전등불이 호화롭게 밝힌 관문각은 외국 사절을 접견하고 연회장소로 사용된 고종과 왕비의 영빈관이었다.

사바틴이 몰랐던 19세기 후반 조선 왕실의 역사는 1821년 이하응이라는 한 인물의 탄생으로 새롭게 쓰였다. 1800년 정조 대왕 승하 후 왕을 만들기도 하고 폐위도 시키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 당시 왕족의 생활은 비참했다. 왕족 이하응은 12세 때 여흥 민씨 모친을 여의고 13세 때 외가의 규수와 결혼했으나 17세 때는 아버지 남연군의 사망으로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그는 김정희 문하에서 배운 난초를 그려 양반가에 팔아 생계를 겨우 유지했지만,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언젠가 바로 세워야겠다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다.

이하응은 철종의 후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조대비에게 자신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제안하면서 접근하였다. 풍양 조씨 조대비는 요절한 순조의 외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빈이자 헌종의 어머니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다. 1864년 1월 철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와의 밀계에 따라 이하응의 차남 명복이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고종이다.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다고 하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였다.

대원군은 인사개혁을 실시해 60년 이상 세도정치를 해온 안동 김씨의 세력을 축출하면서 조선 왕조 외척 정치의 중심이 되어온 왕비 간택에 집중하였다. 조대비는 안동 김씨에게 빼앗긴 세력을 되찾아오기 위해 자신의 친정에서 왕비를 간택하고자 했으나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를 두려워한 대원군은 조대비를 설득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형제 등 가까운 혈육이 전혀 없는 여흥민씨 규수를 왕비로 낙점했다.

고종은 결혼 전에 이미 궁인 이씨와 사랑에 빠져 신혼의 왕비는 3년간 독서로 외로움을 달래야 했다. 궁인 이씨가 왕비보다 먼저 아들 완화군을 낳자 왕권 강화와 종묘사직을 생각한 대원군은 첫 손자를 지나치게 총애하였다. 결혼 3년 후 왕비도 원자를 얻었지만 수일 만에 죽어 왕비의 슬픔은 분노로 바뀌었다.

자기 중심적이며 권력욕이 강했던 대원군의 10년 집권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져왔다. 구미 열강은 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조선에 대한 개방 압력이 거세졌지만, 대원군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프랑스를 병인양요로, 미국은 신미양요로 물리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면서 쇄국정책으로 맞섰다. 국내적으로는 서원 철폐와 양반 과세인 호포법 실시 등으로 유림 및 기득권 세력의 불만을 샀고 왕실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경복궁 중건을 위한 무리한 과세로 민심이 떠나갔다.

1873년 불만을 가진 유림의 지지로 고종은 즉위 10년 만에 친정을 선포 대원군을 실각시켰다. 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난 고종은 정치적 자립인 친정체제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내탕금으로 경복궁 북문 신무문 근처에 새로운 별궁 건청궁을 짓는다. 건청궁은 위압적이고 화려한 경복궁에 대한 반발로 궁궐이라기보다 사대부 건물처럼 단청 없이 소박하게 지었다. 건청궁 내에는 고종의 거처인 장안당과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이 배치됐다.

건청(乾淸)과 곤녕(坤寧)은 하늘이 맑고 땅은 평안하다는 의미로 왕과 왕비의 덕성을 표현했다. 뜰에는 연못을 조성 인공섬을 만들고 아름다운 정자(香遠亭)를 지었다. 건청궁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기까지 20년 가까이 고종과 왕비의 정치무대였다. 특히 왕비 민씨는 중국 고전을 암송할 정도로 총명하면서도 권모와 외교에 뛰어나 과단성이 부족한 고종의 책사로서 국사에 크게 관여했다.

고종의 친정체제 구축으로 정권은 왕비 및 민씨 척족이 장악했으나 그들은 경험 부족으로 권력을 주체하지 못했다. 더구나 남을 믿지 못해 권력이 집중된 민씨 일족들의 무능과 탐욕 그리고 왕비의 낭비 행각은 국고를 탕진시켜 민심이 흉흉했다. 고종의 친정을 이끌었던 유림들은 민씨 정권의 무능 내치와 개화정책을 비판했다.

왼쪽부터 리홍장, 이토 히로부미, 니콜라이 2세[사진=위키피디아]

민씨 정권은 군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 공사관의 건의로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구식 군인들은 체불된 임금이 저급 불량 쌀로 지급되자 군란을 일으켜 경복궁을 점령했다. 1882년 임오년이었다. 대원군은 고종으로부터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는 실각 10년 만에 돌아온 재집권의 기회에 민씨 세력 제거를 위해 고종을 폐출시키고 장손 이준용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난리 통에 죽었다고 선포된 왕비가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지켜 청나라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청군의 파병으로 군란은 진압되고 실각된 대원군은 중국으로 압송된다.

고종의 친정과 민씨 정권의 10년 악정의 결과 폭발한 군란이었음에도 외세의 도움으로 겨우 정권을 지킨 민씨 세력의 사대주의적 정책에 대해 조선의 자주독립을 갈망하는 급진 개화파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마침 청나라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조선에 주둔 중인 청군의 철수 정보를 입수한 일본 공사관의 부추김에 김옥균 등 개화파들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민씨 일족을 기습 살해했다. 그러나 한성(용산)에 주둔 중인 북양대신 리홍장의 심복 위안스카이 청군의 긴급출동으로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다시 민씨 정권이 유지됐다. 갑신정변 진압의 공로를 내세워 위안스카이의 내정간섭이 지나치자 이에 반발한 민씨 정권이 러시아에 접근함에 청나라는 민씨 정권을 견제하기 위해 억류 중인 대원군을 귀국시킨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후 10년간 민씨 정권은 청나라 묵인 아래 미국을 시작으로 서방 열강에도 문호를 개방하여 대외적으로 안정을 찾았지만, 대내적으로 부패가 만연하여 내치의 실패가 이어졌다. 1894년 3월 반외세 반부패 및 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운동(동학란)이 일어났다. 당황한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지원을 다시 요청하게 되고 청군이 파병되자 이번에는 일본군도 텐진조약을 근거로 파병됐다. 갑신정변 실패 후 청나라의 조선 지배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일본은 절치부심 이번 기회에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청나라와 일전(청일전쟁)을 각오했다.

청군은 동학란 진압을 위해 아산만에 상륙했으나 일본은 제물포에 상륙 곧바로 한성으로 진격, 민씨 정권과 적대관계인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과 왕비를 위협 새로운 친일 내각을 통한 갑오개혁을 주문했다. 일본은 치밀한 준비와 정예 병력을 동원 오합지졸의 청군을 대패시키고 1895년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에서 전리품으로 중국의 랴오둥반도를 할양받는다. 이에 놀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 및 프랑스의 3국 간섭으로 무위로 끝나자 고종과 왕비는 새로운 강자 러시아에 의존했다. 과거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가 강조한 인아거일(引俄拒日) 의 친러정책으로 일본을 불안케 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러시아에 체면이 구긴 일본이지만 조선은 양보할 수 없었다. 당시 일본의 내각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야마구치현의 하기(萩)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조슈벌(長州閥)은 스승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었다. 요시다는 서양으로부터 받은 피해는 이웃 나라에서 되찾아와야 한다면서 조선을 정벌하여 북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 대만과 필리핀을 흡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파격적으로, 외상을 지낸 고향 친우 이노우에를 조선공사로 임명, 친러의 중심인물 왕비에 접근하여 뇌물 공세로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다. 이노우에의 수차에 걸친 회유에도 왕비 민씨가 움직이질 않자 행동(여우사냥)으로 전환한다. 이노우에는 특수작전의 적임자로 외교에는 문외한이지만 뚝심이 좋은 미우라 고로 예비역 중장을 후임 공사로 추천했다.

미우라 공사는 만행을 감추기 위해 민씨 정권과 갈등 관계에 있는 대원군과 해산명령을 받아 불만이 있는 훈련대를 끌어들였다. 10월 8일 새벽 일본은 공덕동 아소정에서 은거 중인 대원군을 억지로 경복궁 강녕전에 대기시키고 훈련대원들도 건청궁 주변에 배치했다. 실수해서는 안 되는 행동 요원은 사무라이 낭인들이 맡았다. 그들은 자랑하듯이 “한순간에 번개처럼 늙은 여우를 벤다(一瞬電光刺老狐)”라는 글귀를 칼에 새겼다.

일본의 강요로 경복궁에 다시 돌아온 74세의 대원군은 지난 30년을 되돌아보고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서 벗어나 왕실의 권위를 세워 조선을 반듯한 나라로 만들려고 했던 집권 10년 그리고 스스로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자신이 옹립한 왕과 간택한 왕비와의 20년에 걸친 권력 투쟁에 빠진 사이, 나라가 외세에 휘둘린 끝에, 조선의 국모가 일본 낭인들의 칼날에 처참하게 시해된 기막힌 현실에 이르게 된 것이다.

1896년 2월 고종은 세자와 함께 궁녀로 변장 일본군의 눈을 피해 경복궁 신무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긴급 망명(俄館播遷)하였다. 오래 계획된 일본의 조선에 대한 무력 지배는 무산됐다. 망명 1년 후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왕비의 시해에 따른 백성들의 분노를 집결 이를 동력으로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종은 광무를 연호로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비운의 왕비 민씨는 명성황후로 추존하여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일본의 은폐 공작으로 명성황후 시해의 배후로 지목된 대원군은 고종의 외면을 받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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