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삼대가 떠난 고향 행차
[이영승의 붓을 따라] 삼대가 떠난 고향 행차
  • 이영승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2.11.11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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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결혼한 지 3년째이나 아직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의 친척들을 찾아뵙지 못했다. 아무리 코로나 때문이라고 하지만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동안 여러 번 방문코자 했으나 코로나로 어른들께 심려를 끼칠까 봐 참았다. 그런데 근간 장인어른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 지난번 아들에게 “고향 방문이 늦어지면 외할아버지 건강이 더 나빠질지도 모르니 금년 내로 찾아뵈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일전 아들이 11월 초에 휴가를 내겠다고 전화했다. 드디어 고향 방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번 행사는 여행이나 나들이가 아니라 행차라 말하고 싶다. 행차(行次)란 ‘웃어른이 차리고 나서서 길을 걷거나 그때 이루는 대열’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번 우리 가족 행사도 내가 주관하여 아들과 손자, 삼대(三代)가 함께 떠나는 고향 방문길이니 행차라 할 만도 하지 않은가? 원래 딸네 식구도 같이 가려고 했는데 회사 일이 바빠 안타깝게도 동반하지 못했다. 일정이 정해지자 아내가 “이번 일까지는 아들 결혼식의 연장선이니 방문에 따른 선물과 봉투 등 일체 경비는 우리가 부담하자”라고 했다. 내가 “무슨 결혼식을 3년에 걸쳐서 하느냐?”며 웃자 아내가 “그러게 말에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아내의 자식을 위한 세심한 배려는 내가 도저히 따를 수 없다.

아내가 “승용차 뒷좌석에 손자 좌석을 장치하면 뒷자리가 협소해 다섯 식구가 타기 불편할 테니 각자 차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내 몰래 아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아내 의견을 적은 후 “내 생각은 한 차로 가야 중도에 유적지도 구경하고, 오가며 대화도 할 수 있으며, 아들과 번갈아 운전하면 더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다. 뒷좌석에 손자와 셋이 탈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의견을 보내라”라고 했다. “아버지 말씀은 알겠는데요, 뒤에 셋이 함께 타기 어려워요”라는 아들의 연락이 왔다. 차 두 대로 가기로 하고 보니 손자가 단독으로 차 한 대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대단한 우리 손자를 위함인데 무슨 대수랴.

설레는 고향 행차다. 온 산천의 오색 단풍과 청명한 가을 하늘이 우리를 반긴다. 두 차 사이를 전화로 소통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띠띠뽕뽕 달렸다. 이토록 의미 있고 행복한 여행이 내 생애에 또 있었던가?

처음 도착한 곳은 큰형님 댁이다. 형님 내외분은 아들 결혼이 늦어 몹시 걱정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도 못 했다. 아내가 형수님께 음식 만드는 수고를 끼칠 수 없다며 식당을 검색 그곳으로 모시겠다고 연락했다. 형님이 다음날 “아직 폐백도 못 받고 첫걸음인데 식당에서 볼 수는 없다. 무조건 집으로 와서 식사하자”라고 하셨다. 형님은 82세인데 우리가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 미리 마중 나와 기다리셨다. 형님 내외분은 아장아장 걷는 손자를 보자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셨다. 음식 솜씨가 좋기로 소문난 형수님은 이번에도 맛있는 음식을 많이 차려 과식했는데 나올 때 각종 반찬을 포장해서 싸주기까지 하셨다.

다음은 내가 중학 3년 동안 숙식했던 안동 누님댁이다. 그때 누님의 헌신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다. 누님은 아들이 영주에서 태어났을 때 산후조리를 해 주셨다. 퇴원하던 날 보일러가 고장 나서 안동 처가로 가게 되었는데 진입로 고개에 눈이 쌓여 승용차가 들어갈 수 없었다. 내가 딸아이를 업고 누님은 갓난아기를 안고 산모와 함께 수백 미터를 걸어서 장모님께 아기를 맡기고 댁으로 돌아가셨다. 아기를 안았던 팔이 아파 여러 날 고생한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누님은 올해 84세인데 그때 아기가 자라 자기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누님은 일정에 쫓겨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내 손을 잡고 “식사도 한 끼 못해 먹이고 보내 너무 서운하다”라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안동은 문화유적의 보고라 구경할 곳이 많다.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하회마을과 도산서원 등 많은 유적지를 구경시켜주고 안동 간고등어 정식으로 저녁을 먹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교통체증으로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유적지 구경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아쉽지만 우리 문중의 종갓집이며 안동의 유명한 문화재인 임청각(臨淸閣)만 잠시 둘러보았다. 거기서 처가로 가는 길은 안동 댐 진입로를 경유한다. 안동호 하부댐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시원한 강변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처가는 400년 넘는 종가다. 안동의 이름난 반촌(班村) 중 한 곳인 ‘외내마을(군자리)’이 안동 댐에 수몰되자 종손인 장인이 조상 산소를 지키기 위해 가옥을 뒷산 중턱으로 이건했다. 독가(獨家)이기는 하나 코로나도 비켜 가는 청정지역이다. 내가 결혼한 지 44년째니 그동안 각종 행사 때마다 많이도 드나들었다. 장인 내외분은 그때 마흔셋 청춘이었으나 지금은 건강이 안 좋으시다. 종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는데 세월 앞에는 역시 장사가 없는가 보다. 내 나이 그때 장인보다 서른 살이나 많으니 세월은 참으로 빠르고 무상하다. 아내는 6남매 중 장녀인데 두 동생보다 며느리를 늦게 봐서 한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어른들이니 외증손자가 얼마나 귀여우시랴!

서울에서 준비한 반찬과 형수님이 싸준 반찬을 보태 저녁상을 차리니 진수성찬이다. 후식을 먹으며 지난 세월 이야기꽃을 피웠다. 밤이 늦어 각자 방으로 돌아갔으나 옆방 장모님 모녀 얘기는 끝날 줄 모른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밤을 새우려나 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장인과 집 주변을 돌아보고, 햇살이 강해지자 아들 내외와 손자를 데리고 댐 물가로 내려갔다. 아들이 어릴 때 뛰어놀던 산야를 산책하며 서리 맞은 홍시를 따 먹었다. 돌아가려고 짐을 챙기자 장인은 손자와 며느리 및 아들에게 각각 봉투를 주시고, 장모님은 “내가 없으면 처가에 와도 챙겨줄 사람이 없을 텐데”라시며 쌀, 고구마, 대추 등 온갖 것을 두 차에 자꾸만 가져다 실으셨다.

다음은 막내 처제 집이다. 처가에서 30분 거리에 사는 처제가 토종닭을 잡아 놓을 테니 꼭 오라고 해서 귀경길에 들렀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댐이 담수 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영주 댐 푸른 물이 눈앞에 넘실거리는 천혜의 절경이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토종닭 백숙과 갓 만든 배추전 등이 한 상 차려져 나왔는데 맛있다고 야단이다. 떠날 때 동서 내외가 경작한 사과, 배추, 버섯, 참기름 등 온갖 농작물을 두 차에 가득 실어 줬다. 차 2대로 온 것이 다행이다.

이번 드라마 주인공은 손자였으며 아들은 조연이고 나는 엑스트라다. 나도 한때 주연인 시절이 있었으니 이제 물러날 때도 되었으며, 보는 사람마다 손자가 나를 닮았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손자는 가는 곳마다 엉덩이를 추켜들고 무릎까지 고개 숙이는 절을 해 폭소를 자아내고, 집집마다 내가 드린 봉투에 버금가는 돈을 회수했다. 손자가 없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번 행차의 가장 큰 목적은 새 식구 며느리를 친지들께 인사시키는 일이다. 보는 사람마다 며느리의 성격이 좋고 마음씨가 예쁘다는 칭찬에 아내의 얼굴빛이 밝아지고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동안 걱정만 하던 숙제를 해결하고 나니 내 마음 날아갈 듯 홀가분하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부회장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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