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㊸] 아프리카,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찾아가다 - 이만승 아프리카쇼나갤러리 대표
[아프로㊸] 아프리카,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찾아가다 - 이만승 아프리카쇼나갤러리 대표
  • 이만승 아프리카쇼나갤러리 대표
  • 승인 2022.12.15 15: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젊은 시절 봉사자로 활동한 이만승 대표는 인도와 중국을 거쳐 아프리카대륙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프리카대륙은 초기 인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닌 대륙이다. 그런데도 그가 손에 넣은 역사 교과서는 분량이 100페이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아프리카대륙을 식민지배한 유럽인의 시각으로 쓴 기록이었다.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Kilimanjaro) 지역에 있는 ‘모시(Moshi)’에 한 중학교 선생으로 봉사를 한 이만승 대표는 아이들에게 이 땅의 진짜 역사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프리카대륙의 진짜 역사를 찾고자 생생한 현장 속에서 직접 발로 뛰기 시작했다. 매주 현지인들도 모르는 오지를 찾아 헤매며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그 험난한 여정을 통해 현지인도 모르는 이야기를 발굴했는가 하면, 자신도 아프리카대륙을 바라보는 건강한 눈을 가지게 됐다. 탄자니아의 빈민촌에서 생활하며 더불어 사는 삶의 기쁨을 깨달은 그는 귀국길에 아프리카대륙과 연을 이어줄 매개체를 찾았다. 짐바브웨의 쇼나 민족의 조각가들이 만든 쇼나 조각이었다.

쇼나 조각에는 전쟁이나 가난, 범죄의 흔적 대신에 사랑, 행복, 이타심, 온정이 깃들어 있다. 때문에 전 세계 미술 수집가들도 쇼나 조각을 높이 평가하고 사랑하고 있다. 이만승 대표는 쇼나 조각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아프리카대륙을 향한 세간의 편견을 깰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몇 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아프리카 사람들과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녹록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구해낸 쇼나 조각상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순수함을 바라보며 큰 보람을 느낀다. 수년간 아프리카대륙을 탐방한 이만승 대표는 보는 사람마저 순수하게 동화되는 쇼나 조각상 속에 진짜 아프리카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아프리카가 들려주는 역사를 찾아 나선 길

나는 젊은 시절을 배낭 하나만 짊어진 채 낯선 땅에서 보냈다. 2년간 세계 곳곳을 돌다 인더스 문명의 기원에 매료되어 2년간 인도에서 살았고, 30대 후반의 나이에는 봉사단체를 통해 중국의 한 벽촌에 있는 학교에 선생으로 부임했다. 대다수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궤적에서 이미 많이 벗어나 있던 내게 봉사활동가라는 직업은 천직이었고 적성에도 맞았다. 그러다 태곳적 자연의 모습을 간직한 아프리카대륙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당시 내가 소속돼 있던 봉사단체는 아프리카에도 지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탐험가이자 여행자로서의 본능이 되살아난 나는 아프리카지부를 지원했다. 그렇게 잠비아를 거쳐 2010년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지역에 있는 ‘모시’에서 한 중학교에서 선생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교장 선생님은 내가 경제 과목을 담당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경제보다 역사에 더 관심이 많았다. 50개가 넘는 국가가 있는 아프리카대륙은 초기 인류의 흔적이 남아 있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프리카의 역사 교과서 분량은 겨우 100페이지에 불과했다. 그것도 제국주의 열강이 아프리카대륙을 침략한 15세기 이후 유럽인의 시각으로 쓴 것이다. 나는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 아프리카의 진짜 역사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밤마다 이런저런 원서들과 씨름했다. 하지만 그 원서들 또한 유럽인들이 쓴 기록이어서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가 직접 발로 뛰며 엉킨 매듭을 풀어보기로 했다.

어느 도시든 한쪽에는 번화가가, 다른 쪽에는 빈민가가 들어선다. 모시도 마찬가지였다.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부촌과 빈민촌이 선명히 나누어져 있었다. 한국인들은 물론 탄자니아 사람들도 우려했으나 나는 과감히 기찻길을 건너 빈민가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사는 킴비 씨네 집에서 하숙했다. 시골에서 온 사람들에게 방 한 칸씩 세를 주던 우리네 7~80년대가 떠오르는 정겨운 광경이었다.

킴비 씨 집에는 주인인 킴비 씨 식구 아홉과 장기 세입자 마마 자와디 식구 넷에 두 달 간격으로 들락거리는 세입자가 여럿 있었다. 그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대문이며 마당을 다 공유했기에 서로 모르는 것이 없었다. 특히 어느 집에서 없는 살림에 고기라도 사와 굽는 날에는 몰래 먹는 처지도, 알면서 모른 척하는 태도도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초반에 나는 이 같은 사정을 모르고 마마 자와디가 까치발을 한 채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과 방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아는 체를 했다가 고기를 몇 점 얻어먹기도 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얼마나 눈치 없는 행동이었는지 알았다. 지난해 12월에는 킴비 씨가 조카 딸이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보내왔다. 내가 그 집에 함께 살 때 순정만화를 보던 아이였다. 아프리카를 주제로 한 이야기 중 오히려 이런 소소한 이야기를 듣기가 더 어렵다. 아프리카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너무 추상적이다 보니 오히려 거기에서 오해들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추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진짜 이야기를 자주 접하다 보면 아프리카를 향한 시각도 서서히 바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게 주어진 수업 시간은 일주일에 12시간이었다. 수업 이외의 시간에는 아프리카의 진짜 모습을 찾고자 혼자 탄자니아 곳곳을 돌아다녔다. 오지를 찾아다니며 현지 학생들도 모르는 탄자니아 이야기를 발굴해 들려주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하루는 호수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피곤하여 잠시 눈을 붙였는데 일어나보니 바로 앞에 악어가 입을 쩍 벌리고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순간 식겁하여 뒷걸음질 쳐 바로 도망 나왔다. 정말 위험했던 순간은 탄자니아의 한민족인 마콘데(Makonde)의 마을을 방문했을 때였다.

마콘데는 마사이(Maasai)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민족이다. 마사이인들은 도시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마콘데인들은 좀처럼 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모잠비크에 마콘데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장 길을 나섰다. 그런데 문제는 탄자니아와 모잠비크 국경 사이에 포장된 도로가 없었고 두 곳을 왕래하는 버스도 없었다. 수소문 끝에 헌 옷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짐 위에 사람을 태워 나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옷을 어찌나 많이 쌓았는지 비닐로 덮어놓은 무더기가 위로 솟아 있었다. 그 위에 나를 포함해 25명이 올라탔다. 그 상황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위험천만한데,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닐이 물에 젖자 사람들이 앉은 채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비닐을 고정하려 묶어 놓은 밧줄을 마치 생명줄처럼 부여잡고 버텼다. 그 상태로 대여섯 시간을 이동했으니 무사히 살아서 도착한 것이 기적과 같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날의 죽을 고비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가 마콘데 민족이 사는 마을을 찾은 날은 운 좋게도 축제가 한창이었다.

나는 이 진귀한 풍경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두어 번 사진을 찍지 말라고 제지를 당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속 촬영했다. 오후 2시쯤 갑자기 비가 내려 잠시 처마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군인 두 명이 나타나 어깻죽지를 잡더니 나를 트럭에 거칠게 집어 던졌다. 나를 실은 트럭은 시내를 벗어나 밀림을 한참 달리더니 어느 붉은 벽돌 건물 앞에 섰다. 군인들은 나를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암흑 속에 집어넣었다.

폐건물에 책상 하나 덜렁 놓인 방이었다. 여기서 영영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저녁 6시쯤 천만다행으로 방문이 다시 열렸다. 적어도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아 그제야 나를 끌고 와 가둔 이유를 조심스레 물었다. 축제에 참석한 주지사가 인파 속에서 유일한 외국인이던 내가 연신 사진을 찍으니 무슨 속셈인지 추궁해보라고 지시해 가두었다고 했다. 조심하지 못한 내 잘못이 컸기에 나는 더는 묻지 않고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왔다.

편견을 버려야 비로소 보이는 아프리카

그런데 이렇게 위험천만한 일들을 겪다 보니 나는 오히려 더 겁이 없어졌다. 그래서 가공되지 않은 진짜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찾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내가 자꾸 오지를 돌아다니니 처음에는 우려를 표했던 봉사단원들도 여행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면서 점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많은 사람에게 진짜 아프리카를 보여주고자 팀을 만들어 그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 오지 여행을 하며 팀원들도 아프리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가치를 발견했다.

우리는 보통 버스를 타며 이동했는데 한번은 1시에 출발하는 버스가 3시 30분이 지나도록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팀원들은 점점 초조해하며 불평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문화를 모르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 출발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때가 되면 출발한다’고 답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고 구성원들에 대한 배려심이 깊다. 그래서 먼 길을 떠나는 버스에 혹시라도 타지 못한 마을 사람들이 없도록 늦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팀원들도 여러 번 여행을 하면서 비로소 이러한 문화와 따뜻함을 깨달았고 기다리는 동안 여유를 찾았다. 그래서인지 팀원들이 탄자니아를 떠날 때쯤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니 버스에서 ‘언제 출발해요?’라고 묻던 순간이었다고 입 모아 이야기했다. 행복은 일상 속 배려와 여유 속에서 온다는 인생의 진리를 우리는 아프리카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아프리카대륙과 사람들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은 600년 전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첫발을 디뎠을 때 했던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을 두고 그들의 시각에서 게으르고 더러우며 탐욕스럽다고 표현한 것과 같다. 이 같은 평가는 동등한 위치에서 그 지역 사람들과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무시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아프리카대륙을 여행하는 데 두려움을 느낀다. 질병과 치안을 걱정하며 안전한 곳만 골라 다니면서 실제 모습은 모른 채 아프리카 국가와 사람들은 이렇다고 단정 짓고 있는 것이다. 600년 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정착할 때 안전한 지대에 성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성 안팎을 이분화하여 성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시각이 600년째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봉사자 신분으로 아프리카대륙에서 활동했으나 대다수가 안전이 확보된 지역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에 대한 제한적인 관점을 확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시행착오를 또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의 삶으로 깊이 들어가 같은 눈높이에서 사고하고 판단하며 아프리카의 진짜 역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아프리카대륙과의 인연의 끈, 쇼나 조각

쇼나 조각은 짐바브웨의 쇼나 민족이 만든 돌 조각을 의미한다. 짐바브웨는 예부터 돌이 많은 지역으로 국명 또한 쇼나어로 ‘돌로 만든 집’ 혹은 ‘석성(石城)’을 의미한다. 때문에 나무가 많아 목각 인형을 주로 만드는 탄자니아나 케냐와 달리 짐바브웨에서는 석조 인형인 쇼나 조각을 만든다. 쇼나 조각은 1950년대 해외 알려지기 시작해 1960년대에는 런던 로열페스티벌홀(Royal Festival Hall), 뉴욕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파리시립현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Paris), 파리 로댕미술관(Musee Rodin) 등 세계적 명성을 지닌 미술관에 전시되며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아프리카대륙에서 꽃피운 다양한 예술작품 중 특히 쇼나 조각이 인기를 끈 이유는 그 속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친근한 정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업은 여성, 친구들과 앉아 있는 아이, 교회 성가대 등 우리 주변의 친근한 소재를 담은 쇼나 조각을 아프리카 고유의 단순한 형상과 투박한 이미지로 표현한 많은 쇼나 조각들은 보는 사람에게 따스함과 순수함을 느끼게 한다.

쇼나 작가들은 돌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으며 밑그림을 그리지 않은 채 돌에 깃든 영혼이 인도하는 대로 조각한다. 사전의 스케치 작업을 생략한 채 돌을 보고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 즉흥적으로 정과 망치, 샌드페이퍼를 이용해 형태를 잡아간다.

나는 잠비아에서 처음 쇼나 조각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조각들을 보는 순간 유년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이 떠오르며 내 삶의 한 조각을 마주한 듯이 마음속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온 아프리카 사람들의 순수함이 담겨서일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혼탁한 마음이 깨끗이 정화되고 따스함이 전해졌다. 나는 쇼나 조각이 주는 감동을 한국에도 알리고 싶어졌다. 동시에 쇼나 조각을 모아 국내에 소개하고 판매한다면 아프리카 사람들과의 인연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현지 지역경제 발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귀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탄자니아에서부터 말라위, 잠비아를 거쳐 짐바브웨까지 여행하며 쇼나 조각가들을 만나고 작품을 수집했다. 한편, 쇼나 조각이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직접 본 작업환경은 열악하기만 했다. 실제 쇼나 작가들은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평생 돌가루를 마신 탓에 40세를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그들의 예술적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책임감을 느끼고 쇼나 조각을 알리자 결심했다. 쇼나 조각들을 배에 가득 싣고 귀국한 나는 건축 및 인테리어 박람회에 열심히 참가했다.

덕분에 쇼나 조각 전시회를 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한번은 예술의전당에서 전시기획을 담당하시는 분을 만나게 된 인연으로, 2012년과 2015년 예술의전당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또한 전시회에 참석하신 분 중 한 신부님이 ‘기도하는 소녀’ 조각상에 깊은 관심을 표했고, 쇼나 조각에 매료된 신부님의 제안으로 2015년과 2016년 명동성당에서도 두 차례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쇼나조각

나는 쇼나 조각을 통해 사람들이 아프리카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마치 그동안 아프리카대륙에서 고생했던 시간이 이렇게 보상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작품을 한두 점이라도 전시할 기회가 닿으면 어디든 열심히 쫓아다녔다.

하지만 쇼나 조각을 한국에 소개하고 판매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수차례 아프리카대륙으로 날아가 쇼나 조각품은 물론 다양한 공예품을 발굴하기 위해 짐바브웨에서 케냐를 거쳐 가나까지 들러야 했다. 또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쇼나 조각가에게 선금을 주고 작품을 의뢰했지만, 미완성인 상태로 보내기도 했고 작업이 늦어지거나 연락이 끊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대륙에 사는 내 이웃들과 예술가들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고 조각상 속에 담긴 진짜 아프리카의 모습을 한국에 알리며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우리 청소년들이 더욱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다양한 예술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쇼나 조각과 아프리카 문화예술에 대한 강연을 시작했다. 쇼나 조각을 통해 누구나 아프리카 문화예술에 공감하고 그 속에 담긴 진짜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다.

현대에 만연한 개인주의로 인해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과 이웃에 대한 배려심을 담은 쇼나 조각이 상처받은 현대인들의 마음을 치유해주고 나아가 아프리카대륙과 한국을 잇는 매개체가 돼 긍정적인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파란만장했던 여행길에서 그들의 들려주는 이야기를 찾고 쇼나 조각을 통해 삶의 가치를 일깨워준 아프리카와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