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성 칼럼] 내일의 탱고 - 월드컵의 재해석과 88, 89년의 세계축전
[정대성 칼럼] 내일의 탱고 - 월드컵의 재해석과 88, 89년의 세계축전
  •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 승인 2022.12.23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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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월드컵이 역대급 결승전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아르헨티나 메시 선수와 프랑스 음바페 선수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메시는 아르헨티나, 스페인, 이탈리아 국적을 가진 삼중 국적자이고, 음바페는 프랑스, 카메룬, 알제리 삼중 국적자다. 유럽의 대항해시대, 제국주의 시대의 후손들이다.

동아시아, 특히 한국, 일본에서는 월드컵을 내셔널리즘 시각으로 국가 대 국가가 겨루는 경기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어느 국가이건 단일민족 팀은 거의 없다. 유독, 한국과 일본만이 단일민족 신화에 얽매어있다.

필자는 한국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역사를 섭렵하면서 동시에 서양의 현대철학,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등에 매료됐다. 1980년대 일본에서는 한국 학생운동에 대해서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도, 광적 소음을 일으키는 ‘버블 경기의 대해서는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를 깊이 곰곰이 생각해보는 오기 있는 청춘들이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소, 소, 소크라테스냐 플라톤이냐, 니, 니, 니체냐 사르트르냐, 모두 고민하고 크게 됐다”는 광고 노래가 유행했다.

갓 상경한 시골 촌뜨기였던 필자는 대학의 ‘불온한(?)’ 친구들한테서 불어, 영어, 중국어, 조선어로 된 ‘인터내셔널가’라는 노래를 듣고 놀라곤 했다. 그 장엄함이 사회주의의 상징 같았지만, 필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자유주의 상징어었던 밥 딜런을 들었고, 대학교 때는 프랑스어를 배우며 에디트 피아프, 조루즈 무스타키의 자유분방함을 좋아했다.

월드컵 결승전을 보면서 문득 한 노래가 떠올랐다. 조루즈 무스타키의 노래 ’Le tango de demain(내일의 탱고)’였다. 불어로 된 샹송이지만, 가락은 아르헨티나의 탱고다. 밥 딜런은 노벨 문학상을 탔으니 무스타키 또한 이 노래 가사로 그 상 하나쯤은 받았어야 마땅했다. 무스타키의 잘 알려진 여러 노래와 달리 이 노래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루즈 무스타키

무스타키가 애굽(이집트)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그리스, 이스라엘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해서 그런지 현대의 방랑 음유시인 같은 이미지가 있다. 현대는 포스트 콜로니얼 시대이자 다문화주의 시대이다. 이미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고, 경제에도 글로벌리즘이 가속화돼 말 그대로 세계화가 됐다. 그런 추세가 근래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다고 볼 때, 일본은 일찍이 그 세례를 받아온 나라다. 한국 내셔널팀의 한 사람이 유럽 팀에서 뛰는 선수들이 많은 일본 내셔널팀이 부럽다고 발언한 사실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한국팀이나 일본팀이나 좀 더 다문화 돼야 한다. 일본 내셔널팀에는 라모스라는 브라질 출신의 선수가 뛴 적이 있다. 참고로 프랑스나 아르헨에서는 선수들의 다국적을 인정하는 모양인데, 한국이나 일본에선 그게 가능할까?

국위 선양 측면에서 BTS가 월드컵 오프닝 무대에 서거나 현대자동차가 스폰서로 이름을 올린 것은 자랑스럽다. 월드컵이 상업주의에 젖었다는 논란도 있지만, 내셔널팀이 이기면 기쁘고, 세계 최고 수준의 기량을 연마한 선수들의 모습은 참 보기 좋다.

월드컵과 비견되는 게 올림픽뿐인데, 월드컵이건 올림픽이건 자본주의 진영이 만들어놓은 세계축전이라 “독수리가 우리 살코기를 쪼아먹는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소련이 붕괴된 지도 오래됐지만, 구 사회주의 진영이 만든 세계축전도 있었다. 세계청년학생축전도 그 사례다. 1945년 영국 런던에서 첫 세계청년회의가 열려 세계민주청년연맹이 결성되었고,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제1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개최됐다. 198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서는 제13차 축전이 열렸다. 88 서울 올림픽에 대항하기 위해 북한은 최대 동원 수를 자랑한답시고 177개국에서 참가자 2만2천 명을 모았다. 임수경이 북한을 방문한 까닭이 그 축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고 문익환 목사, 재일동포 문필가 정경모 선생, 문선명 총재, 정주영 회장 등이 북한을 방문했다. 그 당시 필자도 그 세계축전에 가봤다.

당시 필자가 다니던 대학에 중국 현대사를 가르치는 사회주의자(노농당) 교수, 제3 세계를 전공하신 경제학 교수, 아프리카 문화를 강의하는 문화인류학 교수 등이 있었다. 필자의 1학년 담임 교수가 ‘나와 너’를 쓴 마르틴 부버를 연구한 사람이었다. 필자는 신학을 배우면서 서양철학사 공부를 해서 그런지, 아니면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녀서 그런지, 모든 서양사상은 예수를 어떻게 닮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 사상 역시 예수의 빛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국제금융 세력의 보호 아래 ‘자본론’ 연구를 진행했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에게 마약”이란 말을 남겼으니 말이다.

‘미제국주의’라는 개념에 익숙지 않았고, 훗날 반미 일변도로 미국을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깨닫게 되지만, 필자는 당시 젊음의 오기로 사회주의, 반제국주의 사상에 심퍼시(동감)를 했다. 반제국주의의 기본은 자기희생 정신이었다. 남한에선 학생운동이 한참이었는데, 박종철 군, 이한열 군 등을 비롯해 귀한 생명들이 희생되어가던 시기였다. 북한에서는 실존주의를 “미제국주의와 한통속인 반동사상”으로 봤지만, 사르트르도 읽고 있던 필자는 사회주의 사상에 ‘자기투기’한 것이라고 나름 고민한 끝에 결론지었다.

그래서 요새 한국 우파들이 임수경을 비아냥거리거나 한국 좌파들이 북한에 쉬이 다가가서 되레 우롱당하거나 하는 꼬락서니는 한숨을 넘어 자괴감마저 생기게 한다. 당시 재일동포에게 임수경이라는 세 글자는 한국 학생운동의 어둠을 떨쳐 나온 빛처럼 보였고,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임수경이라는 존재에 투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후 그의 사생활이나 공과를 잘 모르지만, 필자에게는 당시 추억만으로 족하다.

반대로, 한국의 우파건 좌파건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열화’돼 있다고 느낀다. 최근, 일본의 동경도립대 교수 미야다이 신지 교수가 대학 교내에서 야밤에 괴한한테서 폭행당해 병원에 실려 간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미야다이 교수의 강의 주제가 ‘열화된 우파, 열화된 좌파, 따라서 가속도적으로 썩어빠질 수밖에 없는, 절망 제대로 한 번 해봐야 할, 망할 놈의 일본’이었다고 한다. ‘열화’됐다는 것은 ‘퇴화됐다는 뜻이다. 한국은 어떤가? ‘인터내셔널가’도 러시아어, 불어, 일본어보다 중국어, 한국어 가사가 후졌듯, 아예 처음부터 제대로 된 우파도 제대로 된 좌파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는 있다.

우리 한국에는 ‘미완의 근대’라는 과제가 있고, 그것을 어떻게 환골탈퇴 하느냐가 오래 되고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즉, 남한은 단독으로 근대화에 성공했지만, 민족자본주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사회주의를 강행한 북한이라는 ‘문제계’(내외 문제들의 은하수)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근대적 주체를 ‘지양=해체’할 수 있는 시점은 어쩌면 남북통일 내셔널팀으로 월드컵 우승을 한 번쯤 이룩했을 때가 될지도 모르고, 반대로 전혀 다른 형태의 동아시아 질서가 도래될지도 몰라서 장담할 수 없으나, 북한을 우리 민족자본으로 한 번 굳건히 다진다는 것이 대전제가 돼야 함은 자명하다. 그것은 열화된 우파나 열화된 좌파의 사상으로는 어렵고, 굳건한 국제금융의 하부구조가 동반돼야 하리라.

아래는 필자가 번역, 번안한 ‘내일의 탱고’다. 탱고 가락에 맞춰 소리 내어 노래하면 더 좋을 듯하다.

오늘 밤 되찾네 내 형제와 그 아이리스 / 탱고가 태어난 변두리, 부에노스아이레스 / 뿌리를 뻗어 사막과 동토와 황야를 지나 / 고통과 환희가 얽히고설킨 아르헨티나 / 나는 나의 목소리를 싣네, 그 선율에 / 봄은 오네, 남아메리카 전 대륙에 / 몇천 년의 후예들을 낳은 저 에그자일 / 이제 새로이 퍼져가네, 칠레, 브라질 / 지구는 몇백 번이고 죽고 되살아나고 / 노랠 위해 생명과 죽음은 서로 만나고 / 지평선 동틀 때까지 사랑이 춤추니 / 소원과 애도 어울린 축제 한창 여무네 // 오늘 밤 나는 되찾네, 내 형제, 제3 세계 / 남미와 동양은 응답하네, 각자 맘에게 / 저 탐탐 징, 기타, 그리고 반도네온 / 우리를 불러내네, 저 시나이반도, 시온 / 소리로 시작해 소리로 끝나는 음악 혁명 / 거기엔 없죠 공포도 기아도, 영영 / 장단이 자아내는 새로운 하모니 / 지난 세계 위에 새누리가 나타나오니 / 그 음악 내겐 이미 들려오네 / 거칠게 외치다 부드러이 즐겨 노네 / 이 노랠 잊을까, 내일 이 탱고의 휘모릴 / 오늘 밤 듣고 새긴, 저기 저 아르헨 소리를?

정대성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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