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85] 양화진의 독립운동가들
[유주열의 동북아談說-85] 양화진의 독립운동가들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0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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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사진=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사이트 https://yanghwajin.net]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사진=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사이트 https://yanghwajin.net]

항일독립운동의 달인 3월이면 서울 마포구 양화진의 외국인 묘원을 찾아가 본다. 그곳에는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들이 잠들어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쳐 병원을 설립하여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자유 평등 민주주의 이념으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세계 10위 경제의 선진국 발판을 만드는 데 그들이 있었다는 생각에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가득하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1873년, 어린 국왕을 도운다는 명분으로 10년간 국정을 이끌어온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으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조선의 개국을 선언하면서 1882년에는 서양국가로서는 최초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83년 5월 초대 미국의 전권공사로 루시어스 푸트가 입국, 서대문 안 외딴곳 배꽃이 만발한 정동에 한옥 2채를 구입, 공사관과 관저로 사용했다.

그 무렵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의 장로교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1858-1932)이 중국 난징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이웃 조선이 개방정책을 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884년 9월 조선으로 왔다. 푸트 공사는 알렌에게 조선은 아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아 선교사의 신분을 내세우는 것이 위험하므로 공사관 촉탁 의사로 근무할 것을 권했다.

그해 12월 김옥균 홍영식 등 급진개화파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의존하는 민비(명성황후) 중심의 수구파를 몰아내기 위해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를 이용,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갑신정변이다. 그때 연회에 참석했던 민비의 조카로 정권의 실세였던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빈사 상태에 빠졌다.

푸트 공사 등 연회에 참석한 외교사절단들이 급히 몸을 피하는 등 혼란 속에 고종의 고문으로 외무협판(차관) 직을 맡고 있던 독일의 묄렌도르프가 나섰다. 민영익을 개화파 몰래 현장에서 멀지 않은 자신의 집으로 옮기고 의사 알렌을 불렀다. 알렌은 왕실의 반대를 무릎쓰고 대수술을 감행 민영익의 생명을 구했다.

알렌(왼쪽)과 언더우드
알렌(왼쪽)과 언더우드

이를 계기로 고종의 신임을 얻고 어의로 위촉된 알렌은 고종의 특별하사품으로 서양식 병원 광혜원(제중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 제중원은 갑신정변의 주모자 홍영식의 북촌 재동저택(지금의 헌법재판소)에서 시작됐다. 알렌은 제중원의 의료진 보강과 조선인 의사 양성을 위해 미국 개신교 선교부에 의료 및 교육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 선교사들이 이에 호응 입국했다.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0대에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주, 신학교를 졸업하고 북장로교 선교사가 됐다. 그는 당시 영미권 선교사들이 주로 파견됐던 인도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해 힌디어와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미지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선교 활동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선으로 갈 것을 결심한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언더우드는 약혼녀에게 조선에 같이 갈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하고 1885년 혼자 조선으로 왔다. 조선 정부가 선교 활동은 허락하지 않아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의료 교육을 담당, 물리 화학 등 의예과 과목을 가르치게 됐다. 그는 1888년 의료선교사로 입국, 제중원 여의사로서 민비의 시의를 겸하고 있는 8세 연상의 릴리어스 호톤(1851-1921)과 결혼했다. 조선 최초 서양인의 결혼이었다.

언더우드는 미국 공사관 인근 정동에 주택(지금의 예원학교)을 구입했다. 정동(貞洞)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침(貞陵)이 있었던 곳이다. 이성계 사후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 도성 밖으로 이장했지만 정동이란 지명은 남게 됐다.

언더우드는 정동 자택에 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보고 영어를 가르쳤다. 고아 중에 언더우드가 양아들처럼 키운 우사 김규식은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고 훗날 독립지사가 된다. 고아원이 언더우드학당으로 발전하면서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도산 안창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학생이 늘어나자 종로구 연지동으로 이전, 학당 이름을 경신(儆新, 새로운 것을 깨친다)으로 정했다.

제중원[사진=위키피디아]

경신 학교에 대학부(기독교대학)가 생겼다. 언더우드는 타자기 재벌로 알려진 자신의 형 존의 기부금을 받아 1917년에 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조선 초기 연희궁 자리)의 대지 19만 평을 교지로 구입, 연희전문학교로 독립시켰다. 경신은 중고 과정으로 남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현재 혜화동으로 정착해 축구 명문으로 차범근 박항서 등을 배출했다.

조선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1886년 프랑스와 수교함에 따라 기독교에 대한 금기를 완화, 의료 및 교육 선교사들의 종교활동을 묵인하였다. 1887년 언더우드는 자신의 주택을 개조, 조선의 첫 장로교 교회인 정동교회를 세웠다. 신도가 늘어나면서 1895년 경희궁 건너편 한옥(지금의 시티뱅크)을 구입, 새문안제일예배당을 세웠다.

당시 돈의문 즉 서대문을 새문(新門)으로 불렀다. 조선이 건국(1392년)되고 한양을 수도로 정한 후 동서남북 8개 성문을 건설할 때 서대문 격인 돈의문은 사직동 인근에 있었다. 태종 때 풍수가들이 돈의문이 경복궁의 인근으로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면서 경복궁 지맥이 손상되고 있다 하여 돈의문 통행이 금지됐다. 그 대신 인덕궁(조선 2대왕 정종 저택) 역에 서전문(西箭門)을 만들었다. 세종 때 통행에 불편한 서전문을 헐고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앞 정동사거리에 새문을 세우고 돈의문 현판을 달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돈의문의 안쪽을 새문안으로 불렀다. 오늘날 광화문 랜드마크가 된 700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신축한 새문안교회는 1907년 이전한 세 번째 예배당을 헐고 지은 것이다.

제중원이 설립된 지 1년 후 1886년 환자 수가 늘어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제중원은 재동에서 을지로입구 구리개(銅峴, 지금의 하나은행 본점)로 이전했다. 제중원은 의료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었지만 외무아문(외교부) 당상(堂上)의 재정적 관리하에 있었다. 1890년도에 들어와 정부의 재정난으로 제중원의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을 때 당시 4대 원장으로 캐나다 출신의 의료선교사 올리버 에이비슨(1860-1956)이 제중원 운영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는 언더우드가 일시 귀국 중 북미 선교사 모임에서 스카웃된 능력 있는 의사였다.

올리버 에이비슨과 서울 중구에 보존돼 있는 배재학당 동관[사진=위키피디아와 문화재청]
올리버 에이비슨과 서울 중구에 보존돼 있는 배재학당 동관[사진=위키피디아와 문화재청]

에이비슨은 제중원의 진료와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위해 더 넓은 장소를 물색하고 현대식 종합병원 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동학란과 청일전쟁 등 혼란기에 부담할 능력과 의욕이 없었다. 에이비슨은 조선 정부로부터 미국 북장로회 이름으로 제중원 전체 운영을 공식적으로 이관받고 미국에서 기부자를 찾았다.

1900년 에이비슨은 일시귀국하여 석유왕 록펠러의 동업자인 오하이오주 대부호 헨리 세브란스를 만나 설득하여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냈다. 그는 숭례문 밖 복숭아골(桃洞)에 지상 2층 지하 1층의 40병상 규모의 최신식 종합병원 세브란스기념병원을 지었다. 구리개에 있던 기존의 건물 및 대지는 조선 정부에 반환했다. 그 후 미국의 북장로교회에서는 신촌의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의학교)을 합병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일제는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를 눈엣가시로 보았다. 일제 말기에는 학교를 적산(敵産)으로 규정하고 총독부에서 직접 관리했다. 해방 후 1953년에서야 두 기관이 통합되어 앞글자를 따서 연세대학교로 명명, 발전돼 왔다.

최근 미국의 노부인이 자신의 증조부가 조선의 왕으로부터 선물 받은 나전흑칠삼층장을 한국 정부에 기증했다. 그녀의 증조부는 헨리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이다. 독일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아펜젤러는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인도제국에 선교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조선의 개국 소식을 듣고 부인과 함께 조선을 찾았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언더우드 장로교 선교사와 같은 선박으로 제물포에 도착했다.

정동제일교회

한국에 전래된 미국의 주요 개신교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있다. 남북전쟁으로 장로교 및 감리교도 남북으로 분리됐다. 서방기독교의 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스위스의 존 캘빈의 개혁 사상이 그의 제자 존 녹스를 통해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가 시작됐다고 한다. 인구밀도가 낮은 고원 산악지대의 스코틀랜드는 수평적이고 분권적 자유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로 교회의 장로(長老) 회의가 최고 의사 결정권을 갖는 구조였다. 감리교는 중앙집권적이고 수직관계인 성공회 사제 출신인 존 웨슬리가 중심이 된 감리회 운동에서 시작된 교파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명칭에서 보여주듯이 장로교는 장로(presby)를 중심으로 하고, 감리교는 질서 또는 체계(method)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펜젤러는 1885년 7월 공사관에 가까운 정동에 작은 교실을 마련,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음해 고종은 ‘인재를 기르는 곳’이라는 의미로 <배재학당>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젊은 시절의 이승만 주시경 등 선각자가 배재학당 출신이다.

아펜젤러가 1885년 10월 정동에 있는 자신의 주택에서 감리교 신자들과 예배한 것을 정동제일교회의 시초로 삼고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1894년 영국 빅토리아 양식의 붉은 벽돌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 벧엘(하느님의 집) 예배당을 지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장소였으며 유관순의 장례가 치러진 곳이다. 현대가 자녀가 특급호텔 등 호화로운 장소가 아닌 이곳 정동제일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펜젤러 동상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함께 일제의 민비시해(을미사변) 이후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고종을 교대로 경호하면서 목격한 일제 만행에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그는 40대 초반(1902년 6월) 한창 일할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전남 목포에서 개최된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물포(인천)에서 출발한 그의 여객선이 군산 어청도 근해에서 다른 배와 충돌했다. 위급한 상황 속에 동행한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선실로 내려갔다가 실종됐다. 시신을 찾지 못해 양화진에는 그의 가묘와 추모비가 서 있다.

“일본에서의 선교사 생활 조건이 좋다고 하지만 나는 조선에 가서 그들과 살고 싶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난 메리 스크랜턴(1832-1909) 여사는 52세의 미망인이었지만 감리교 여성 선교사로 아들 윌리암 스크랜턴과 함께 1885년 4월 조선의 땅을 밟았다. 그녀는 공사관과 가까운 정동의 기와집 한 채를 구입해 여성 교육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생을 구할 수 없어 애를 먹었으나 차츰 신분과 나이에 관계 없이 학생들이 모이자 고종으로부터 “배꽃 같이 순결하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의 <이화학당>이란 교명을 받았다. 이화학당은 많은 학생들이 찾아오면서 전문학교로 인가됐다.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장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장녀로 조선에서 태어난 앨리스 아펜젤러(1885-1950)였다. 그녀는 1935년 미국의 독지가들로부터 모금을 통해 학교를 신촌으로 이전, 오늘날 이화여자대학의 기틀이 만들어졌다.

스크랜턴 여사는 남녀유별의 조선 사회에서 남성 의사와 환자가 있는 병원에 가지 못하는 조선 여성을 위해 여성 전용병원 보구여관(普救女館)을 설립했다. 이화여자대학 의료센터의 전신이다. 보구여관의 발전에는 로제타 셔우드홀(1865-1951) 선교사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그녀는 여의사로 이화학당 학생에게 의학교육을 시작했고 박 에스터(김점동)를 미국 유학시켜 조선 최초의 여의사를 탄생시켰다.

윌리엄 스크랜턴(왼쪽)과 메리 스크랜턴
윌리엄 스크랜턴(왼쪽)과 메리 스크랜턴

스크랜턴 여사의 아들 윌리암 스크랜턴(1856-1922)은 예일대학과 뉴욕 의과대학 졸업과 동시 결혼, 제철업자였던 아버지 사후 홀어머니와 함께 미국에서 개업의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1884년 초여름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맨 후 어머니와 함께 조선에서 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윌리암 스크랜턴은 조선에 입국, 제중원 의사로 지내다가 정동에 집을 구한 어머니와 함께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평소 일제의 강압에 분노하고 있던 스크랜턴은 일본과 조선을 동시 감독하는 미국 감리교 해리스 감독관의 지나친 친일 사상을 비판하고 선교직을 사임했다. 그는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마지막으로 고베 미국 영사관의 촉탁의사로 근무 중 1922년 폐렴으로 사망한다.

버들 꽃 양화나루의 석양에 한강 물이 물들기 시작했다. 저만치 잠두봉(절두산) 성지가 눈에 들어온다. 1866년 병인년 수천 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처형(切頭)되어 한강이 피로 물들었던 때가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광기로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처형되고 이를 구실로 중국 톈진의 프랑스 극동함대가 한강 양화진까지 올라왔다. 병인양요의 시작이었다. 흥분한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더럽힌 땅을 천주교 신도(서학인)의 피로 씻어야 한다면서 벌인 어처구니없는 참극이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하에 제중원은 2대 원장 존 헤론이 사망했다. 지금까지 외국인이 사망하면 제물포 외국인 묘지에 묻혔지만, 한성부에 늘어나는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묘원이 필요했다. 당시 허드 미국 공사가 고종에게 건의하여 양화진에 묘원 조성을 허락받았다. 지금은 한국을 위해 공헌한 외국인 500여 명 묘가 조성돼 있다. “웨스트민스트 사원보다 이곳에 묻히고 싶다”는 어느 외국인 선교사의 유언이 생각난다.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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