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동서 사모곡
[이영승의 붓을 따라] 동서 사모곡
  • 이영승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3.04.06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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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을 맺은 지가 40년이 넘는 세월이다. 400년 종가인 처가는 위로 딸 넷 아래로 아들 둘인데 내가 맏사위고 그가 둘째다. 비보에 놀라 먼 길을 달려 늦은 밤 영전에 향을 피운다. 옷깃을 여미고 영정사진을 바라보니 온화한 모습이 마치 살아 마주하는 듯하다. 만날 때마다 형님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던 4살 아래 그가 먼저 떠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긴 세월 쌓인 정 남다르니 비통하기 그지없으나 가슴이 메어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이별을 고하고 돌아오니 하늘 아래 나만 홀로 남은 듯하며, 조용히 마음을 추스르니 지난날 함께했던 사연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마냥 슬퍼만 하는 것은 그를 보내는 도리가 아니기에 아련한 추억을 떠올려 그리움을 달랜다.

그는 결혼 전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처제를 만났다. 당시 안동지방에서는 연애결혼을 좋지 않게 생각해 남들이 알까 쉬쉬했다. 둘은 서로 좋아하면서도 비밀히 연애했다. 그 후 처제가 사귀는 사람이 있음을 밝히고 서울에서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장인께서 내가 좋다고 해야 결혼을 허락하겠다며 함께 가자고 하셨다. 이를 안 처제가 내게 “아버지께 잘 좀 말씀드려 주세요”하고 귀띔했다. 나는 그렇게 할 테니 앞으로 내게 잘 하라고 농담을 했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 그는 첫인상이 너무 좋았으며, 장인께 “우리 가족이 될 사람 같아 보인다”고 말씀드렸다. 장인도 매우 흡족해하셨으며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동서는 결혼 후 내게 과분할 정도로 잘 대해줬다. 강서구에 살던 그들은 우리가 사는 노원구로 이사를 왔으며, 그 뒤 공릉동 풍림 아파트가 준공되자 우리와 같은 동 같은 라인에 분양받았다. 그곳에서 10여 년을 같이 살았는데 손재주가 좋은 동서는 우리 집 설비가 고장 나면 수시로 고쳐주었으며, 아내가 집을 비울 때는 처제가 우리 집 가사를 돌봐줘서 불편한 줄 모르고 지냈다. 아이들도 이모네와 같은 라인에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며 사는 것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동서는 처가에도 지극정성으로 잘했다. 조금 과장하면 다른 사위 셋을 합쳐도 둘째 하나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다. 그는 처가에 잘 보이려는 가식이 아니라 언제나 본심에서 우러나 했기에 누구도 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를 보며 자신을 반성할 때가 많았다. 당시는 YS와 DJ의 정치적 대결로 영호남 지역감정이 극심할 때다. 사위 셋은 모두 경북 안동지방 인근 출신이나 그는 전북 고창 출신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도 의견 충돌이나 어색한 분위기를 유발한 적이 없다. 그럴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보다 둘째의 원만하고 예의 바른 성품 덕분이다.

우리는 둘 다 전기를 전공하여 같은 직종에 종사했으니 이 또한 묘한 인연이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면 할 얘기가 많고 대화도 잘 통했다.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기 안전관리 대행업체’를 창업해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그런데 군 복무 시절에 받은 수술 후유증으로 폐 질환을 앓게 되었는데 온갖 치료에도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여러 해 고생하다가 10여 년 전에 건강 관리를 위해 사업체를 정리하고 고창에 별장을 지어 귀향했다.

동서의 병이 코로나에 취약한 기저 질환이라 우리는 안타깝게도 최근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지난해 7월 셋째네와 같이 고창으로 병문안을 갔다. 동서가 고창에서 유명하다는 장어집을 예약해 놓고 우리를 반기던 모습 엊그제 같다. 세 부부가 맛있는 장어 불판에 둘러앉아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돌아올 때는 처제 부부가 손수 가꾼 채소와 방울토마토 등을 듬뿍 싸주었다. 1년 후에 이곳 경치 좋은 변산반도의 콘도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아쉬움을 달래며 헤어졌다. 그런데 약속한 1년이 반도 지나기 전에 혼자 훌쩍 떠나버렸다.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약속을 앞당겨 잡지 못한 게 너무 한이 된다.

아들딸이 요즘 직장 업무가 바빠 얼굴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모부 장례식만큼은 꼭 참석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내가 “장례식에 함께 갈 수 있겠느냐?”고 전화하니 둘 다 휴가를 내서라도 가겠단다. 모처럼 네 식구가 한 차를 탔건만 차 안의 분위기는 너무 침통했으며, 밤길은 한없이 멀기만 했다. 냉랭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내가 동서와의 추억담 하나를 꺼냈으나 “둘째 제부는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을 자주 하던 아내는 끝내 침통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서는 10년의 모진 병고 견디며 금년 초 칠순을 맞았다. 두 자녀 모두 잘 성장해 손주들까지 봤으니 무슨 여한 있으련마는 이렇게 갑자기 떠나보내기 너무도 가슴 아프다. 긴 세월 함께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의 흉보는 소리 듣지 못했다. 이보다 착한 사람 어찌 또 있으랴! 천당 문이 좁다 한들 동서 자리 없을쏘냐. 이제는 이생의 생사고락 벗어나 영면하기 빈다. 동서 영전(靈前)에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한 안타까움을 대신해 사모곡(思慕哭)을 바친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부회장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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