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⑨] 5.16 군부쿠데타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⑨] 5.16 군부쿠데타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11.04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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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박정희의 길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쿠데타의 성공과 함께 시작된다. 그날 새벽 5시부터 라디오에서는 쿠데타군의 성명이 거듭 나가고 있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今朝) 미명(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입법.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성명은 종일 수없이 반복해서 방송됐다. 말로만 떠돌던 군부 쿠데타가 드디어 일어났다. 나라를 더 이상 부패한 민간 정치인들에게 맡겨둘 수 없었다고 했다. 혁명의 설계자 김종필의 증언이다.

4.19(1960)의 역사성을 철학화해서 근대화의 전기를 마련해야 하는데 민주당 정권 은 그러지 못했어. 정쟁과 누습(陋習:옛부터 내려오는 나쁜 관습), 극도의 혼란에 서 벗어나지 못했지. 우리의 궐기는 부패 무능한 정치인들에게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더 이상 맡길 수 없다는 거였어.(중앙일보, ‘박정희와 죽자고 혁명했다...5.16 설계자, JP의 고백’, 2023.7.5.)

“今曉(오늘 새벽) 三時…”[5.16쿠데타의 발생을 보도한 경향신문 1면]

5월의 새벽에 시작된 박정희의 길은 1979년 10월 26일 저녁까지 18년간 이어졌다. 박정희는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이 길만 고집했다. 그의 출발은 간소했다.

군인들은 4.19혁명 이후의 정치 흐름을 관망하다가 1961년 5월 초 대학생들의 남북회담이 확정되고, 북한에서도 대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등 혼란이 극에 이르자 육사 8기생이 중심이 된 청년장교들이 박정희 소장(朴正熙,1917~1979)을 앞세우 고 5월 16일 새벽 드디어 3,6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기습적으로 한강을 건너와 서울을 점령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장면 정권은 집권한 지 9개월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자택에 연금되었다.(한영우,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 경세원, 2016)

덧붙이면, 장면(1899~1966)은 서울 출생의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세례명은 요한(John)이었다. 수원농림학교 시절 또래 청년들이 술, 담배에 기방 출입을 할 때 그는 성당에 나가 기도와 독서, 영어공부에 열중했다는 일화가 있다. 1916년 17세 때 집안의 소개로 만난 15살 난 부인(김옥윤, 1901~1990)과 6남 3녀를 두고 평생을 해로했다. 메리놀신학교의 도움으로 192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25년 맨하탄카톨릭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동성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김수환 추기경의 고교 시절 은사가 된다.

해방 이후 미 군정 시절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거쳐 제헌국회의원을 지냈다. 정부 수립 이후 초대 주미대사를 지내면서 신생 대한민국의 수립을 알리며 외국으로부터 정부 승인을 얻어냈고, 6.25 전쟁이 터지자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이후 2대 국무총리(1950.11~1952.4)와 제4대 부통령(1956.8~1960.4), 그리고 4.19혁명 이후 내각책임제 하에서 제7대 국무총리(1860.8.19. ~1961.5.18.)로 장면 내각을 이끌었다. 1961년 5.16쿠데타로 인해 총리직에서 강제로 물러난다. 영문 이름은 세례명을 그대로 써 John M(Myeon) Jang를 사용했다.

박정희의 길은 5.16으로 시작됐지만, 김대중의 길은 5.16으로 꺾이게 된다. 김대중의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 5.16을 「쿠데타」, 「군사혁명」, 「군사정변」 무엇이라고 부르건 간에, 한국에서 발생한 쿠데타 소식에 미국은 아연 긴장한다. 뒤에 밝혀진 이야기이지만, 미국 정보관계자들은 한국군의 동향 특히 쿠데타의 가능성을 예상하고 거론되는 인사들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박정희도 물론 그 대상자에 해당된다.

쿠데타 소식은 대부분 라디오를 통해 전해진다. 매체의 특성상 신문이나 TV 등에 비해 전달이 빠른 점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극히 예외적으로 일부 국가에서는 공공연한 쿠데타가 있다고 하지만, 쿠데타는 대개 비밀스럽게 진행된다. 한국의 군부쿠데타는 미국에서도 놀랍고 큰일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전후 부흥을 위해 유럽과 아시아에 많은 원조를 제공했고, 한국은 그 수혜국 가운데 한 나라였다. 공산주의의 위험을 막으면서 6.25전쟁의 피해도 복구할 수 있도록 미군도 주둔시키고 경제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은 소련과 중공(中共), 북한 등 동북아시아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내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나라였다. 1978년에 나온 미 하원 『프레이저보고서』의 기록이다.

1961년 4월 말, 미 중앙정보부는 박정희가 이끄는 국군 내 중요집단이 쿠데타를 계획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쿠데타의 위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만연 했다. 그러나 시민질서의 유지와 강력한 경찰력을 포함한 정치안정은 성공적인 쿠 데타 시도에 대해 회의를 품게하였다. 장면 총리는 쿠데타의 소문을 흘려버렸다.… 거의 무혈적인 쿠데타는 군의 일부 요원들, 특히 육사 8기생들 사이에 퍼져있던 고질화된 불만의 표출구였다. 특히 이들은 진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점과 파벌 및 상관의 부패로 인해 고충을 겪고 있었다.(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 『프레이저 보고서』, 실천문학사)

사실 그때 만해도 한국은 말 한마디 섞지 않는 소련(蘇聯)과 중공(中共)이라는 거대한 공산권 국가를 머리 위에 두고, 북한이라는 공산집단과 휴전선(休戰線)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굉장히 불안한 상태의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쿠데타라니?

쿠데타가 발생한 당일, NYT는 1면 오른쪽 톱기사로 한국의 쿠데타 관련 소식을 아주 자세하게 보도했다. “한국 정부 군부 반란으로 전복: 미국, 쿠데타에 반대” (South Korea Rule Seized As Armed Forces Revolt: U.S. Opposes Junta Coup) 라는 큰 제목 아래 모두 8개의 기사를 배치했다. 기사 내용 일부가 겹치는 것으로 봐, 각각 다른 기자가 급하게 기사를 작성하고 일부는 UPI, AP 통신 기사도 가져다 썼다.

주한 미국대사관, 장면 정권 지지

(서울,한국,화요일,5.16) 주한 미국대사관은 오늘 “한국민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헌법에따라 정당하게 수립된” 장면 총리 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군사혁명세력이 장면 정부로부터 권력을 장악했다고 발표한 이후에 나왔다.(워싱턴의 책임 있는 관리들은 한국에서 발생한 쿠데타는 미국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주한 미국대사관 마샬 그린 대리대사가 발표한 성명은 “미국은 자유롭게 선출되고 법적으로 정당한 한국정부를 지지한다는 유엔군사령관의 입장에 완벽하게 동의한다”며 “미국은 지난해 7월 한국민들의 자유투표로 선출되고 이어 8월 국회에서 정당하게 인준된 총리가 통치하는 한국 정부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고 밝혔다.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은 주한 유엔군을 지휘하는 입장에서 한국의 유일하게 인정받은 정부인 장면 정부를 지지하도록 휘하 전 장병에게 지시했다. 매그루더 사령관은 또 한국군 수뇌부가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해 군통제권이 즉각 합법적인 정부이래로 귀속되고 군 내부의 질서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엔군 사령부 대변인은 “한국 내의 미군과 미국 시민들은 군부대나 주거지역 내 에 머물도록 연락을 받았다”고 말하고 “한국 내 모든 미군 기지는 현 쿠데타 상 황에 개입하지 않도록 비상령이 내려져 있고, 미군은 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 다”고 말했다.

유엔군 대변인은 남.북 군사분계선에 배치된 병력들의 전투준비태세는 상향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엔군 사령부의 이 성명은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한국의 각군 참모총장과의 회동을 가진 뒤 발표됐다. 오늘 회동에 참석한 군사령관은 공군참모총장 김신 중장, 해병대 사령관 김성은 중장, 해군 참모총장 이성호 제독이다. 이들 군사령관들이 이번 쿠데타에 동의하고 참여를 결심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참고로 장도영(1923~2012)은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신의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가 동양대학 사학과에서 수학했으며, 학병으로 차출돼 중국에서 복무했다. 해방후 귀국해 신의주동중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월남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1946.3)하고 소위로 임관된다. 6.25전쟁 발발 당시 그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문관인 박정희를 현역으로 복귀시켜 근무하도록 했다. 장도영은 1950년 10월 준장으로 진급해 사단장으로 용문산 전투와 파로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휴전 이후 육군참모차장, 2군사령관 등을 거쳤다. 2군사령관 시절 그는 예편 위기에 몰린 박정희를 2군부사령관으로 끌어주는 등 군 시절 박정희와 5차례나 상하 관계를 맺었다. 5.16 쿠데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반혁명사건으로 구속된 뒤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간 뒤(1963) 미시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69년부터 1993년 정년 때까지 위스콘신대를 거쳐 웨스턴미시간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했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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