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⑪] 7월 7일, 최초의 반혁명사건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⑪] 7월 7일, 최초의 반혁명사건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11.18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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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쿠데타의 주역은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지만, 처음부터 2인자인 박정희 장군의 존재도 언급된다. 눈 밝은 관측통이라면 느낄 수 있을 정도고, 쿠데타 이후 미국으로 망명을 선택한 주미한국대사관 고광림(高光林) 공사는 박정희 소장을 주모자라고 바로 지명했다.

고광림(1920~1989, 아놀드 고)은 북제주 애월 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마치고 해방 직후 서울법대에서 법사상사를 강의하다가 1949년 유학을 떠나 러트거스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데 이어 하버드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54). 이후 고광림은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이승만 정부의 독재에 반대하는 활동을 한 계기로 1960년 4.19 직후 장면 정권 당시 은사인 장이욱 박사(주미대사)의 추천으로 주미 공사로 외교관 생활을 잠시 했으나, 516 이후 사임하고 대학교수로 돌아갔다.

고광림은 부인 전혜성 박사와 함께 여섯 명의 자녀를 하버드와 예일대 등 일류대학으로 진학시켜 자녀 교육에 성공한 한국인의 표본으로 국내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고광림 박사 가족은 부부와 6명의 자녀가 모두 12개의 박사학위를 갖는 기록을 세웠으며, 장남 고경주(하워드)와 동생 고동주(에드워드)는 의사로, 3남 고홍주(헤럴드)는 예일대 법대 정교수로 미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를 지내기도 했고, 막내 고정주(리처드)는 보스턴에서 미술가로 활동했다. 장녀 고경신은 서울의 중앙대학교 교수로, 차녀 경은(진)은 예일대 법대 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고광림은 자신의 이름과 아들의 미국식 이름을 모두 D로 끝나도록 지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발족 사흘 만에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었고, 장도영과 박정희가 각각 의장, 부의장을 맡았다. 쿠데타 성공 두 달도 안 돼, 장도영은 7월 초, 반(反)혁명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체포된다. 정치는 한순간에 빛도 되고 그림자도 된다고 했는데, 장도영에게 빛의 시간은 극히 짧았다.

이제 박정희의 시간이 왔지만, 반혁명(反革命) 움직임은 상당 기간 계속된다. 5.16쿠데타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생들과 박정희 소장의 연합으로 성공했지만, 군내 비주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쿠데타가 성공한 뒤 나타난 지도부. 장도영 중장(왼쪽)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을 맡았다.(1961.5.20)

7월의 장도영 장군 제거는 반혁명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어지는 10여건의 반혁명사건은 주로 군 내부에서의 세력 다툼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쫒겨난 민주당 등 구 정치인들이 관련된 사건도 있었다.

5.16 이후의 반혁명사건은 관련 전문가들에 의해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발표한 사건들’이라고 정의한다. 주류가 일종의 숙청 작업을 벌인 것이다. 5.16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생들과 박정희의 연합으로 성공했지만, 비주류 세력도 만만치 않아, 주류 측은 반혁명사건을 일으켜 비주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건이 1961년 7월 9일 발표된 장도영 의장 제거로 평안도 군맥이 숙청됐다. 장도영과 주요 관련자들의 고향이 평안도여서 뒤에 ‘텍사스 토벌작전’이라고 불렸다.

이어 1962년 이주당사건으로 민주당 계열의 구정치인들이 숙청됐고, 1963년 박임항 김동하 박창암 이규광 등 함경도 군맥 숙청이 있었다(알라스카 토벌작전). 1965년에는 원층연 박인도 등이 실제로 쿠데타를 모의하는 사건도 적발됐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박정희와 김종필 중심의 권력기반이 굳혀지면서 반혁명사건도 잦아든다. 대략 10여 건의 반혁명사건이 발표됐으며, 관련자들은 짧은 기간 수감됐다가, 풀려나왔으며, 관계가 회복된 뒤에는 정부에 참여해 활동하기도 했다.

쿠데타 한 달 반 뒤 발표된 최초의 반혁명 사건, 소위 ‘텍사스 토벌작전’으로 장도영 중장, 문재준 대령, 박치옥 대령 등도 함께 구속된다. NYT의 기사 제목도 그랬다.

한국의 데스 플롯(Death Plot), 전 최고회의의장도 포함.

(한국,서울,7.6) 한국의 권위 있는 소식통들은 오늘 장도영 중장이 국가재건최 고회의 내의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어, 혁명 지휘부에서 배제될 필요가 있었다고 밝혔다. 지난 월요일(7.3) 장 장군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내각수반 자리에서 물러날 때부터 여러 의문들이 떠돌았다. 5.16쿠데타의 주모자로 지목받던 박정희(Pak Chung Hi) 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이어받았고, 송요찬 국방부 장관이 내각수반을 맡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 가운데 준장 1명, 대령 1명, 중령 1명이 장 장군과 함께 최고회의에서 물러났다. 권위 있는 소식통들은 이 장교들이 최고회의 내 경쟁자를 암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두 명의 영관급 장교는 공수부대의 지휘관으로서, 이들은 장면 정권을 퇴진시킨 5.16 쿠데타 당시 다른 부대와 함께 참여했다. 장 장군과 3명의 조력자들은 최고위원에서 사임한 뒤 당국에 체포됐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으나, 체포 여부에 대한 확인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고회의 대변인도 이 보도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어제 최고회의가 장면(Dr. John Chang) 박사와 고위 보좌진들이 친(親)공산주의 활동에 연루됐다고 비난한 이후, 장 전 총리 역시 체포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장 전 총리는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장 박사와 7명의 전직 각료를 포함한 측근 11명 등은 “한국을 공산화로 이끌 수 있는 친공산주의 음모”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사건 조사 책임자인 김재춘 대령은 이들이 구류 상태에 있거나 가택연금 중에 있다고 밝혔다. 김 대령은 이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겠다고 말했다.

사무엘 버거 주한 미국대사는 오늘 장면 박사에 대한 한국 정부측의 주장에 대해 구두로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버거 대사는 장면 전 총리의 무고함에 대해 줄곧 언급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관리들은 버거 대사의 이러한 행동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한 고위 관리는 이러한 행동은 한국 내정에 대한 주한 미국대사의 공공연한 간섭이라고 말했다. 이 관리는 “재판도 해 보지 않고 무슨 방법으로 한 사람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하 생략)

데스 플롯(Death Plot)은 연극, 드라마, 영화 등 예술작품에서 죽음(Death)이라는 장치를 설치해, 거기서부터 스토리를 풀어나가거나 결말에 죽음을 맞게 하거나 등등 죽음을 중요한 장치로 쓰는 구성방식을 말한다. 신문의 이 표현은 혁명이라는 역사의 무대에서는 죽음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으로 등장하는데,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전 의장이 이 장치에 걸려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비극적인 결말을 말하고 있다.

그럼 당시 군사정권의 안테나요 핵심이었던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은 왜 장도영 의장을 잡아들인걸까?

내게 늘 의문의 인물이 있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장관, 육 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의 5개 직책을 한 손에 쥔 장도영이다. 1961년 5월 24일 장도영은 난데없이 기자회견을 통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장 의장의 발표는 우리와 사전에 상의없이 이뤄져 ‘도대체 무슨 뜻을 품고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게 했다.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서 무슨 언질을 받아 엉뚱한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생겼다. 그는 또 사흘 뒤엔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바꿨다. 이 역시 우리와 사전 협의가 없었다… 5월 31일 장 의장은 AP통신과의 회견을 통해 8월 15일을 전후해 민정이양을 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그것은 미국의 눈치를 보고 윤보선 대통령의 내심을 반영하는 내용이었다. 그뿐 아니라 장도영의 인맥이 최고회의, 내각, 국영기업체를 속속 파고들어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렇게 박정희 부의장의 혁명 지도력을 흔드는 일이 여기저기서 잦아졌다. 문재준(대령, 헌병감)은 박 부의장의 질책을 받은 뒤 박치옥 공수단장 등과 만나 “7월 3일 박정희와 김종필을 해치우자”고 모의하고 병력동원 계획까지 세웠다. 이 첩보는 사전 에 정보부의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나는 장 의장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박 부의 장에게 보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무척 고민했지만 결국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김종필, 『김종필 증언록』, (주)미래엔, 2016)

김종필은 또 장도영이 자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5.16 군사 쿠데타에도 발을 걸쳐놓고 한편으로는 미국 중앙정보부(CIA) 한국 지부에 근무하던 크래퍼(가명) 요원의 쿠데타 기도에도 줄을 대고 있었다고 같은 책에서 기술했다.

크레퍼 그룹도 장면 정부가 공산주의의 침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혼란한 정부여서 정권을 교체하려 했다. 크래퍼는 장면 정부를 뒤집고 새로운 국가 지도자로 장도영 참모총장을 추대하려고 했다. 장 의장의 양다리 작전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종필이 한국 중앙정보부를 맡고 있던 1961년 여름에 밝혀졌다. 이래저래 장도영 장군은 박정희, 김종필 등과 오래 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고, 동지는 더더구나 아니었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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