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많이 모일 줄은 처음엔 생각도 못했지요.”
“그렇게 많이 모일 줄은 처음엔 생각도 못했지요.”
  • 이종환 기자
  • 승인 2010.08.1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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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한인축제 처음 만든 김진형 회장

 
“그렇게 많이 모일 줄은 처음엔 생각도 못했지요.”
서울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만난 김진형회장은 LA한인축제가 처음 열리던 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운을 뗐다.

1974년 첫 축제가 열렸다고 한다. 2년전인 72년 LA의 한인 밀집지역에 한인상가들을 중심으로 해서 코리안타운번영회를 만들고, 상가 활성화를 위해 축제를 기획했다는 것. 코리안타운번영회 초대회장도 김진형회장이 맡았고, 축제 조직도 자연스레 그의 몫이었다는 것.

“축제를 열기로 하고 경찰청에 갔습니다. 퍼레이드 행사를 위해 도로사용허가를 받아야 했거든요. 경찰에서 묻더군요. 몇 명이 모이냐고요.” 곰곰히 생각해서 대답한 것이 3천명이었다고 한다.

“그해 11월4일이었습니다. 잊혀지지 않아요. 그날 퍼레이드가 열렸습니다. 경찰은 3천명이 모인다고 해서 사이드카 2대를 배치해 교통정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도로에 운집한 사람들은 무려 3만명이나 됐어요. 예상보다 10배를 초과한 거지요”

이날은 일요일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교통정리를 위한 인력도 긴급충원도 되지 않아 그날 당번에 나섰던 경찰들만 애꿎게 큰 애를 먹었다는 것. 이렇게 출발한 LA한인축제는 지금 LA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처음에는 미국 정치인들은 별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았어요. 퍼레이드때 오픈카에 타달라고 요청해도 NO라고 하기가 일쑤였지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너무 많은 정치인들이 일찍감치 요청을 해와서,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거절할지를 고르는데 애를 먹고 있어요”

김회장은 LA코리안타운을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금 한인타운이 된 올림픽거리도 그의 노력이 배여있다.

“올림픽거리에 우리말 책을 파는 서점이 문을 연 게 1971년입니다. 그 바로 옆에 이희덕씨가 경영하던 올림픽 식품점이 있었지요. 이게 한인거리가 된 모체였습니다”

김회장은 이 거리를 한인타운으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나섰다. 이 거리에 있는 중국인 경영의 세탁소와 일본인 경영의 이발소, 미국인 경영의 잡화점 등 많은 점포들에게 한글 간판을 달도록 했다는 것. 간판 집이 없어 김회장이 직접 글을 써줬다고 한다.

“한글 간판을 달아주면 한국 손님은 물론, 이를 신기하게 여기는 손님들의 발길이 잦아질 것이라고 설득했지요. 꽃집 문방구점 술집 이발소 세탁소 등 간판 62개들 만들어 달아줬습니다”

이렇게 간판을 달고 나니 예상대로 손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찾아오고, 한국손님들이 늘어나면서 가게 주인들이 한국인을 종업원으로 고용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렇게 LA코리아타운의 탄생사를 소개하는 그는 서울대 불문과(55학번)를 마치고 관광공사의 전신인 국제관광공사에 근무하다 1968년 LA로 가서 정착한, ‘LA 올드타이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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