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고구려 금동 반가사유상
[시론] 고구려 금동 반가사유상
  • 전대열<대기자>
  • 승인 2011.12.22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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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1천5백여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추측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정립(鼎立)하고 있을 때다.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꽤나 오랜 시일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까지는 아마 특별히 의미 있는 종교는 없었을 것이고 무속이 바탕을 이뤘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서로 전해졌을 것으로 역사가들은 파악한다. 그것은 순전히 지정학적인 의미가 앞서는 것이지만 남아있는 유적도 그것을 증명한다.

불교유적은 한반도에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늦게 불교가 전파된 신라의 유적이 많다. 신라는 처음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완강히 거부했다. 오죽하면 이차돈의 순교(殉敎)까지 나왔겠는가.

그랬던 불교를 가장 잘 섬기고 수많은 절을 지었으며 엄청나게 많은 불상을 남긴 나라가 신라다.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 남산에는 지금도 끊임없이 유적이 발굴된다. 가히 불교의 보물창고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처처불상(處處佛像)이 실감나는 곳이다. 불상은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만 조성해 놓은 게 아니다.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등등 수많은 부처님 이름이 들어있는 불상들을 모셨기 때문에 절에 가서 불상의 이름을 알아맞출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기독교에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십자가 하나만 걸어 놓고 있지만 불교의 불상은 너무나 복잡다기(複雜多岐)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불상을 이런 저런 방법으로 조성하다보니 나무로도 만들고, 돌로도 제작하며 나중에는 쇠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쇠는 금동이나 청동이 주원료다. 근자에 흙으로 빚은 불상 중에 도자기로 구은 것도 나와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한다. 불상의 문화재적 가치는 엄청나다.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나무로 된 반가사유상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자기들의 작품으로 고집한다. 백제의 작품으로 판명나면 자존심에 손상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수없이 많은 불상 중에서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하고 화제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반가사유상이 아닌가 싶다.

절에 가면 대웅전 한 가운데 모셔져 있는 모든 부처님은 좌상의 경우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두 다리를 포개서 평형을 유지하고 한 손은 엄지와 식지로 동글게 보이게 한다.

이를 보고 불량한 사람들이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시주하라고 동그라미를 그렸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은 단전에 힘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며 사해대중의 화합을 구하는 자세라고 한다. 종교계의 갈등과 부패가 그런 식의 비판 아닌 비판까지 불러왔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반가사유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한 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에 편안하게 얹어 놓고 약간 몸과 고개를 숙이고 오른 손은 턱 쪽에 댄 자세다. 로댕의 조각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은 벌거벗은 남자가 몸을 깊숙이 숙이고 주먹을 턱에 고인 모습이어서 반가사유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사람이 깊은 고뇌에 빠지려면 좀 숙인 자세가 제격인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보 제83호로 금동 반가사유상을 지정했다. 이 반가사유상은 신라시대 작품으로 세계 미술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백제시대의 작품으로 남아 있는 반가사유상은 충남 서산에 있는 마애불을 꼽는다. 보통 반가사유상은 크지 않은 게 특색이다. 목조나 금동제를 막론하고 대개 20cm 미만의 높이다. 그런데 서산 마애불은 커다란 암벽을 조각한 것이다. 여래(如來)입상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 반가사유상, 오른쪽에 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세 부처의 입가에 감돌고 있는 미소는 후인들이 ‘천년의 미소’로 이름 지었다. 대좌와 광배를 두루 갖추고 있어 귀중한 자료일뿐더러 국보 제84호로 삼존불은 2.8m, 반가사유상은 1.66m의 높이다.

고구려에서는 반가사유상이 제작되지 않았다는 학자들이 있었으나 8.15 광복 후 평양에서 발굴된 작품이 서울에 왔다. 오른손의 일부가 절단된 모습이었지만 드물게 보는 작품으로 곧 국보 제118호로 지정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희소가치가 있는 고구려 금동 반가사유상이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 것은 한국의 미술계에 큰 충격을 준다. 김광식이 중국을 거쳐 북한에서 반출한 반가사유상은 머리 부분에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들어 있어 보는 이들을 황홀하게 만든다.

14cm의 크기로 반가사유상의 전형인 이 작품에 대해서는 문화재에 대해서 해박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감히 손대기조차 어렵게 한다. 전문가들의 감정을 거쳐 제작연대나 미술사적 가치에 대한 평가가 나오겠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북한에서 우리의 소중한 고구려 유적들이 훼손되거나 해외로 유출되는 사태가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정일의 돌연사 이후 급변할 수 있는 정세 속에서도 문화재만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되뇌며 모처럼 만나게 된 고구려 금동 반가사유상의 반입은 문화사적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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