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유학 생활에서 경험한 ‘부조리’ 작품에 담아
러시아 유학 생활에서 경험한 ‘부조리’ 작품에 담아
  • 모스크바=최승현 기자
  • 승인 2012.02.19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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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국제인권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 정석우씨

 
한국에서 기자는 이주 노동자들을 취재할 기회가 많았다. 차별과 홀대, 멸시는 이미 그들의 생에 일부분이 돼 있었고 이주민들의 삶을 타이핑하는 기자는 따듯함을 가장한 측은한 시선으로 한국 사회의 소수 이민자들을 대했다.

이주민 1백만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회가 이주민 포용 정책을 펼친 다 한들 그들의 낯선 문화와 생김새는 아직까지도 우리에게는 언감생심이다. 정석우(33세, 러시아국립영화학교 재학 중)씨의 ‘Не понимаешь? Поймешь!’를 보기 전 까지만 해도 말이다.

정씨는 최근 이 작품을 통해 모스크바 국제예술제(НОВЫЙ МИР)에서 단편영화부분 1등을, 국제인권영화제 ‘СТАЛКЕР’ 에서 심사위원상을 연이어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러시아 학생이 아닌 한국 유학생이 재학 중 국제무대에서 한 작품으로 두 차례에 걸쳐 수상의 영광을 안는 일은 흔치 않다. ‘Не понимаешь? Поймешь!(이해가 안돼? 이해하게 해줄게’)는 러닝타임 17분짜리 단편 영화다.

극 중 주인공은 한국 유학생이다.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학업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러시아에 왔다. 러시아어는 현지에서 배운 인사가 전부다. 거리에서 러시아 경찰을 만난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는다. 합법 체류이고 여권도 있다. 거주자등록증도 소지했다. 법적으로 하등 문제가 없지만 주인공은 계속해서 조롱당한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야 니 빠니마유”를 연발한다.

주인공에게 무서운 기색은 없다. 다만 현재의 상황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계속해서 주인공에게 말한다. “이것 봐 너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주인공이 알아들을 리 없다. 시시껄렁한 대화가 경찰들 간에 오고 간다. 시간이 지나도 그를 놔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무료한 표정으로 주인공을 쏘아본다. 이미 불법 체류로 여러 번 경찰서를 출입한 투루크멘 출신 노동자가 주인공에게 코멘트를 해준다. 그때서야 주인공은 알아차렸다는 듯 한숨을 쉰다. 가지고 있던 1000루블을 주고서야 주인공은 경찰서를 빠져 나온다. 그리고 또 다른 경찰관이 자신의 앞에서 손짓하며 희미한 웃음을 건넨다.

이 영화에서는 소비에트 붕괴 이후 시장 자본주의의 유입이 급속도로 전개되면서 물신주의에 물든 러시아 공직 사회의 부정부패, 급작스럽게 ‘소수자’가 된 유학생의 유린되는 인권, 소비에트 붕괴후 독립 국가에서 새로운 국적을 취득했지만 러시아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투루크멘 출신 ‘불법체류자’의 현실이 교차한다.

가볍지 않은 주제고, 타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농후하지만 영화제에 참석한 관객들은 큰 환호를 보냈다고 장씨는 전했다. 러시아인들 역시 조금은 ‘불편했지만’ 통쾌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영화를 제작하기에 앞서 작품 소재가 민감한 부분이어서 망설이기도 했지만 영화를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윤리적 가치 판단을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며 “이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 작품을 제작하게 됐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는 모스크바에서 거주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법한 상황을 설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갑자기 ‘소수자’가 된 우리는 주인공의 표정처럼 얼떨떨하기만 하다. 불법 체류자지만 경찰서 출입이 노상 일이 돼 버린 투루코멘지스탄 노동자의 표정과 비견되는 부분이다. 우린 어쩌면 암묵적으로 불의에 동조하며 현실에 수긍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국제인권영화제 수상은 남다르다. 4년 간 일을 병행하며 쉴 틈 없이 작품 창작에 매진한 결과였다.

“이 영화는 저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이고, 또 러시아에서 공부하게 될 한국 학생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꼭 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수상을 통해 많은 관객들이 저의 영화를 보고 공감하기를 바란 것이겠죠. 영화는 다른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도 소통의 수단입니다. 관객들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는데 반응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저의 이야기가 세상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희열감을 느꼈죠”

장씨는 작품을 제작하기 전 여러 유학생들을 만났고 그들이 모스크바에서 느끼는 공통된 불안감과 부조리함을 작품에 반영했다. 많은 유학생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주러 한국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허사였다. 대사관 측도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돈을 주고 나오는 게 가장 빠르고 안전하다”는 답변뿐이었다. 자국민의 인권과 권익을 책임지고 있는 대사관도 속수무책인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정씨는 더욱 열망했고 결국 해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함박눈이 퍼부었다. 햇볕이 껴들 틈도 없이 며칠 동안 하염없이 눈이 내리는 이곳은 머나먼 타지. 오래전 한 취재원에게 들은 이주민 여성의 이야기가 불연 듯 떠올랐다.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부지런히 재봉틀을 돌리던 그녀는 넋이 나간 듯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오래된 이불속 솜뭉치처럼 뒤엉킨 먼지가 폴폴 날리는 공장 내부. 그녀가 뿌옇게 김이 서린 창을 옷소매로 닦아 내려가면 상기된 그녀의 양 볼이 창을 벌겋게 물들였다. 베트남 출신 이주 여성인 그녀는 한국에 와서 처음 눈을 봤다고 했다. 소복히 쌓이는 눈처럼 희망도 부풀었다.

그러나 상처난 자리마다 뿌리내리는 실밥의 수가 늘어갈수록, 체불된 임금이 불어날수록 그녀는 점점 하얀 눈처럼 창백해져갔다. 봄기운을 알리며 동백꽃이 이르게 핀 어느 날 그녀는 재봉틀 앞에서 피를 토했다. 이후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함께 일을 한 노동자들은 그녀가 죽었다고도, 단속반원들에게 끌려갔다고도 했다.”

상황과 처지는 제각각 다르지만 이곳서 한국인들은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정씨의 작품은 비단 ‘소수자’를 바라보는 러시아인들의 시선에 국한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문화’ 시대를 표방하는 문화 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오늘도 여전히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멸시가 끊이지 않고 있을 테니 말이다. 나비효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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