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이른 장마가 몰고 온 비바람 속에 하지(夏至)를 맞았다. '입하→소만→망종→하지→소서→대서'의 여름 절후(절기) 여섯 번 중 입하(立夏)가 '부스스 일어난 여름'의 입구, 그 문턱이라면 하지는 '걸어서 여름 한가운데에 다다름'이다.
하지의 별칭은 '북지(北至)'다. 영어 'summer solstice(하지)'의 '솔스티스'가 극점(極點), 최고점을 뜻하듯이 태양이 북회귀선까지 이른다 하여 '북지'라 부른다. 여름 한가운데의 하지―북지는 가장 씩씩한 절기다.
영어의 'the summer of life(인생의 여름)'는 장년의 절정기를 뜻한다. 'summer'는 또 대들보와 대석(臺石)을 의미한다. 계절의 중추와 토대라는 뜻이다. 하지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뿌듯한 절기가 아닌가.
그러나 배고프던 시절, '농가월령가'에서 노래한 하지는 보릿고개 꼭대기를 막 넘겨 내리막길로 들어서던 무렵이었다. '오월이라 중하 되니/ 망종 하지 절기로다/ 남풍은 때맞추어 맥추를 재촉하니/ 보리밭 누른빛이 밤사이 나겠구나/ 문 앞에 터를 닦고 타맥장 하오리라'―맥추(麥秋)는 보리 걷이, 타맥장(打麥場)은 보리 타작을 하는 마당이다.
그러니까 보리 타작 때가 바로 하지라 하지 때 비가 오면 못쓴다. 중국에선 하지 때 부는 바람도 꺼렸다. '하지에 바람이 불면 삼복 더위가 심하다(夏至有風三伏熱)'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지 보리의 원군(援軍)이랄까 구원투수라면 단연 햇감자였다. 미처 여물지 못한 햇마늘로 장아찌를 담가 두는 때도 하지다.
그런데 '보리 누름에 선늙은이 얼어죽는다'는 속담이 있다. 더워야 할 절기에 도리어 춥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는 뜻이다. 한유(閑裕)하게 절기나 읊기엔 이 시국, '저 풍진 세상'이 너무나 삭막하고 어둡고 불안하다. 계절의 중추,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하지 향기에 흠뻑 취해 잠시나마 세상사 시름 걱정 탁 퉁겨놓을 수는 없는가.
박청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