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아이디어로만 살다간 金永珍회장
[시론] 아이디어로만 살다간 金永珍회장
  • 전대열<大記者>
  • 승인 2012.06.30 0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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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 김영진회장이 어제 세상을 떴다. 1946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예순일곱에 불과하다. 그가 중기업을 일궈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세상에 떠들썩하게 허명을 날린 사람은 아니다. 그는 충청도 보령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졸이 학력의 전부다.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변변한 직장을 잡는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었다.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했다. 의류와 생활용품 그리고 음식종류가 대종이었다. 그는 생활용품에 손을 댔다. 그릇, 도기 등 다양한 제품이 제 나름의 모양을 뽐내며 손님을 찾는다.

여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은 그는 제조업에 눈을 뜬다. 그러나 돈도 부족했지만 공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김영진은 제품생산을 타 업체에 위탁했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이제는 직접 생산에 나선다. 고생길의 시작이다.

그가 눈을 뜬 것은 밥솥이었다. 우리 생활은 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선조들은 다양한 밥솥을 만들어냈다. 용도도 가지가지다. 가마솥으로는 소여물도 쑤고 조그마한 솥으로는 밥을 했다.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솥이다. 당시 단순한 전기밥솥이 있었지만 그가 착상한 것은 맛 나는 솥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게 전기 압력․보온 밥솥이다. ‘91년도에 모닝컴이라는 이름의 완제품을 선보인 것은 실로 그의 왕성한 창의력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학에서 정식으로 기계학이나 전기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전기를 이용한 기계를 제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 생산구조였지만 제품에 대한 시중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판매보다는 생산에만 열중하다보니 자금이 달렸다.

부동산 담보 없이는 은행대출은 어림도 없다. 생각하다 못해 특허를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대웅전기에서 인수했다. 외국제품에만 의존하던 전기압력 밥솥은 대웅전기에서 꽃을 피웠다. 일본 독일 등의 제품보다 더 우수하다는 소비자의 평가였다.

김영진의 집념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그 과실은 그를 떠났다. 다른 이에게 과실은 넘어갔지만 손에 쥔 돈으로 그는 믹서기와 전기난로 등에 투자했다. 불티나게 팔렸지만 때마침 IMF의 폭풍을 만났다. 제조업과 부동산업이 치명타를 입었다. 영세 제조업자들은 무수히 부도를 내고 쓰러졌다. 김영진도 그 중의 하나다.

그렇다고 평생 아이디어 하나만을 믿고 사업을 벌여온 그가 좌절할 수는 없었다. 이 때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만난다. 송영현(宋泳鉉)이다. 송영현은 대웅전기에 근무하면서 김영진과 만났지만 그의 열정과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흠뻑 빠졌다.

김영진은 사람 보는 눈이 누구보다도 예리했다. 시장판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상대하면서 성실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 장래가 있는 사람을 가릴 줄 알게 된 것이다. 시간만 나면 송영현을 불러내 한국에서만 전해 내려오는 중탕(重湯)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중탕이란 주로 약을 다리면서 쓰는 방법인데 직접 끓이거나 데우지 않고 끓는 물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다리는 방법이다. 이러한 중탕법은 세계적으로 한국인만이 사용해오던 방법이어서 우리 고유의 전통성을 살리는 효과도 있다.

게다가 약을 다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온갖 음식을 모두 이 방법으로 할 수 있다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창출해 낸 사람이 바로 김영진이다. 오쿠는 이렇게 탄생했다. 천신만고를 모두 겪으며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딛고 일어서는 집념은 놀랍기만 하다.

김영진의 창의성에 감복한 송영현은 대웅을 나와 오쿠에 합류한다. 2003년이다. 김영진회장은 공장을 송영현에게 믿고 맡길 수 있어 직접 영업에만 전력투구하게 되었다. 영업에서도 그의 창의력은 빛났다. 처음에는 일체의 위탁판매를 사양하고 오직 홈쇼핑을 통한 직접 판매에 전념했다. 불티나듯 팔렸다.

공식적으로 연매출 800억을 자랑한다. 이제는 판로를 다양화해 대형마트나 백화점에서도 오쿠를 만날 수 있다. 김영진은 2009년부터 중국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하여 엔타이에 공장을 차렸다. 미국과 호주에도 진출한다.

아직은 완제품 판매에 그치고 있지만 현지 생산도 하려고 한다. 외국의 호응도가 커지면 현재의 공장 규모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보령에 새로운 공장을 짓고 있다. 여기에는 협력업체들도 함께 입주할 예정이다.

이처럼 실패를 이겨내면서 성공신화를 쓰기 시작했던 김영진회장은 불행히도 건강을 잃는 큰 실수에 가슴을 친다. 그가 평소에 간직한 인생 신념은 “돈이 돈으로 끝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나는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반드시 공익재단을 만들겠다. 사회 환원으로 세상을 밝게 만드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라고 틈이 있을 때마다 외쳤다.

그가 뜻을 펴기도 전에 폐질환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미망인 정혜순과 슬하에 권수와 성수 두 아들이 김회장의 유지를 충실히 받들 것으로 생각하지만 뒤를 이은 송영현사장의 남다른 추진력이 한껏 기대된다. 천수를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되지만 하늘의 부름을 어찌하랴.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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