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45] 짜장면
[아! 대한민국-45] 짜장면
  • 김정남(본지 고문)
  • 승인 2013.07.11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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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하루에 700만 그릇이 팔리는 짜장면은 이제 한국의 국민음식이 된지 오래다. 짜장면의 모태는 중국 산둥(山東)지방의 토속음식인 ‘자장멘(炸醬麵)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자장멘’은 산둥 출신 화교들이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한 1880년대 중반에 우리 곁으로 왔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그 여파로 1883년에 인천(제물포)이 개항했다. 이렇게 해서 인천은 일본과 중국, 미국 등 외국의 배들이 정박, 조선으로 들어오는 관문이 되었다. 이때 중국 산둥지역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자장멘’이라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국수에 된장과 야채를 얹어 비벼먹는 ‘자장멘’은 그 조리법이 간단하다.

그러나 우리 입맛에 맞는 ‘짜장면’은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난 1950년대 초반에야 만들어졌다.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 짜장면의 발상지로 알려진 인천 차이나타운의 공화춘은 처음부터 대중음식점이 아니었다. 색판회석(色辦會席-여자접대부가 서비스하는 모임장소)이라는 글이 말해주듯이 일제 강점기 하의 청(淸)요리집은 기생이 술을 따르고 마작판을 벌이는, 한량들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공화춘 메뉴판의 ‘특등요리(特等料理)’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자장멘’은 들어있지 않았다.

1920년 이후 매년 2만명 이상 밀려 든 산둥 출신 ‘쿠리(苦力-노동자)’들은 조선의 방방곡곡에 차고 넘쳤지만, 그들은 그들의 음식을 조선인과 나누지 않았다. 여기에는 1931년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확산된 한국인의 중국인에 대한 배타의식과, 물 위에 뜬 기름처럼 토착인과 더불어 살려 하지 않는 중국인 특유의 고립주의도 작용했다.

그들은 “올 적에는 빈손 들고 왔으나 갈 적에는 큰 돈을 갖고 간다”는 말처럼 악착같이 돈만 벌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짜장면은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고, 6.25한국전쟁으로 화교사회가 가뜩이나 위축된 상황 속에서 태어났다. 미국이 원조해 준 밀가루로 고픈 배를 채우던 1950년대, 화교들은 그들만의 끼니였던 ‘자장멘’을 오늘날의 짜장면으로 진화시켜 우리 국민들에게 먹을거리로 제공했다.

그렇게 한국 국민 속에 파고 든 짜장면은 1970년대 중반에는 물가지수 항목으로 선정되었다. 또 1970년대 혼분식을 장려하던 정부정책과 맞물려 ‘국민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당시의 한국사람들에게는 ‘짜장면 외식’을 하는 것이 ‘특별한 날’의 풍경이었다.

짜장면을 배달해주는 철가방의 역사도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나무상자로 배달을 하다가 그 다음에는 알루미늄 철가방이 생겨났다. 나무가 무겁기도 하려니와 음식국물이 배어들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이 철가방은 한국 디자인문화재단에서 선정한 ‘지난 반세기 한국인의 일상을 대표할 수 있는 생활 속 디자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짜장면과 철가방은 그만큼 한국국민에게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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