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주인을 기다리는 슬픈 집
[Essay Garden] 주인을 기다리는 슬픈 집
  • 최미자<미주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3.10.14 08: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랑스러운 한글날, 반포 567주년을 생각하면서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남편은 동네에 무슨 일이 있는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나와 앞집으로 카메라를 향해 놓고 있다고 했다. 궁금해진 나는 세수도 하지 않고 나가보았다. NBC 방송차가 집 앞에 서 있다.

어젯밤 비행기 사고로 두 사람이 죽었단다. 부지런한 방송국에서는 정보를 알아내려고 빈집에 찾아온 친구를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늘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백 팩을 메고 노동자처럼 보이던 아저씨가 무얼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콘도에 살던 55살 앤디가 25년 비행기 정비도 했던 조종사라는 말에 나는 또 놀랐다.

여자 친구는 큰 병원에서 30년째 일하는 간호사, 이십 년 가까이 우린 마주 보고 살았지만, 두 사람은 거의 외면했다. 몇 해 전인가 그녀에게 내가 말을 걸어 인사했다. 우리 집 차고 문을 열어 놓고 내가 일하면, 간호사 로비는 집 베란다 문을 열어 놓고 강아지와 큰소리로 대화하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녀의 명랑한 다른 모습에 나는 혼자 픽 웃곤 했다.

남자도 우리 집 앞에 유타주의 자동차 번호판을 단 차를 매일 세워놓는데도 남편과 눈길을 맞추지 않았다. 두어 달 전에는 그가 동네를 배회하던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여 길가에서 큰소리로 경찰에게 불만을 이야기해서 앤디라는 이름을 처음 알며 그가 정의롭다고 생각했다. 여자 친구인 이웃여자와 귀염둥이 개를 데리고 늘 동네 뒷산으로 산책하는 다정한 사이였다. 방송국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했는데, 다음날 마감 뉴스에는 롱타임 걸프랜드라고 말했다.

묘하게도 사고가 난 그날 밤만 얄궂은 운명의 비가 내렸다. 로스앤젤러스는 종일 폭우가 내렸지만 샌디에고는 오후 4시경에야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팜스프링에서 출발했던 그들은 작은 경비행기 무니를 타고 엘카혼에 6시 15분에 도착할 예정인데, 올해 첫가을 폭풍이 부는 험악한 볼칸 산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구조대가 새벽 1시경에 추락장소를 알아냈다니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낮에 또 다른 방송국에서 나를 찾아왔다. 샤워를 마친 후라 나는 젖은 머리로 그들을 만나야 했다. 나의 아침 인터뷰가 벌써 뉴스에 나갔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나가는 이웃을 붙들고 물었지만, 모른다며 거의 손사래를 쳤다. 오랜 이웃인 내가 짧은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다행히 두 이웃이 나와서 한마디씩 했다. 저녁에 인터넷으로 들어가 방송내용을 보니 연방정부가 지금 폐쇄되어 진상조사도 늦어지는 모양이다.

10월의 첫 비에 바람불고 천둥까지 내리던 사나운 밤이 지나고 전날처럼 다음날도 밝은 해가 떴다. 명품 오픈카를 타고 앞길을 지나던 그녀를 본 게 며칠 전인데, 텔레비전에서 흰 강아지랑 자동차에 앉아있는 행복한 사진을 다시 보며 믿기지 않는다. 비행기에서 가장 친한 친구와 마지막 통화를 나누었을까.

방송국직원은 개도 함께 죽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오늘은 타 주에 사는 아버지가 다른 딸과 손자를 데리고 와서 빈집의 살림들을 끄집어내 차에 실어나르고 있다. 허망하다. 쓸쓸한 집 앞에 꽃을 가져다 놓고 싶지만 망설여진다. 그냥 마음으로 위로의 기도를 보낸다. 주인이 없는 빈집을 나는 밤낮으로 바라본다. 멋지게 살아온 중년의 허무한 삶이 매일 나를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한다.

인명은 제천이라던가. 왜 하필 그 시간에! 그들이 켜 놓고 간 현관의 등불이 아직 문 앞을 밝히고 있으니 혼이라도 다녀갈까. 불편하고 부족해도 나누면서 조금씩 채워가는 삶이, 어쩌면 더 의미 있고 조금 더 누릴 수 있는 우리의 생이 될지도 모르겠다.

[필자 소개] 교포월간지 ‘피플 오브 샌디에고’ 주필 역임, 수필집 ‘레몬향기처럼(2007년)’과 ‘샌디에고 암탉(2010년)’을 출간했고 한국문인 및 미주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재미수필가. 샌디에고 라디오코리아에서 ‘문학정원’ 방송 연출과 진행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