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칼럼] 새로운 영웅의 탄생 ‘부르카 어벤저스’
[해외칼럼] 새로운 영웅의 탄생 ‘부르카 어벤저스’
  • 강기린<재미만화평론가>
  • 승인 2013.10.24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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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학창시절은 두발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귀밑 3센티가 규정이었죠. 그 당시 저는 존재감이 없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튀고 싶은 생각이 누구보다 강렬했습니다.

어느 날 머리 뒤통수에 당시 유행하던 ‘뽕’을 집어넣어 봤어요. 하필이면 그날 악명 높은 영어 교사가 복장 검사를 할 게 뭡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지 않고 가치중립적 단어인 ‘교사’라고 불렀습니다-그 교사의 죽도는 제 뽕을 사정없이 뭉갰습니다. 그리고 날아온 한마디, “네가 일진이야?” 뽕은 일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는 ‘학생’ 아니면 ‘일진’만이 존재했습니다. 저는 그런 공식이 싫어 학창시절이 끝나기만을 바랬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런 공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식이 아닌 게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죠. 학교를 마치면 직장을 얻어야 하고 그 후에는 결혼을 해야 하며 곧 자식을 낳고, 자식의 결혼도 시켜야 하는, 이 모든 게 공식이었던 겁니다.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야 인생살이가 쉬워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게 포인트였습니다. ‘쉬워진다는 것’ 머리에 뽕을 넣은 이유를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기 보다 ‘일진이라 뽕을 넣었다’라고 생각해 버리는 게 훨씬 쉽지 않겠어요? 그 교사는 제 말을 들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그는 선생님이 아니라 ‘교사’였으니까요.

공식은 복잡한 대상을 기호로 처리합니다. 기호는 간단합니다. 그러나 사람살이는 결코 간단하지가 않죠. 그러나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복합적 판단 과정이 아닌 이 간단한 공식의 법칙입니다. 도그마의 탄생인 셈이죠. 니체식으로 표현하자면 비극의 탄생인 것입니다. 도그마는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비다양성은 창의성을 억제하지요. 그것은 예술의 패륜이고 영혼의 파탄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식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도식적인 소재 중 하나가 바로 ‘영웅’입니다. 신화, 전설, 민담 등, 어느 시대에나 영웅의 이야기는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영웅담은 비슷한 형태를 띄지요. 영웅에겐 현실적으로 해결이 불가한 과제가 주어집니다. 물론 영웅은 그 고난을 극복할 능력이 있어요. 이런 영웅담은 시민들에게 애국심을 주입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웅담을 필요로는 나라가 있었죠.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영웅 신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건립된 것은 유럽에서 합리주의가 시작되었을 무렵이었고, 과학적 합리주의가 유행인데, 도무지 신화적 판타지를 넣을 순 없는 겁니다. 결국 미국의 영웅 신화는 일상에서 찾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무렵, 공상과학 마니아였던 두 남자가 전설의 영웅들을 모두 합친 슈퍼히어로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슈퍼맨 이었습니다. 수많은 퇴짜를 맞은 후에야, 슈퍼맨은 액션 잡지 만화로 신문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과학적 합리주의에 가장 적합한 일상성의 영웅이 탄생하자, 할리우드의 유대인 제작자들은 이 미국식 영웅의 변용을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국기와 비슷한 옷을 입은 슈퍼 히어로가 나치를 쳐부수는 시나리오를 만들었고, 이는 미국인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죠. 슈퍼히어로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할리우드는 의심 없이 매년 슈퍼히어로 영화를 쏟아냈습니다.

역사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구체적인 인종이나 나라를 악의 축으로 묘사하기도 했지요. 적으로 인지되면, 히어로가 때려눕히는 식이었습니다. 이런 패턴은 약 70년 동안 계속되어 왔죠. 그리고 슈퍼히어로의 범람 속에서 우리는 70여 년 동안 폭력을 폭력으로 응징하는 영웅 이야기에 익숙해졌습니다. 악당은 더욱 폭력적이고 과학적이고 교묘하게, 미국이 관련된 전쟁을 적당히 반영하며 변모해 갔습니다. 이젠 미국의 슈퍼히어로라면 보기 전부터 대강의 장면이 짐작될 정도입니다. 바야흐로 ‘영웅의 공식’이 확립된 셈이지요.

그러나 최근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슈퍼 히어로가 등장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파키스탄의 ‘부르카 어벤져스’입니다. 주인공 ‘지야’는 여성입니다. 지야는 낮에는 평범한 선생님이지만, 밤이되면 ‘브루카’를 씁니다. 그녀는 소녀들의 교육권과 자유를 위해 부패한 정치인,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에 맞서 싸웁니다. 그러나 그녀의 무기는 바로 ‘책과 펜’입니다.

이 이야기를 만든 사람은 파키스탄의 사업가이자 팝스타인 하룬 라쉬드입니다. 2010년 한 사건이 연일 신문기사를 장식했습니다. 여성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는 종교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여학교가 폐쇄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신문에서 이 기사를 본 하룬은 ‘이 여학교를 지켜줄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르카 어벤저스에 영감을 주게 된 거죠. 폭력으로 상처받은 파키스탄 여성들에게 또다시 폭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을 테니 부르카 어벤져스는 ‘비폭력 슈퍼히어로’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어린이의 노동 문제, 성차별, 혹은 종교적인 폭력의 심각성을 다루기 시작했지요.

여성이 슈퍼히어로인 경우는 할리우드에서도 종종 있었습니다. 원더우먼과 캣우먼 등이 바로 그것이죠. 그러나 하룬은 그들을 모델로 삼지 않았습니다. 할리우드의 여성 슈퍼히어로들은 딱 달라붙는 옷에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데, 하룬은 그런 성 상품화의 전례를 따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여성을 성 소유물로만 보는 극단주의자들에게 또다시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는 그녀에게 부르카를 입혔습니다. 정형화된 슈퍼 히어로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 슈퍼 히어로의 탄생하면서 악당을 주먹으로 응징하는 슈퍼히어로의 공식은 깨졌습니다. 파키스탄의 여자 어린이들은 자기 자신의 소중함과 권리를 슈퍼 히어로로부터 배울 것입니다.

이 새로운 애니메이션은 파키스탄 현지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단순한 제3세계의 2D 애니메이션이, 블록버스터급 CG를 자랑하는 기존의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들을 뚫고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존의 이미지에 대한 성찰입니다. 도그마의 극복 처방에는 성찰만큼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인류의 근대사를 열어낸 그 위대한 한마디, 르네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은 여전히 오늘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류의 유일한 진화 방법일 것입니다.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고 설득하는 슈퍼 파워. 부르카 어벤저스는 새로운 슈퍼 히어로의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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