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친구네 아름다운 부엌
[Essay Garden] 친구네 아름다운 부엌
  • 최미자<미주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3.12.03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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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서 남북전쟁 때 치열하게 싸운 남군의 전쟁터, 룩아웃 산맥의 서쪽 가파른 절벽을 보며 신기했다. 산 위쪽의 남군은 짙은 안개로 절벽 아래서 올라오는 북군을 볼 수 없었다니, 당연히 북군의 승리였다. 하늘도 노예해방을 외치던 북군을 도운 것일까. 그 역사적인 산은 가을이면 화려한 단풍으로, 바람 잘 부는 날이면 행글라이더들이 모여 재주부리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4천 스퀘어 피트가 넘는 친구 집. 남군이 텐트를 쳐놓고 야전 병원으로 사용하던 땅을 동네의 재벌 후손이 집을 지어 살던 곳이다. 룩아웃 산의 놀이 공원인 바위정원을 세운 사람들이다. 친구의 남편(정윤길)은 장성한 아들과 채타누가의 병원에서 호흡기내과 전문의로 함께 일하고 있다. 집안의 대를 이은 한인으로 백인들 속에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근처에 사는 아들은 마침 휴가를 떠나 방을 내주어 우리가 잠을 편히 잘 수 있었다.

옆길로 조금 올라가면 처음 살았다는 친구네 집이 있다. 동네를 소개하던 남편은 1980년대 초, 아이들과 산책하다 길가에 앉아 “저 집 좋다”며 구경하곤 했는데 이사 와 살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집 또한 새주인을 잘 만났기에 삼십 년 동안 남편은 정원을, 집안은 부인이 가꾸며 사랑받고 있지 않는가.

100년 된 집이라 여러 번 수리했고 미술을 전공한 친구답게 잘 꾸며 놓았다. 안주인이 깔끔하게 편하게 쉬도록 자상하게 준비해 놓은 방과 목욕탕. 넓은 부엌에 친구들이 모여 재잘재잘 대었다. 동창회에 처음 나타난 나는 그런 모습이 재미있다.

퇴근한 남편은 매화 주로 우리들의 잔을 채우며 환영했다. 은애가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쇼팡의 즉흥 환상곡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제비뽑기로 6번인 나는 식사당번이다. 친구가 준비해 놓은 나물 들을 양념하고 설거지를 맡았다. 베풀기 좋아하는 경희가 내슈빌의 음악 전당에서 구매하여 모두에게 선물해 준 디스크를 누가 틀어 놓았다. 거실에 모여 친구가 추는 춤을 따라 하며 천장이 들썩하도록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이 즐거운 소음은 다음날 일터로 나갈 친구의 남편에게는 흐뭇한 자장가로 들렸으리라.

친구들이 일부 떠나고 토요일 점심엔 82세에 첫사랑과 결혼한 최XX 의사선생님 댁에서 준비한 평양식 냉면을 먹으며 놀았다. 닭고기와 소고기를 고아낸 육수에 냉면을 빨래 헹구듯이 씻어낸 쫄깃한 국수. 빼빼인 내가 두 그릇이나 먹는다고 야단이었다. 수양딸처럼 경희가 그 댁에 드나들며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까지 대접을 받았다.

이른 아침 떠나는 친구들이 공항에서 먹도록 도시락까지 싸주는 경희의 세심함에 난 연일 감동이다. 운전하고 식사 준비하느라 잠은 몇 시간밖에 자지 않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던 슈퍼 우먼 친구. 만나기 전 종종 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친구의 영어 필체에 반했는데, 와 보니 가정에서도 헌신적이다. 근처에 사는 손자 손녀들이 오면 부엌에서 편하게 놀도록 마련한 철판 식탁이 독특하다. 창가의 서양란 화분들은 초록으로 생기를 머금고, 불 화덕 위에 놓인 예쁜 시계와 장식품들. 무엇보다도 안주인이 날마다 사랑으로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며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부엌!

월요일 아침, 창밖으로 내려다 본 채타누가는 구름 속에 있다. 신기하여 사진을 찍으며 나는 또 한 번 집 주위를 돌았다. 서울에서 대학 나온 도시처녀가 미국의 아름다운 시골, 룩아웃 산을 떠나 살 수 없게 된 까닭을 알 것만 같다. 돌아오던 날은 내슈빌의 비행장으로 가는 셔틀버스가 있어 친구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었다.

유리창으로 흘러내리는 보슬비를 바라보며 한없이 머물고 싶던 고속도로. 설악산 바위틈에 피어있는 단풍을 연상하듯 아름다웠다. 호수와 강이 있는 풍경은 물이 귀한 사막동네에서 온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자연이었다. 고마움으로 내가 준비해 간 연둣빛 웃옷을 두 친구가 입으며 우정을 생각해주는 새봄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필자 소개] 교포월간지 ‘피플 오브 샌디에고’ 주필 역임, 수필집 ‘레몬향기처럼(2007년)’과 ‘샌디에고 암탉(2010년)’을 출간했고 한국문인 및 미주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재미수필가. 샌디에고 라디오코리아에서 ‘문학정원’ 방송 연출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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