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열時論]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태준선생
[전대열時論]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태준선생
  • 전대열<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14.06.10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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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몽골은 2000km나 떨어져 있는 머나먼 나라다. 그보다 먼 나라도 많고 많아서 구태여 멀다는 표현이 쑥스럽긴 하지만 그것은 미국처럼 왕래가 잦은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피부로 느끼는 점이 멀다는 뜻이 될 것이다.

몽골에 가려고 비행기를 타면 불과 3시간 남짓 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기내식 먹고 눈 한번 부치고 나면 바로 울란바토르 징키스칸 공항에 착륙한다. 몽골은 러시아의 영향 때문에 일찍이 북한과 수교했으나 한국과는 1990년에서야 외교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20년 사이에 경제적 교류는 100배로 증가했다고 하니 사회주의를 포기한 몽골의 경제도약에 대한 집념을 알 수 있다. 몽골의 인구는 300여만 명에 불과하지만 영토는 한반도의 7.5배다.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초원과 사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직도 유목생활을 통해서 5천만 마리의 가축을 기르고 있어 사막화 현상에 따른 황사로 뒤덮여져 있는 열악한 환경이다.

13세기 징키스칸에 의한 세계최대의 제국이라고 보기에는 현재 너무나 초라하다. 몽골이 중국을 집어 삼키고 원나라를 만들어 우리나라를 압박하고 고려 몽골연합군이 일본침략까지 감행한 역사는 이제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다.

그나마 일본열도에 상륙조차 하지 못하고 때마침 불어온 태풍에 의해서 두 번이나 실패한 것은 일본에게는 행운이었다. 원나라가 청나라에 의해서 망한 후 몽골의 화려한 전성기는 다시 도래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에 내몽고를 내주고 러시아에 바이칼호수를 빼앗기는 등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지금도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중국을 덮고 한국까지 피해를 입고 있으나 이를 방지할 수 있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빈곤의 나라로 전락해 있다. 한국인은 태어나면서부터 몽골반점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인종적으로 상통하며 문화적으로도 정서가 비슷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 때 한국의 독립운동가가 몽골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한 복판에는 가장 멋들어진 공원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곳이 바로 한국인 독립운동가 대암(大岩) 이태준(李泰俊)선생 기념공원이다. 몽골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전격적으로 참전을 선언한 러시아의 권유에 따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한 승전국 중의 한 나라다.

중국 중경에 있던 한국임시정부가 원폭세례에 놀란 일본의 무조건 항복 때문에 참전의 기회를 놓쳤던 것과 달리 몽골은 총 한번 쏴보지 않고도 승전국이 될 수 있었으니 운명은 엇갈리기 마련인 모양이다. 몽골에 이태준이 나타난 것은 1914년이다.

그는 1883년에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07년 제중원(濟衆院) 의학교에 입학한다. 제중원은 조선말 조정에서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만든 기관인데 서양인 의사 겸 선교사들에 의해서 운영되었으며 이 곳이 나중에 세브란스병원이 된다.

이태준은 여기서 의학을 익힌 후 제2기 졸업생으로 의술개업인허장(제92호)을 수여받고 의사로 활동한다. 때마침 일제 강점 직후 조선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섬멸하려는 일제에 의해서 105인 사건이 조작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이태준은 중국 남경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남경에서는 기독회의원이라는 병원에서 일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김규식의 권유에 의해서 몽골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된다. 1914년 울란바토르에 정착한 까우리(高麗)의사 이태준은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설하고 성병퇴치에 앞장선다.

당시 몽골은 성병이 만연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인데 조선에서 온 의사가 있어 그나마 숨통을 돌릴 수 있었다. 몽골에서는 그를 신인(神人) 혹은 극락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이라고 부르며 몽골의 마지막 왕인 보그드칸8세의 어의로 임명되어 에르데닌 오치르라는 최고의 국가훈장까지 받는다.

그러나 이태준의 속뜻은 조국의 독립에 있었다. 그는 몽골사회에서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며 주요한 비밀 항일활동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17년 볼쉐비키혁명에 성공한 러시아는 혁명의 열기를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에게도 전하기 위해서 코민테른 자금 40만 루블을 전하며 그 중에서 4만 루블은 이태준이 직접 운송했다고 한다.

그는 김원봉의 의열단에도 가입하여 행동적인 독립투사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특히 우수한 폭탄 제조자인 마쟈르라는 이를 소개하여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무력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이럴 즈음 백계 러시아의 잔인하기 짝이 없는 ‘미친 남작’의 별명을 가진 운게른이 몽골을 점령했다. 운게른은 울란바토르에 거주하는 많은 외국인을 잔인하게 처형했다. 이태준 역시 이들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38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국했다.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우리 정부에서는 그의 강인한 투쟁정신을 기리고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은 인간사랑의 참뜻을 높이 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몽골 최대의 자이승 전승기념비가 서있는 관광지 근처에 기념관을 세워 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뜻을 아로새기게 했다. 이 기념관을 세우기까지는 몽골연세친선병원장 전의철박사의 공로가 특별히 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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