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신문을 읽는 아버지가 그립다
[Essay Garden] 신문을 읽는 아버지가 그립다
  • 최미자<미주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4.06.16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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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6월 셋째 일요일은 아버지날이다. 아버지날의 유래는 이렇다. 남북 전쟁으로 홀아버지(William Jackson Smart)가 된 군인 아저씨가 6자녀를 길었다. 훗날 자녀 중에 소노라 도드 라는 딸(Father's Day was founded in Spokane, Washington at the YMCA in 1910 by Sonora Smart Dodd)이 교회에서 어머니날에 설교를 듣다가 목사에게 아버지의 생일을 세상의 아버지날(엄마 역할을 하는 아버지들)로 기념하고 싶다고 건의한 것이 이듬해인 1909년 6월 19일, 최초의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일부 남자들은 이 행사를 거부하기도 하며 토론하다 드디어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연방 공휴일로 만들자는 제안에 사인하며 공식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차츰 세계의 여러 나라도 아버지날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도 1956년부터 시작된 어머니날을 1973년에는 아예 어버이날로 이름을 바꾸어 동등하게 부모님을 생각하는 날로 만들었다.

언제 들어도 그리운 이름, 아버지. 내 친정아버지는 옛 어른들처럼 어머니와 우리에게 큰소리를 치셨다. 돈도 못 벌어 한때 못난 아비로 평을 받았지만, 너무나 청렴한 분이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돌아보는 내 아버지의 평가는 매우 높게 올려드리고 싶다.

내가 어린 시절 아스라이 기억에 남아있는 욕심쟁이 할아버지를 아버지는 존경하지 않았다. 아버지 서재의 벽에 소중하게 걸려있던 양반 갓을 썼던 증조할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는 사업가였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당시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했지만, 사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넉넉한 환경에서 물질적인 허무함을 느끼셨는지, 한 소박한 가장으로 살기를 원하셨다. 사회에서나 직장에서 불의를 보지 못하는 성격이셨고 부자로 살려고도 하지 않았다. 늘 약한 사람들 편에 섰고 집안일을 헌신적으로 하며 가족을 챙기던 아버지이셨다.

그러한 환경 탓일까. 나 역시도 어른 말씀에 순응하고 착한 막내딸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뜻밖에 고등학교 때부터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를 곁에서 보며 괴로웠지만 잊지 못할 소중한 삶도 배웠다.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병든 아버지의 고민을 알기에 당시 인생에 대한 심각한 나의 의문들을 여쭐 수도 없었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두해 동안, 아버지가 미안하다는 말만 어머니께 거듭하실 때면 나는 부엌에 서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은 거친 인생을 해쳐나갈 수 있도록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때론 사는 것이 숨이 막혀서 스님이 될까? 혹은 수녀가 되어버릴까 하고 하루는 수녀원을 다녀오던 날이었다. 밤새도록 흐느끼던 아버지의 통곡은 자식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해 준 사랑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야 할 까닭이 되었다.

대학생활 중에 아버지의 별세소식을 듣고 대구에서 서대전역을 돌아 종일 기차를 타고 달려왔지만, 뚜껑이 닫힌 관속의 아버지를 결코 난 만날 수 없었다. 허무한 아버지의 주검이 담긴 나무관이 화장터 구멍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난생처음 서럽게 울어보았다. 그 눈물 덕분에 나도 아버지처럼 훗날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떠나는 날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얼마 전 자식들의 영안 사진을 놓고 49재일에 엎드려 절하는 세월호 유가족인 부모의 절규를 신문 기사로 읽었다. 지금도 희생자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어서이다. 현상금까지 걸어야 하고 국력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이 시대의 정말 부끄러운 아버지, 유병언. 자식들과 떳떳이 국민 앞에 나와 용서를 빌고 무릎을 꿇지 않고 있다. 물질 만능, 이 시대에 비굴한 아버지들은 또 얼마나 있는지.

높은 관리직에 도전하지 못했어도 철저히 도덕적인 모범을 보여준 내 아버지. 아침이면 배달된 신문을 마루에 펼쳐 놓고 돋보기를 손에 들고 신문기사를 진지하게 읽으시던 얼굴. 나는 옆에서 아버지처럼 영어만화 불론디를 재미있게 보았던 행복한 중학생이었다.

요즈음 아버지들은 돈을 많이 벌어도 종이 신문과 종이 책 값에는 잘 투자하지 않는다. 대부분 뉴스는 텔레비전으로, 신문은 손전화와 컴퓨터로 후딱 읽는 것 같다. 또 아파트에 사니 뜰에서 할 일도 없고 저녁이면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 귀가한다. 한두 명 밖에 안 되는 자녀를 뽀뽀하며 아이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는 싱겁기 짝이 없는 아버지들이 아닌가. 그 자녀들은 자라서 훗날 어떻게 존경스러운 모습으로 자기 아버지를 기억해낼까.

우습게도 유난히도 북적거리는 어머니날과 달리 미국에서 아버지날은 조용하다. 장사꾼들은 상품을 만들어 선전하지만, 유명한 식당도 어머니날처럼 두 배로 오르는 음식 값을 청하지 않는다. 열 달을 배 안에 품고 또 희생으로 기르는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리라. 그래도 난 아버지날이면 가장이 없는 가정에도 연민을 보내며, 묵묵히 아버지 역할을 하는 세상의 분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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