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한민국-67] 한지(韓紙)
[아! 대한민국-67] 한지(韓紙)
  • 김정남<본지 고문>
  • 승인 2014.06.2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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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남(본지 고문, 전 청와대 사회교육문화수석)
“나는 한지. 은은하고 조용할 뿐이다. 이 땅의 모든 이가 내 보살핌을 받았다. 한지 장판 위에서 태어나 창호지와 벽지 속에서 살았다. 한지로 만든 책을 읽고, 한지 위에 글을 써서 벼슬을 했다. 한지에 쓰인 어명(御命)은 생사를 갈랐다. 몇 겹 한지로 만든 갑옷은 화살도 막아냈다. 한지에 쓰인 불경은 평화를 전달했고 내면을 가다듬었다. 나로 만든 저화(楮貨- 닥나무 종이로 만든 지폐)가 많으면 부자였다. 책장, 장롱, 함, 반짇고리, 부채 같은 생활용품에도 나는 필요했다. 좀이나 벌레가 먹지 않게 옷을 싸두는데도 썼다. 헌 책으로 끈을 꼬아 표주박, 바구니, 소반, 쌈지단지, 방석, 필통, 자리깔개, 화살통 등을 두루 만들었다. 가난한 이들은 겨울 누비옷에 한지를 넣어 추위를 막았다. 대중국 외교에서도 필수품이었다. 나는 지식을 전파하고, 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매개자였다. 나는 삶의 마지막도 관여했다. 수의를 한지에 싸두기도 했고, 보통사람은 염도 한지로 했다. 아, 나는 부자와 서민 가릴 것 없이 도움을 줬다. 그런데 지금 내 처지는 어떠한가?”(1995년 국립민속박물관 간행, 「한국의 종이문화」에서의 한지 내레이션)

한지(韓紙)의 역할과 그 쓰임새에 대해 비교적 쉽고 짧게 잘 설명하고 있다. 한지란, 한국에서 나는 닥나무를 원료로 하여 한국의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종이를 말한다. 흔히 “종이 천 년, 비단 오백 년”이라 하여 한지의 끈질긴 내구력과 생명력은 이미 세계에도 널리 알려진 바 있다.

1966년 9월,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이 도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석가탑을 해체 복원키로 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리와 경이 나왔다. 그것이 국보 126호,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이다.

이는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본이다. 중국 측은 즉각 그것이 중국에서 인쇄되어 전래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2007년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은 ‘종이가 8세기초 신라 닥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한지는 그 원료인 닥나무부터가 중국과 다르다. 중국산 닥나무는 따뜻한 남쪽에서 빨리 자라 힘이 없고 질기지가 않은데 반해, 한국산 닥나무는 삼한사온의 기후를 겪어 찰지고 생명력이 강하다.

만드는 방법에 있어서도 전통 한지는 닥 섬유를 얼기설기 고루 얹어 찢거나 잡아당겨도 견디는 힘이 강하다. 또 종이를 만들고 나서도 ‘도침’(방망이로 두들겨 종이를 치밀하고 평평하게 만드는 후처리 과정)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완성품이 된다.

그런 한지가 1990년대 이래 위기를 맞고 있다. 가격 경쟁력이 높은 중국산과 태국산이 들어와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국민들의 한지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청와대에서조차 한지를 국내외 귀빈에게 선물할 때 포장지 또는 그 내피로 가끔 사용할 뿐일 만큼 그렇게 버림받고 있는 것이다. 한지를 다시 살리는 운동이 절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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